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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가 JaJaKa Aug 14. 2024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 가루이자와

도쿄 역에서 출발한 지 1시간 16분, 나가노 행 신칸센은 가루이자와 역에 도착했다. 여행 가방을 챙겨 신칸센에서 내린 나에게 2024년 5월 말의 가루이자와는 가방에서 곧바로 겉옷을 꺼내 입어야 할 정도로 쌀쌀하게 느껴졌다. 아, 이래서 가루이자와가 도쿄 사람들의 여름 휴양지라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날씨였다.     


가루이자와 역의 북쪽 출구로 나가면 소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작은 가게와 낮은 건물들 그리고 인적이 드문드문한 거리의 조용한 모습.

그에 비해 남쪽 출구로 나가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아웃렛을 볼 수 있다. 수많은 상점들과 음식점들, 엄청난 크기의 주차장을 빼곡하게 채운 자동차들 그리고 어디에서 왔을지 궁금한 많은 사람들.     

출구 하나 차이인데 이렇게 분위기가 다를 수가 있을까.

마쓰이에 마사시가 쓴 책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으면서 느꼈던 가루이자와의 분위기는 분명 남쪽 출구가 아닌 북쪽 출구여야 맞을 것이다.

나는 호텔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남쪽 출구로 나갔다. 셔틀버스 시간을 기다리면서 편의점에 들러 마실 호지차와 녹차를 사고 주변을 살짝 돌아보았다. 규모가 커서 제대로 보려면 시간을 내서 따로 나와야 할 것 같았다.  


역에서 가까운 곳에 스타벅스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아메리카노와 도넛을 시킨 뒤 자리를 잡았다. 내가 상상했던 가루이자와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적잖이 당황을 했다. 이렇게 넓고 큰 아웃렛이 자리 잡고 있을 줄이야. 그리고 이렇게 사람들이 많을 줄이야.

내가 생각했던 가루이자와는 조용하고 고요하고 한적한 곳일 줄 알았는데.     


호텔 셔틀버스를 타고 역을 벗어나자 소도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조용하고 한적하고 고요한 분위기.

도쿄보다 확실히 기온이 낮아서 덥지가 않았다. 물론 한여름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5월 말을 비교해 봐서는 여름에도 기온 차이가 많이 날 것 같았다. 사실 그러고 보면 가루이자와가 있는 나가노 현은 동계올림픽이 열린 곳이기도 하니 도쿄보다 추운 것이 당연한 일이리라.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서 주 배경이 된 가루이자와에 내가 와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잠바를 입거나 카디건을 걸쳐야 하는 날씨가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이곳에 내가 와 있었다. 이곳 가루이자와에.


보통 여행을 가면 깊게 잠을 자지 못한다. 예민한 탓인지 잠자리가 바뀌면 깊게 잠들지 못한 채 뒤척거리다가 깨고는 한다. 그런데 가루이자와에 와서는 매일 온천물에 반신욕을 해서 그런지 첫날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잠을 잘 잤다. 아마 여행을 다니면서 가장 잠을 잘 잔 여행으로 꼽지 않을까 싶다. 물론 공기가 좋은 것도 한적한 분위기도 한몫을 했으리라.     


호텔에서 일어나 블라인드를 걷고 창밖을 내다보면 바로 숲이 보인다. 빼곡하게 자란 나무들이 병풍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일찍 잔 탓도 있어서 새벽 5시 전에는 잠에서 깨어 창밖을 바라보는 것이 가루이자와에 있는 동안 나의 이른 새벽의 일과로 자리 잡았다. 서서히 날이 밝아오는, 숲이 깨어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지금 내가 꿈속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짙은 안개가 꼈던 숲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안개가 서서히 걷혀간다. 오리 한 마리가 날아올라 선회를 그리며 시야에서 사라지고 어디선가 이름 모를 새가 지저귀고 숲이 기지개를 켠다.    

 

바쁜 도시에서의 시간과 조용하고 한적한 소도시에서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다. 가루이자와에서는 서서히 걷혀가는 안개처럼 시간도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책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으며 가루이자와는 어떤 도시고 그곳에 있는 별장들은 어떨까 궁금했다. 여름 별장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한번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지만 관광객인 나로서는 볼 기회가 없어서 아쉬웠다.

책을 읽으며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모습과 실제로 이곳에 와서 여름 별장을 보며 비교를 해봤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저 이곳 가루이자와라는 도시에 와 본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감사할 일이라 생각한다.     


가루이자와는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인지 내가 머무는 동안 비가 자주 내렸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운치가 있어서 좋을 때도 있지만 여행하는 동안 비가 내리면 발이 묶여서 일정에 차질을 주기 때문에 그리 반가운 손님이 아닐 때가 많다.      


비가 그치고 해가 비치면 어찌나 반가운지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가 주변을 걸으며 사진을 찍기 바빴다. 일기예보를 보고 비가 오지 않는 날로 하루를 골라 아웃렛에 구경을 나가기도 했다. 구경을 하면서 살짝 물욕이 생겼지만 그럭저럭 잘 넘겼다.     

여름이 되면 이곳 가루이자와는 지금보다 더 활기를 띠지 않을까. 여름 별장으로 유명하다고 하니 여름이라는 계절적인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을까 싶다. 너무 덥지 않고 조용하고 한적한 이런 소도시에서 한두 달 지내도 참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루이자와를 떠나는 날 다행히 내리던 비가 그쳤다. 가루이자와 역에서 신칸센을 타고 1시간 3분, 도쿄 역에 도착했다. 겉옷을 바로 벗어서 가방에 넣어야 할 정도로 날씨가 달랐다.

정신없이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잠시 길을 잃고 헤매었다. 어디에서 표를 사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야 하는지.     


2024년 5월 말의 늦은 봄,

나의 이번 봄의 마지막은 가루이자와의 울창한 숲에서, 히노키탕 안에서, 고요하고 한적한 길에서, 방에 앉아 비오는 창밖 풍경을 보면서, 뜨거운 컵라면 소바를 손으로 들고 먹으면서, 그곳에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202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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