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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리 Mar 20. 2018

뜨겁게 앞으로 가라

세렝게티 누떼의 이동, 그 가슴 벅찬 열정에 관하여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볼을 따고 뜨겁게 흘러내리는 눈물은 슬퍼서도 그렇다고 기뻐서도 아니었다. 내 눈앞에는 이미 타들어가기 시작한 불씨처럼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강을 건너고 있는 누떼가 있었다.

때는 8월의 어느 날이었다. 사바나의 태양은 뜨겁게 작열했고, 말라버린 대지는 먼지바람과 함께 아지랑이 꽃을 피어대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 위에는 일정한 속도로 줄에 맞춰 이동하고 있는 수 천마리의 누떼가 있었다. 먹을 풀과 물을 찾아 케냐에서 마라강을 건너 세렝게티 초원으로 가는 것이 그들의 목표이자 몸속에 타고난 본능이었다.

마라강변에 도착해서 나는 몸을 숨겼다. 겁이 많은 누떼들이 혹시라도 사파리 차량을 발견하게 될 경우 강을 건너려 하지 않는다고 나와 동행한 가이드가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강 주변에서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강변에는 수천 마리의 누떼가 강을 앞에 두고 망설이고 있었다. 눈 앞에 흘러가고 있는 강을 바라보기도 하고 오랜 시간을 함께 여행해온 무리를 바라보기도 하며 뜸을 들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무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어쩌면 가장 용감한 누 한 마리가 강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이루어졌다. 누떼는 한 마리씩 때로는 여러 마리씩 강을 향해 몸을 던졌다. 뛰기도 걷기도 하며 앞에 있는 누에 부딪치고 물에 빠지기도 했다. 다리가 강바닥에 닿지 않는 다는 걸 깨달은 누의 눈은 말 그대로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있는 듯했다. 하지만 앞만 보고 갈 뿐이었다. 강에서 헤엄치고 다시 헤엄치다 보면 강의 건너편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높게 치솟은 절벽이 있었고 그 위를 올라가야 했다.

절벽을 올라가다 물에 다시 처박히고, 미끄러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누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누의 모습에는 삶이 온전히 담겨있었다. 어미는 새끼를 기다리느라 가파른 절벽 밑 귀퉁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 도태되는 것 같아 보이거나 그 속도가 느려지면 가든 길을 멈추고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해 잠시 기다리기도 했다.

앞으로 나아가려 애쓰는 누를 가로막는 물살은, 삶의 어려움과 고통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성장시키는 힘을 가진 거대한 장애물처럼 보였다. 누떼는 포기하지 않았고, 수 백 수 천마리가 무사히 강을 건너 절벽 위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런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두 눈을 따라 뜨겁게 흘러내렸다.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이렇게 뜨겁게 살았나. 살아남기 위해서 무언가를 강열하게 해본 적이 있었던가. 시도한 일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가. 나는 삶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수많은 누를 앞에 두고 나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돌아봤다. 자연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나는 너무나도 작은 존재였고, 크나큰 열정과 보이지 않는 힘에 압도당함을 느꼈다.

강을 건너고 절벽을 힘껏 오른 물소는 또다시 힘차게 앞으로 나아간다. 무리에 다시금 섞여 들어, 내리쬐는 태양 아래 젖은 몸을 말린다. 승리의 기쁨에 취하고 성공의 행복을 만끽한다.

절벽을 오르지 못하거나 강을 건너는데 실패한 누도 있다. 무리에서 벗어나 혼자 강에 남는다.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도 없다. 강을 건넜지만 절벽을 앞에 두고 다시 강의 초입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가끔 뒤를 돌아봐도 아무도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강은 깊지 않아 걸어서 천천히 건널 수도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몇 초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깨달음과 동시에 그것을 함께 나눌 친구도, 가족도 없다는 걸 느낀다. 강변의 초입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면서도 두려움과 공포가 서렸던 눈에는 슬픔과 고독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혼자 남겨진 자신 주변을 맴도는 건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독수리와 악어뿐이다.

혼자 남겨진 슬픔, 외로움과 고독함. 실패에 대한 고통과 벅차오르는 슬픔을 짊어지고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한다. 하지만 이것조차 어떤 이에게는 행운으로 느껴진다.

성공하지 못했어도, 다음 기회를 누리지 못하고 죽음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하는 자도 있다. 태양이 찢어질 듯 내려쬐고 썩은 내가 가득한 강변 자락 돌무리의 일부가 되어 축 늘어진 육신을 끝으로 잠들어야 하는 영혼도 있다. 더 이상 열정을 들여 강을 건너는 수고와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 영혼은 그저 편안하게 떠나면 되고, 남은 육신은 그동안 이승에서 만나왔던 다른 동물들에게 내주면 된다. 이렇게 자연이라는 거대한 흐름의 일부로 돌아간다.

누떼는 이러한 과정을 매 년 반복한다. 일 년 동안 15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이동하면서 삶의 지혜를 온몸으로 터득한다. 나는 이들 삶의 아주 일부를 목격했다. 그리고 이는 평생 가슴으로 기억할 순간이 되었다. 그들의 열정만큼이나 뜨겁게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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