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 혹은 뻔뻔

by 배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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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남녀공학이었고 교복을 입어야 하는 학교였다. 그 일이 있었던 여름 나는 하얀 상의에 남색 플레어 교복 치마를 입고 있었다. 플레어 교복 치마는 시원하고 통풍이 잘 되었으나 자칫 바람이 불때면 훌러덩 뒤집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가끔 바람 많은 날이면 누군가가 "바람이 불어서 메릴린 먼로처럼 치마를 잡아내려야 했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하교하느라 학교 계단을 내려오는데 남은 계단이 한 개인 줄 알고 습관처럼 다리를 뻗어디뎠다. 그런데 한 계단이 아닌 두 계단이 남아있었던지라 나는 허공을 딛다가 풀썩 주저앉게 되었다. 남녀 공학이었다. 하굣길이었다. 계단 주변에는 학생들로 북적거렸고 나는 그렇게 넘어지는 바람에 수 십 쌍의 눈길을 받아야 했다.

창피함과 민망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 와중에 잠깐 생각해봤는데 넘어질 때 치마가 펄럭였지만 생각보다 많이 펄럭이지는 않았던 것 같고, 또 생각보다 양호하게 살포시 주저앉듯이 넘어져서 치마도 살포시 예쁘게 내려앉은 편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이대로 벌떡 일어나서 바람같이 뛰어나가버릴까? 아니야 그건 너무 웃긴 것 같아. 뭐 다른 방법없나? 얌전하게 넘어진 편인 것 같은데....'


생각 끝에 나는 결정했다. 연약해 보이기로. 나는 잠시 한 손으로 내 이마를 짚었다. 마치 어지러운 것처럼. 그리고 다시 그 손으로 벽을 잡고 의지한 채 천천히 일어났다. 빈혈이 있나 보다, 하고 보이게끔, 채 현기증이 사라지지 않아서 힘겹게 일어서는 양 짐짓 미간을 살짝 찌푸리기도 했다. 그렇게 겨우 일어났다. 하지만 부끄러움은 여전했다. 나는 재빨리 학교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 길로 집에 갈 수는 없었다. 넘어지느라 손에 들고 있던 준비물 가방을 떨어뜨렸는데 급히 나오느라 그것을 주워오지 않았던 것이다. 가방과 함께, 같이 하교하던 친구도 깜빡했고 말이다.

잠시 후, 내 친구가 내 가방을 주워서 천천히 나오더라. 점잖은 내 친구는 별말없이 날 보고 한번 피식 웃고는 가방을 건네줬다. 그렇게 그날 일은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이 났지만 심적 타격이 컸는지 가끔 생각이 나곤 했다.



얼마 전 발목을 삐끗했다. 환승을 위해 지하철 계단을 내려오다 두 계단을 한계단으로 착각한 나머지, 결국 철퍼덕 주저앉았다. 발목에 통증이 와서 아프기도 했지만, 신도림역이었다. 얼마나 사람이 많았겠는가. 뒷사람들의 통행에 방해가 될까 싶어서 발목이 시큰한데도 얼른 일어났다. 이번엔 그렇게 창피하지가 않았다. 바지 차림이었다지만 그 옛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흉하게 철퍼덕 넘어졌는데도 '그럴 수도 있지.'하는 능청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정신적 창피함보다 발목의 아픔에 더 민감해져있는 나를 알아차리면서, 이걸 유연해졌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좀 뻔뻔해졌다고 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했다.

확실한 건, 이제는 웬만해선 연기를 안 한다. 솔직해진 것이라고 혼자 훈훈하게 결말지었다. 그럼에도 아직 의문이다. 유연해진 것일까, 뻔뻔해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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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 음식과 같은 친구로 매일 빠져서는 안 된다.

둘째, 약과 같은 친구로 이따금 있어야 한다.

셋째, 병과 같은 친구로 이를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탈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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