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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경미 Dec 02. 2022

해지기 전 퇴근

이제는 뿔이 없어요

설렁설렁 글 쓰는 시늉만 하다 '탁 타닥' 모스 부호를 흉내 내듯 키보드를 두드리는 모습이 한심해서 평소보다는 이른 시간에 퇴근을 결심했다. 해지기 전 퇴근한다는 것은 나에겐 꽤 의미 있는 일이다. 직장에서 일할 때도 늦는 게 당연한 것이었지만, 회사를 설립하고 대표로 있었던 지난 9년엔 야근의 정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사장들은 좋겠다. 놀고먹어서.’ ‘같은 동업인데 김 실장은 일찍 퇴근하네.’ 이런 생각이 일 도 안 들게 해야 하는 것은 회사를 성장시키는 것만큼이나 막중한 임무 같은 것이었다. 나에게 그런 불명예는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것으로 타인이 그런 시선으로 바라본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섬뜩해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정신 회로에 문제가 생겨 오늘내일하다가 창업한 회사를 자의로 물러나고 나서야 스스로 옭아맨 타인의 시선과 추적당하듯이 쫓겼던 시간에서 해방되었지만 몇십 년 동안 굳어 있던 근육이 쉬이 잘 펴지지 않듯 해가 있는 시간에 퇴근한다는 것은 아직도 어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퇴근 결심을 한 데는 공용 오피스의 건넌방 사장님이 한몫했다. 소리에 민감한 나는 운 좋게도 몇 번의 전화통화 빼고는 하루 종일 조용한 이웃 사장이 맘에 들었는데 오늘은 그동안 듣지 못했던 낯선 목소리가 얇은 벽 사이로 흘러 들어왔다.

“아니, 왜 이렇게 화나게 해. 이게 도대체 몇 번째야. 이게 힘들어? 말이라도 해봐. 변명이라도 해보라고. 이런 일도 안 하고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입장 바꿔 생각해봐. 내가 할 말이 없잖아.”

다른 인격을 입기로 결심했는지 평소 조용하던 건넌방 사장님은 전화기에 대고 누구에겐가 불을 내뿜고 있었다. 거침없이 내뱉는 말은 서슬 퍼런 갑질의 향연이었지만 실제로 내 귀에 들린 그 사람의 어투는 오히려 황망하고 처연했다. 그럼에도 기관총을 쏘는 것처럼 다다다 쏘아붙이는 사장의 일방적인 외침을 수화기 너머로 들으면서 변명조차 하지 않는 저 너머 누군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악랄한 그의 말에 초점을 잃었을까. 건조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혐오감을 참아냈을까.

멍하니 앉아서 얇은 벽 사이 건넌방 사장과 전화기 너머 누군가에 대한 생각이 꼬리를 물던 그때. 깊숙이 넣어 두었던 아픈 기억들이 검은 날개를 뻗쳐 내 주위를 정신없이 날아다녔다. 건넌방 사장에게 지워버리고 싶은 내 모습이 투영된 순간이었다.


'네가 그만둔 회사의 사장들은 어떻게 다 너를 좋아해?'

직장을 그만둘 때마다 대체 인력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던 사장들은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아는 프리랜서가 있다면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그때마다 프리랜서였던 친구가 새로운 직원이 뽑히기 전까지 일을 해주었다. 그런 식으로 나 대신 일 한 친구는 사장들이 오며 가며 던지는 내 칭찬이 신기했는지 이렇게 물어보곤 했다. 나는 '글쎄?'라고 대답하면서도 올라가려는 어깨를 힘주어 내렸다.

나는 부족한 점이 많지만 오직 '일'에 있어서는 완벽주의자라는 말을 훈장처럼 생각하고 불도저처럼 일하는 스타일이었다. 일을 한번 시작하면 휴식이란 없고 성과에 쉽게 만족하지도 않았다. 스스로를 참을성 없이 닦달하고 몰아붙이길 잘했으니, 짠 연봉으로도 이렇게 일한 나를 사장들이 싫어할 리 없었다. 그래도 일을 잘한다는 것은 수많은 돌덩이 사이에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나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일이고, 나를 지탱할 무언가 쥐고 있다는 사실은 안정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불평 없이 밤새 일을 하는 직원이 회사에 긍정적이기까지 했으니 세상 이런 직원이 없을 거라는 것을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였다. 이런 내가 9년 전 회사를 창립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뼛 속까지 성실한 사람이 사장이 되면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말이다.


처음 회사를 설립한 사장의 마음이 다 그렇듯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방식은 집어치우고 싶었다. 무엇보다 좋은 리더,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직원들이 나처럼 일해주었을 때의 얘기라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20년 경력의 노련함을 이제 막 시작한 친구에게 바라는 건 얼토당토않지만 내 입장에서만 보자면 얘기했던 것과 희한하게 전혀 다른 작업물을 내는 어떤 직원의 작업은 도통 이해하기 어려웠고, 부족하면 노력하면 될 것을 그렇지 않아 보이는 모습은 나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없으니 도로 내가 가져와 신규 같은 수정 작업이 반복되기라도 하면 나는 잠금장치를 제거한 수류탄으로 변신했다. 그럴 때마다 내 성격을 아는 공동대표들이 서둘러 다가와 잠시 나가서 바람 쐴 것을 권유했다. 그럼 억지로 걸음을 옮겨 폭발물을 속으로 삭이고 원시적 충동을 다스리고 들어오길 반복했었다.

특히 나는 시간 관리를 능률적으로 한다는 명목으로 질서 유지에 힘썼다. 그것은 다른 말로 ‘통제’였다. 반성적 고백을 하자면 내 진두지휘 하에 모든 전열이 착착 가다듬어지는 짜릿한 쾌락에 빠졌었다. 통제의 객관적 성공은 또 다른 이면에 억압되었던 독선적인 인격을 휴면 상태에서 깨어나게 한 것 같았다. 통제가 고조된 어느 날. 직원들의 기분까지 통제하려 드는 나를 발견했다. 월급을 준다는 이유로 나는 그들의 입술 끝부분이 내려가 앉아있는 걸 보지 못했다. 내 머리 위에 뾰족한 뿔이 우뚝하게 자라고 있다는 걸 나만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가졌던 헌신적이고 싶은 마음과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노력하고 싶은 마음은 통제의 과욕에 다 먹혀버렸고 그렇게 스스로를 지옥불에 빠뜨렸다. 그러면서도 얼마나 잘해줬는 데를 시전 하며 좁고 깊숙한 골짜기에 있는 것처럼 소외감에 몸서리쳤다. 그렇게 독한 자기 연민에 빠졌던 걸 보면 사람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다. 아니면 나만 그런 걸 수도 있겠다.


변한 나를 마주하고 있던 어느 날 상황 모색을 위해 직원들과 식사자리를 마련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한 사람이 티브이 프로그램을 언급했다.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프로그램이었었다. 오만한 사장의 이기적인 행동이 꼭 내 모습 같아 보기 불편했던 프로그램이다.

“사장님도 성공했으니 ‘사장님 귀는 당나귀’에 나가 보세요.”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에이, 지금도 욕 많이 먹고 있어서 굳이 거기까지 나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나의 말에 그녀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내 반응을 이해 못 하겠다는 듯 갸우뚱거리는 그녀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게 오버스러웠다. 잠들기 위해 누워서도 천장에 계속 그녀의 표정이 맴돌았다. 왜 그런 표정을 지었을까. 의미가 뭘까. 그녀와 회의를 하고 밥을 먹으면서 내내 눈치를 살폈다. 티끌만 한 단서라도 나오길 기대했지만 허사였다. 그러다 표정의 의미를 알게 된 건 우연히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 문제의 '그' 프로그램에서 멈춰 섰을 때다. 패널들과 시청자를 기겁하게 만드는 휘황찬란한 갑질을 하면서도 뭐가 잘못됐는지 끝내 알지 못하고 희죽거리는 사장들. 보고 있자니 온몸에 닭살이 돋아날때즘 뇌리에 이런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너의 모습을 네가 객관적으로 한번 확인해봐!’ ‘네가 얼마나 갑질을 하고 있는지 평가받아봐.’ 그녀의 생각이 조용히 들려왔다. 더 나아가 그녀의 갸우뚱에도 의미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너도 네가 욕 많이 먹는지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도 그래?’

그녀의 쨍쨍한 목소리가 내 귓전에 울렸다. 내 과장된 상상이 맞다면 그녀 입장에서는 통쾌하게, 내 입장에서는 보기 좋게 한 방 먹은 셈이었다. 그 후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한방, 두방에 나는 방어할 힘을 잃었다. 공상이 망상이 되어갈때즘엔 모든 관계가 엉망이 되어버렸고 나는 얼이 빠진 채 직원들보다 먼저 회사에서 탈출했다. 이제는 방관자가 되어 모든 상황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 하지만 '정도를 앎'과 '이치에 맞게 행동함'에는 괴리가 커서 과거를 씻어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사장이 된다고 해도 괜찮은 사장 노릇은 더 이상 자신이 없다. 남을 파괴하는 말을 멈추고 싶어서, 타인의 섬뜩한 태도에 상처받는 것이 무서워 도망쳤다. '이런 내가 다시 더불어 일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도 타인과 일하며 다시 상처를 주고받다가 고통스럽게 자른 붉은 뿔이 다시 재생되어 튀어나오는 나를 상상하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을 선택하게 된다. 결국 지금으로서는 외로움을 빙자한 안정감을 느끼며 혼자 앉아 글을 쓰는 것이 제일 안전한 것 같다.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제정신을 잃었던 나를 만나게 해 준 건넌방 사장님의 속사포 같은 목소리를 뒤로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잘 나왔어. 이 시간을 즐겨.'마음의 근육을 이완시켜주는 것이 오늘의 마지막 업무였는지 방금까지 하얀빛이었던 태양이 익숙한 듯 감미로운 붉은 황금빛 색조로 바뀌며 따뜻하게 비춰주었다. 나와 같이 이른 퇴근을 준비하며 뉘엿뉘엿 지고 있는 해를 향해 서있다가 '나도 해 지기 전 퇴근이 곧 익숙해지겠지'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지하철로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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