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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리 Jul 15. 2018

반농반X

나만의 리틀 포레스트

영농일지를 찾았다. 몇 년 전 작은 농사를 지었을 때 꼼꼼히 작성해 놓았던 일지다. 정확히 2년간 농사를 지었고 앞뒤로는 흙을 조금 만지는 삶 정도였다. 밭에서 일을 하는 건 오직 내가 먹을 채소를 손수 재배하기 위한 열망 때문이었다. 간디가 말한 Be the change you want to see in the world를 실현하기 위해서. (이건 지금도 내 인생의 가치관이다.) 그땐 학교도 다니고 있었고, 방송일도 계속하면서 생활을 유지하고 오전과 저녁 틈틈이 시간 나는데로 일을 했었다. 반농반X. 딱 그런 삶.


밭의 사이즈를 재고 배수가 잘 되는 곳, 그렇지 않은 곳 퇴비 더미와 가까운 곳, 포도나무 뿌리가 얽혀 있는 곳, 사과나무와 체리나무의 뿌리를 피할 수 있는 곳, 돌이 많은 곳, 무른 흙이 있는 곳 등 다양하게 구역을 나누어서 작물을 심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바이오다이내믹 농법 달력을 썼는데, 열매, 뿌리, 잎, 줄기 등 우주의 에너지와 식물이 가장 합일을 이루기 좋은 때를 알고 실행하는 건 정말이지 신기한 경험이었다.


세 종류의 가지, 여덟 종류의 호박, 네 종류의 애호박, 양배추, 당근, 다섯 종류의 샐러드, 멜론, 양파, 고추, 수박, 마늘, 열두 종류의 토마토 등 다양한 채소를 시도했고 바질, 세이지, 로즈메리, 라벤더, 파슬리, 민트 등 다양한 허브도 주변에 함께 심었다. 각 채소마다 궁합이 잘 맞는 또 다른 채소를 옆에 심어주고 사이사이에는 벌과 나비를 부를 수 있는 꽃과 허브를 심었다. 이걸 공부하고 주변 농사짓는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야금야금 정보를 모아 밭에서 시도하는 건 정말 꿀잼이었다. 보쥬산맥에서 벌을 부르는 구근이 있는 꽃과 식물도 가져다 주변에 심었다. 나무는 원래 심어져 있었기에 다듬는 작업만 했었는데, 포도나무, 체리나무, 사과나무, 미라벨, 구즈베리, 헤이즐럿, 배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보내는 일 년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농사를 짓겠다고 결정한 건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으로부터 시작됐다. 장일순, 윤구병, 피에르 라비, 반다나 시바, 슈마허, 소로우, 크리슈나무르티, 사티쉬 쿠마르, 황대권, 후쿠오카 마사노부 등 환경, 농업, 생명, 자연, 생태계에 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인도 오로빌에 가서 파마 컬처 디자인 수업을 듣기도 하고 멋진 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인터뷰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프랑스, 인도, 일본을 여행하면서 우핑을 하며 직간접적으로 배우고 또 배웠다. 그러다 보니, 나 스스로 무언가 해보고 싶은 열망이 샘솟았다. 그렇게 딱 1년만이라도 내가 먹을거리는 내 손으로 재배해보자 하며 농사를 시작했다.


마땅히 물을 퍼올릴 곳이 없었기도 했지만, 빗물이라는 자연이 준 선물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설치하고 고인 물이 썩지 않도록 EM을 넣었다. EM을 넣은 물과 넣지 않은 물로 같은 작물을 키웠을 때 그 다름은 해보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을 것이다. 양질의 흙을 얻기 위해서 음식물 쓰레기로 퇴비를 만들었고, 보쥬산맥에 있는 농장에서 퇴비를 얻어왔다. 어떠한 화학 약품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진드기나 민달팽이 같은 애들로부터 작물을 지키기 위해서 산에 가서 쐐기풀을 한가득 꺾어와 삭힌 뒤에 물과 섞어서 뿌리기도 했고, 맥주를 사용해 민달팽이 퇴출을 하기도 했다. 비가 온 뒤 검은흙 위로 기어 올라오는 지렁이들을 보거나 무당벌레를 보면 한없이 뿌듯해했다. 잠깐 바캉스를 떠날 때는 흙이 마르지 않게 하기 위해 친구 농장에서 밀집을 잔 득가 져와 밭 곳곳을 덮었고 그때 거미가 수십 마리 나와 기겁했던 일은 잊을 수 없다. 한국에서 여행 오거나 우리 집에 놀러 오는 친구들이 있으면 언제나 밭으로 향했고, 엄마가 프랑스에 왔을 때도 자연스럽게 잡초 좀 뽑아 달라며 부탁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우리 집에 오는 모든 손님과 일을 함께하며 열매를 나누어 먹었다.


가을에는 흐드러지게 맺힌 사과를 따다 사과주스를 만들어 이웃과 나누어 마셨다. 땅에 떨어진 헤이즐넛을 주어 껍질을 까고 팬에 볶은 뒤에 헤이즐럿 우유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로 빵을 구워 먹었다. 감자가 잘 자랐으면 좋겠어서 이웃집에서 장작을 얻어와 일부러 재를 만든 뒤 뿌려 주었고, 윗집 일본인 요리사 친구에게 계란 껍데기를 얻어와서 잘게 부순 뒤에 밭에 뿌렸다. 한국에서도 부추나 배추, 무, 깨 등의 씨앗을 가지고 와서 심었는데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았다. 들깨는 처음 심어서 잎이 무성해졌을 때 너무 떫고 알싸해서 먹을 수가 없었다. 씨를 받아서 그다음 해에 다시 재배하니 그때는 향이 조금 세긴 했지만 그럭저럭 먹을만해서 깻잎장아찌를 해 먹었다. 씨앗이 땅과 기후에 맞게 변화하는걸 직접 체험하고 나니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장일순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씨앗 안에 우주가 있다는 걸 체험했다.


이 모든 기억이 낡은 캐비닛 속에서 영농일지를 발견하면서 스쳐 지나간다.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씨앗을 뿌리고 햇볕과 바람을 느끼며 자라는 작물들을 보는 일은 그 어려움을 쉽게 잊게 했다. 농사를 업으로 삼으라고 하면 나는 능력 부족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농사를 업으로 삼고 사는 농부님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젊은 청년들이라면 나는 누구나에게 한 번쯤 흙을 만지며 작물을 키워볼 것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도시 속 콘크리트에서 벗어나 일 년쯤 흙을 만지며 생태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것만큼 인생의 좋은 공부는 없다. 이걸 경험한 사람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한 접근법부터가 다르다.


2년간 농사를 지으며 땅과 함께 하며 나는 앞으로 평생 살아갈 소중한 가치들을 배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깨달음은 모든 것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있어 네가 있고, 네가 있어 내가 있다. 모든 것이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간다는 말. 그때 깨달았다. 우리가 흙으로부터 멀어지는 순간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진다.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 우리가 흙과 자연과 멀어진 순간부터 일어난 일들이다.


영농일지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다시 캐비닛 안에 넣어놨다. 내가 하나하나 정리한 씨앗 봉투와 함께. 본질에서 멀어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캐비닛 안에 있는 영농일지를 떠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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