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때 그림을 그려서 밥벌이를 하고 싶었다.
재능보단 노력이 부족해서 이루지 못했다고 변명하고 싶지만 노력을 안 했다는 것도 창피한 일인지라 그냥 침묵하려 한다.
아무튼 밥벌이를 하려고 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그림 그리는 법을 조금은 알고 있다.
일단 직업으로서가 아닌, 취미로 그림을 그리겠다고 마음먹으니 한결 심사가 편해졌다.
2
그림을 취미로 하려면 재료비가 좀 있어야 한다.
종이, 펜, 붓, 물감 등등... 다 구비하려면 지갑 두께가 좀 얇아질 것이다.
요즘은 디지털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많다. 그래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태블릿과 펜, 앱까지 구입하다 보면 디지털이나 아날로그나 그림 그리기라는 취미는 비용이 많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3
나는 광활한 미술 세계에서 딱 '두 종류의 그리기'에만 손대기로 했다.
그건, 라인 드로잉과 수채화이다.
라인 드로잉은 종이와 펜이면 기본 재료가 완성된다.
수채화는 종이, 물감, 붓 이외의 몇 가지 자잘한 재료면 기본을 갖출 수 있다.
사람이 욕심이 좀 덜하면 사는 게 단순해질 텐데 자꾸 물욕이 생겨서 복잡해진다.
라인 드로잉은 정말 종이와 펜만 있으면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취미이다.
그런데 스멀스멀 욕심이 퍼져 나온다.
'검정펜으로만 그리니까 너무 단조로워. 회색 펜이랑 사는 김에 초록, 보라색 펜을 좀 살까?'
그렇게 화방넷을 쇼핑하다가 문득 확인해 보면 색 펜 낱자루 3개가 선택되어 있지 않았다.
제조사별 종류마다의 "펜 세트"도 아닌 "펜 세트[들]"이 장바구니에 가득 목록으로 담겨있었다. (나도 모르게... 무섭구나...)
가장 단순하게 할 수 있는 라인 드로잉 취미가 이러한데, 수채화는 재료의 종류가 더 다양하고 많아서 욕심나는 것들이 세트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다.
아휴. 아무튼 그리는 행위에의 열망보다, 재료 구매에의 열망이 더 큰 것 같아서 골치가 아프다.
4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새로 구입한 회색 펜으로 라인 드로잉을 그려봤지만 썩 색다르게 그려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새 펜을 집어 들어 그리기 시작할 때의 그 마음은...
"내, 다빈치가 '누님, 어찌 이리도 훌륭하게 그리셨소, 한 수 갈켜주소.'라고 할 만큼 끝장나게 그리고 만다."...
...였다.
신이 났고 기세등등했다.
비록 호랑이 그리려다 고양이 그린 정도가 되었지만, 생각해 보면 그게 정상이다.
다빈치가 누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내 그림이 훌륭하면 내가 왜 그림을 취미로 하겠는가, 본업으로 하지.
왜 재료값을 걱정하겠는가? 소더비에 경매로 그림 팔면 돈이 될 텐데.
이게 다, 나의 취미 활동은 취미로까지만 곁에 둬야 한다는 순리일지도.(아전인수..)
5
요즘은 점차 그림 그리는 것을 줄이고 있다. 진짜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는데 정작 본업에 열중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어렵사리 드로잉을 멀리하고 있다.
아프게 끊어내듯 멀리하니까 더 애틋해서 자꾸 생각난다. 막 그림을 그리고 싶어진다.
그래서 간간이 드로잉을 하게 될 때 좀 더 크게 신이 나는 것 같다.
6
좋은 취미는 사람의 깊이와 넓이를 크게 해준다고 했다.
독서의 장점도 알겠고 글쓰기의 장점도 알겠다. 그것들은 언어를 매개로 정의할 수 있다. 언어로 된 대상들이니까.
드로잉의 장점은 알쏭달쏭하다. 그려놓은 그림을 보며 직관적으로 느낌과 만족감을 얻는데 그게 사람의 깊이와 넒이를 어떻게 만드는지 잘 모르겠다.
언어로 표현하려 해도 표현하기 어렵고, 완성하기 전까지는 어떤 느낌인지도 모를 그림을 붙잡고, 이 그림의 형태가 가장 납득하기 좋고 호감을 줄 수 있는 구성으로 그리려고 노력하되, 의식하거나 말로 표현하면서가 아니라 그냥 감으로 그런 것을 지향하며 작업하는데, 그런 지향하는 뇌의 활동이 사람의 내부를 다채롭고 쾌적하게 만드는 거 아니겠나 짐작할 따름이다.
7
드로잉은 즐겁다.
재료를 구입하는 것도 즐겁고, 그 재료 하나로 다빈치를 남동생 삼아 나를 찬양케 만드는 뻔뻔한 상상을 할 수 있는 것도 즐겁다.
백지를 앞에 두고 뭘 그릴까 고민하는 건 좀 별로지만 일단 그리기 시작하면 참 즐거운 취미다, 드로잉은.
오래도록 드로잉을 향유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