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5-036
1
또 정신없이 일주일이 지나갔다.
2
지인과 명동에 가서 드립 커피를 마신 후 그 이후엔 남산 산책로를 걷기로 약속했었다.
언급된 날에 일정이 많아서 피곤할 것이 분명했는데도 무릅쓰고 약속을 했다. 그런데 막상 그날 비가 온다고 해서 전날 약속을 파하고 말았다.
반전은, 그날 아침에 비가 찔끔 내리고는, 사람 놀리듯이, 아주 화창한 나절을 자랑하더라는...
이런 망할.... 다 죽어버려... 얼마 만에 약속이었는데.... 오래간만에 봄나들이 해보려했는데!
3
그 이틀 후, 강좌를 들으러 가는 길에 벚꽃 나무 가로수길이 눈에 띄었다.
꽃이 제법 만개해서 화사했다. 바람이 불자 벚꽃잎이 휘날리며 아스라이 꿈결같은 분위기도 연출되고 정말 아름다웠다.
어디선가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길래, 가던 길에서 벗어나 건너길 벚꽃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바람은 쏴아 불었고 나는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으려 애를 썼다. 수십여 이파리 중 하나를 잡으려고 애를 썼으나 놓쳤다. 그러기를 서너 차례, 계속된 허탕보다 민망한 것은 그 근처에 계시던 할아버지가 나를 보고 피식 웃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바람은 더 이상 불지 않았고 벚꽃잎은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민망함과 더불어 거기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져서 자리를 뜨려 했다.
"아가씨, 기다려봐. 내가 나무 한 번 후려쳐 줄게. 꽃잎이 후두둑 떨어질 거야."
웃고 계시던 할아버지도 아니고 어디선가 다른 할아버지가 나오셔서 그렇게 말씀하신다.
어째 생각보다 나를 보고 있었던 사람이 많았던 것 같아서 더욱 부끄러워지는 바람에, 나는 "아니에요."하고 얼른 뒤돌아서서 걸어나갔다.
"어이! 후려쳐 준다니까!"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정말 발로 차셨나 보다. 쿵 소리가 들려왔다.
벚꽃 나무야 미안해. 나 때문에....
나는 아직 포기한 게 아니었다. 앞길에는 벚꽃 가로수가 더 있었기에 바람이 불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바람이 불었고, 꽃잎이 나풀거렸고, 나는 재빨리 손뼉 치듯 이파리 하나를 손안에 가뒀다. 슬며시 손을 열어보니 고운 잎 하나가 정말 잡혀있었다. 기분이 좋아서 소원을 빌려는 순간.... 휘잉 미풍이 불었고 그 얇고 여린 꽃잎은 순식간에 폭풍을 만난 듯 휩쓸려 날아가 버렸다.
이렇게 허망할 수가..... 내 소원은..... 어쩌지...?
4
봄나들이도 물 건너 갔고, 소원도 이루어지려다가 날아가는 마당이고... 나는 예쁘게 고운 꽃잎을 살포시 잡으려고 했는데 할아버지는 '후려쳐'준다는 말씀이나 하시고.....
5
내 나이에 요행이나 행운을 바라면 안 된다는 신의 계시인가 보다.
그래, 꽃잎 따위가 소원을 이뤄준다는 게 말이 돼? 모두 다 나 하기 나름이지, 뭐.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히 연구하고 빡세게 실천하는 것만이 답인 거지... 암. 그런 거지.
몽환적 분위기, 마술적 행운 같은 거, 기대하지 말자.
아우, 결국 이렇게 생각할 것을...
그 할아버지한테 내 뒤통수나 후려쳐달라고 할 걸 그랬나?
그럼 즉시 깨우쳤을 텐데.
6
후려쳐준다는 할아버지의 언사는 좀 거칠지만 그 마음씀은 감사해서... 웃음도 나고... 어디서 보고 계셨다가 나타나신 건지 웃기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고......
한주를 또 하릴없이 보내고 헛헛했는데 '후려쳐준다'라는 말만 생각하면 웃음 나와서 주말이 조금은 즐거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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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생기는 약간의 광기는 심지어 왕에게도 유익하다.
-에밀리 디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