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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져니 Jul 27. 2024

자잘스토리 8 - 029 - 여름 맛  






1


온습도계를 하나 구입했다.

아기 손바닥만 한 이 작은 측정 기기는

건전지를 연결시키자 마자 온습도 수치를 표시했다.


나는 고장이 난 줄 알았다.

연결시키자 마자 찍힌 숫자는 기온 30도,

습도 72%...


'....어디 꺼지?... 불량인가?

컴퓨터에 표시되는 이 지역 기온이 27도였는데,

왜 실내 온도가 30도인 것인가?

건물 안이 원래 더 시원한 게 아니었던가?

이건 불량이 확실하다.'


...라고 생각...

그래도 혹시 모르니 며칠 두고 보다가 

불량이 확실한 것 같으면 교환 절차를 밟자...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날도 기온 30도, 그 다음날 31도...

비 오는 날 실내 온도가 이렇게 높을 수 있나?

이건 불량이 확실하렸다!




2


그러나 날은 정말 너무 더웠고 나는 확연하게 지쳐갔다.

식사시간에 아버지께서 농담을 건네시는데

나는 웃을 기운도 없었기에


"농담하지 마세요. 너무 더워서 힘들어요."


...라고 말씀드리고 축 쳐져서... 밥은... 먹었다.


장난기 많으신 아버지는 그럼에도 몇 번 농담을 건네셨는데,

높은 습도... 더운 기온... 진이 빠진 나는

예의로라도 웃어드리고 싶었는데 입꼬리가 당최 올라가지 않았다.

세상 노동 다 한 사람처럼 어깨 늘어뜨리고 있으니

아버지께서 딸이 불쌍했는지 비로소,


"에어컨 켜라."


...라고 하셨다.

오호라~! 냅다 리모컨을 찾아 작동시키고 나니...

확인해야 할 게 생각났다.

온습도계를 내 방에서 꺼내어왔다.


아니, 근데, 이 온습도계 자쉭이... 정상 작동하는 게 아닌가.


나는 날이 좀 덥고 장마철이니 습도 때문에 불쾌지수가 높아져서,

그래서 좀 힘들게 느껴지는 줄 알았다.


에어컨 본체에 실내 온도가 26도로 표시 되자, 이 자쉭도 26도 되더라.

습도는 55%까지 내려가고... 아.. 어찌나 쾌적하던지... 가 아니지...

아무튼 온습도계의 정상 작동을 확인했고 불필요한 교환 절차를 막을 수 있었다.


중요한 사실은,

내 방 평균온도 30도, 평균 습도 75%...


내 방은 열대 우림인가 보다. 왤케 더워? 왤케 습해?




3


집에 에어컨이 있으면 뭐 하나?

나는 눈 뜨고 있는 시간은 거의 내 방에서 지내는데,

작업도 휴식도 취미도 가끔은 식사까지 내 방에서 행하는데,

내 방에 에어컨이 없으니, 이런 더위엔 고생 뿐이다.




4


에어컨을 쐬러 거실이나 안방에 가면,

아무래도 시원하니까 오래 앉아 있게 된다.

그러다가 너무 허송세월, 너무 노는 것 같아서 


'작업을 좀 해야지, 그래, 몸도 식혔잖아.'


...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일어서기까지 마음을 꽤 여러 번 다잡았다. 

그렇게 어렵사리 움직여 내 방문을 여는 순간, 

훅 끼얹어지는 더운 공기에 놀라,


'좀 더 놀까 봐...'


...라고 몸을 돌리기 일쑤이다.




5


어제 오늘 폭염주의보가 떨어졌고,

오늘은 아버지께서 일찌감치 거실 에어컨을 켜주셨다.

나는 내 방에서 컴퓨터를 잡고 있어야 해서

별수 없이 홀로 땀 쭉쭉 흘려야 할 거라 생각,

슬며시 뿔딱지가 나서, 

웹 검색으로 창문형 에어컨을 검색해 보고 있는데,

아버지 왈,


"방 문 다 열어둬라. 오늘 원 없이 켜놓자."


...라고 하시더니 정말 낮부터 저녁이 된 지금까지

거실 에어컨을 켜놓고 계신다.




6


요즘은 에어컨 전기비가 많이 안 나온다고도 하고,

게다가 우리 집 에어컨은 에너지 효율 1등급 짜리인데,

왜 이렇게 에어컨을 안 켜시는가....?


근데... 화딱지가 나고 뿔딱지 나서 그런 의문을 갖긴 하지만 

대략 이심전심으로 알고 있다.


전기세도 아껴야 하지만, 여름을 여름답게 더워하며

그야말로 땀 흘리며 '여름 나기'를 해야

그게 더 건강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그건 겨울도 마찬가지, 겨울도 추위를 좀 견디며

떨기도 하고 그러면서 '겨울나기'를 해야

사람 몸에 좋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겨울 난방도 공기가 온화할 정도로만 하시니 말이다.


문제는, 내가 겨울나기는 대충 견디는데

여름은.... 으... 이대로는 못 살겠소,

창문형 에어컨을 검색해서 반항 조의 소비를 하려 했다.


거실 에어컨 켜시고 방문 열라 하시면...

...그렇게 해주시고 상황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아버지!... 그렇게 하셔서! 보세요, 봐보시라구요!

그렇게 하시니까!... 전 ...살만 하옵니다... 

...아부지 땡큐 베리감사!


머리에 난 뿔이 사라졌다.

마우스를 움직여 창문형 에어컨 검색창도 껐다.




7


살만한 하루였다.

그러나 우리 집 가풍으로는 '폭염주의보' 정도가 떠야,

에어컨을 가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하루였다.


에이, 왤케 더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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