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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대혁 Sep 30. 2021

미래가 불안한 자, 자아의 목을 베어라

영화 <그린 나이트>가 말하는 자아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법

(스포일러 가득)

원탁의 기사 무리에 들 조건은 단 하나. 썰을 가지고 있느냐였다. 아서 세대의 무용담이 전설로 굳어진 어느 크리스마스 저녁, 카멜롯을 찾아온 그린 나이트의 내기에 주인공인 가웨인이 선뜻 응했던 것도 그 '썰'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내기의 내용은 간단하다. 가웨인이 그린 나이트에 선빵을 때리면, 정확히 1년 뒤 그린 나이트가 똑같이 갚아주는 것. 그린 나이트는 뜻밖에 순순히 목을 빼고, 오호 호재라! 선빵의 베네핏을 확실하게 누리려는 가웨인은 엑스칼리버로 그린 나이트의 목을 댕강! 이로서 1년 뒤의 채무 변제까지 노린다. 진정한 썰과 악몽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희희낙락하는 가웨인 앞에 그린 나이트는 자기 머리를 양손으로 받치고 1년 후를 기약하며 자리를 뜬다.


1년 사이 가웨인의 썰은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괴수의 머리를 자른 영웅은 정확히 1년 뒤 괴수에게 머리가 잘린다는 이야기. 이 썰을 전설로 만들기 위해서 가웨인은 그린 나이트를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의 기묘한 고행이 이어진다.


이야기는 진화의 산물이라고 한다.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미래를 시뮬레이션한다. 마크 R. 리어리가 쓴 '나는 왜 내가 힘들까'를 보면 인간의 비대해진 자아는 일종의 아바타와 같은 '아날로그 자아'를 만들어 미래를 예측하고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데 이용한다고 한다. 그로 인해 인류가 이토록 부실한 육체를 가지고 번성할 수 있었지만, 또 다른 부작용인 '자아의 저주'-스스로를 평가하고, 현실과 어긋난 정체성과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집착하느라 피폐해지는-에 사로잡혔다고, 책은 얘기한다.


나는 기사여야 해! 가웨인이 여행길에서 위장한 강도를 만났을 때 가웨인은 자신을 '기사'라 부르는 강도의 호칭을 수정하지 않는다. 그는 지금 기사가 아니지만, 기사가 되기 위한 길을 가고 있기에. 성주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당신은 기사가 아니다'라는 모욕을 들었을 때도 그는 여정을 포기하지 못한다. 설혹 기사가 되는 것과 동시에 목이 떨어져 나가는 이율배반의 상황에 놓인다고 하더라도. 자아의 저주가 낳은 딜레마에서 가웨인은 허우적거린다.


그린 나이트 앞에 목을 빼놓고 엎드린 가웨인은 결국 도망쳐 카멜롯으로 돌아간다. 이때부터 가웨인 앞에는 그린 나이트가 약속한 재물과 명예가 펼쳐진다. 그가 실제로 그린 나이트의 내기에 정당하게 응했는지, 도망쳤는지 여부는 상관이 없다. 우리네 '자아'가 현실 속의 '나'와 늘 차이가 나듯이.


가웨인은 아서의 왕좌를 물려받고, 사랑하는 여인 대신 왕족과 결혼을 하고, 전쟁에서 아들을 잃고, 백성들에게 돌팔매를 맞고, 적들에게 목이 잘린다. 이쯤 되면 빠르게 진행되는 몽타주에서 눈치채게 되듯이 이는 모두 가웨인의 상상이다. 그린 나이트의 도끼에 뒷걸음질을 치던 가웨인은 자신의 미래를 시뮬레이션한 뒤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인다.


영화 '그린 나이트'는 아이러니하다. 자아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도 자아였다는 것도 아이러니하지만, 전설이 시작된 시점에 자아의 목을 베 이야기의 종언을 고한다는 것도 그렇다. 이렇게 영화는 중세의 설화가 현대의 관객과 만날 접점을 만든다. 그리고 자신의 자아와 현실의 내가 빚어내는 간극으로 괴로워하는 이들과 공감대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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