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몇 주 전 어머니가 무엇인가를 들고 들어오셨다.
무엇이냐고 여쭙자 어머니 왈,
"아랫집 청년이 하나 주더라. 너 먹어."
...라고 하시길래, 찬찬히 보니 건어물이었다.
다시금 자세히 보니까 건어물 중에서도 문어발이었다.
깔끔한 지퍼백 포장 안에 건문어발 5마리가 들어있었다.
2
치아교정을 하고 난 후 잇새가 생겨서
음식물을 먹으면 유쾌하지 않게 잇새에 낀다.
그렇다 보니 먹는 게 좀 꺼려지기도 하고,
또 잇새가 생기면서 혹여 치아가 부실하게 흔들리거나
비껴 자리 잡을까 봐 딱딱한 건 피하게 된다.
그래서 치아교정 이후 마른 오징어나 쥐포 같은 것을
심심풀이로도 잘 먹지 않았다.
3
요즘 심경의 변화가 크다.
속으로 삭히다가도, 화가 좀 커서, 좀처럼 삭혀지지 않으니,
'이러다가 여자 헐크로 내가 영화에 출연하게 되겠네.'
...라고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하며
스스로 승화하겠다고, 다시 삭히겠다고 마음을 다잡았었다.
4
화가 나면 뭘 쥐어뜯는다던데, 쥐어뜯어먹는 것도 효과 있지 않나?
건문어발을 보자, 아주 기분이 가벼워졌다.
잘근잘근 씹어서 뜯어 먹을 생각을 하니
뭔가 벌써 화가 반으로 경감되는 느낌이었다.
5
책상 앞에 앉아, 유튭 영상을 틀어놓고,
아주 씹고 뜯고 맛보고, 난리가 났다.
정말 이러다 어금니 나가는 거 아닐까 싶게
딱딱한 문어발이 부드러운 미역이 된 것 처럼...
약간 과장이긴 하다, 아무튼 열라 어금니로 씹어서
문어발이 보드라워질 정도로 씹었다, 그것도
한 봉지 5마리를, 앉은 그 자리에서, 모두 다 씹어 삼켰다.
6
그랬더니 턱 관절이 너무 뻐근해져서,
'이러다 야구 마스코트 턱돌이 되는 거 아냐?'
...라고 걱정했다가, 순간 놀랐다.
마음의 화가 좀 가라앉았던 것이다.
노동 한바탕하고 몸이 노곤노곤해지면,
비록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할지라도
몸이 힘들어서 뇌의 예민함이 약간 사그라진다더니,
문어발 씹느라 턱관절 운동을 했을 뿐인데,
이런 효과가 난다구?
뜯고 씹으니, 이런 스트레스 감소 효과가 난다구?
7
문어발에서 우러나오는 짭짤한 바다 맛이 좋기도 하겠다,
스트레스 감소 효과도 있겠다, 그럼 나는?
8
인류가 불을 사용함으로써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었고
그래서 인간들은 치아가 발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영양분 섭취가 쉬워져서 그로 인한 인류의 뇌 발달이 일어났고,
음식물을 저작하면서 뇌에 자극이 가서 다시 뇌 발달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들은 바로는, 치아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은,
치건강한 사람보다 뇌의 노화가 빨라진다고 한다.
9
맨날 라면이랑 냉면, 요거트... 요런 것만 먹었던 터라,
별 자극 안되는 부드러운 것 일색의 저작 활동에서 벗어나,
오랜만의 단단한 것 저작활동이 너무 통쾌했나 보다, 그래서 나는?
문어발을 주문했다.
아랫집 청년님이 준 그 브랜드, 그 문어발 상품을 주문했고
나는 오늘 새벽, 다시 그 문어발을
또 앉은 자리에서 1봉지 안의 5마리를 해치웠다.
내가 주문을 1봉지만 했겠는가?
묶음 상품이라 1봉지는 주문이 안 되기도 해서
4봉지를 구입했다.
속상함이 더 사그러 들도록, 마음은 더 먹고 싶었지만,
도저히... 턱이.... 으...
10
이 글을 마무리하고 좀 쉬었다가
일기를 써야겠다.
속상함과 화는 결국 문어발로 해결될 수 없음을 느낀다.
받아들여야 할 것과, 걷어내야 할 것,
그리고 포기해야 할 것에 대해,
글로 쓰면서 정리해야 할 것 같다.
아마, 쓰는 동안 이 곳은, 울고 짜는 격렬한 장이 될 것 같다.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턱 얼얼한 것보다 우는 게 더 편할 것 같다.
눈물 흘리는 것으로 일어날 수 있는 손해를 방지하고자,
나무로 된 팜레스트는 걷어내고 타이핑할까 한다.
좋은 건데, 비싼 건데, 소금물 떨어져서 손상이 가면 어떠케.
내 팜레스트는 소중하니까요.(로레알~)
11
아... 턱 아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