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첼 카슨의 <바닷바람을 맞으며>를 읽고
저자는 이 지식들을 어떻게 얻었을까? 책을 읽으면서 가장 궁금했다. 지금이야 수중 카메라에 탐사 장비들도 좋다지만 20세기 초반에 어떻게 이런 생생한 이야기를 구성할 만큼의 정보들을 알아낼 수 있었을까?
서문에 보면 작가가 스킨스쿠버를 배웠다는 얘기도 있지만 그건 이 책을 집필한 뒤의 이야기이다. 저자는 모든 것을 저자가 다 알 수는 없었고, 당연하게도 많은 저작의 힘을 빌렸다고 얘기하는데, 마치 TV의 동물 다큐를 보는 것 같은 묘사에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듯 싶다.
맞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마치 ‘동물의 왕국'을 보는 것 같다. 그것도 오랜 시간 공들여 찍고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적절한 컷들을 엄선해 편집해 놓은. 저자는 의인화를 최소화하려 했다고 변명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 책이 인간의 감정으로 유일하게 이입하고 있는 ‘두려움'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동물의 본성이다.
의인화된 동물의 감정이 거슬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두려움이라는 스위치의 온, 오프로 세상을 표현하는 흑백의 점묘화를 보는 듯 싶다. 그래 살고자 하는 마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이 거대한 자연을 움직이는 동력이지. 어린 치어가 알에서 깨어나 누군가의 먹잇감에서 용케 벗어났다가 다른 생물을 먹고자 하는 식욕에 눈을 뜨는 장면에 이르면, 추천사에서 ‘인간의 척도를 버린다'는 구절이 무엇인지 이해가 된다.
오직 입의 크기가 유일한 척도인 세계다. 내가 먹을 수 있느냐, 나를 먹을 수 있느냐. 이 척도로 우위가 정해지는 세상. 단조로운 2비트의 세계는 무한한 반복을 통해 다채로운 스펙타클을 만들어 낸다.
주인공으로 설정한 생물들이 매 장에서 먹힐 위험에 빠졌다가 벗어나는 것이 식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우리가 즐겨보는 영화에서처럼 약자의 저항과 연대로 빌런을 해치우는 일은 자연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매번 작가가 주인공 치어를 살리는 방법은 포식자의 포식자를 등장시키는 방식이었고, 그건 너무나 선명하게 ‘우연'의 힘에 기댄 결과였다.
자연의 생물에게 있어 그들의 기억과 이야기가 전해질 수 있는 것은 그가 ‘우연의 은혜'로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득 자연만 그럴까, 싶기도 하다. 우리 인간들이 자랑스러워 하는 모든 의지의 승리들은 그에 걸맞은 영광을 누리고 있는 걸까?
재작년인가? 인간 세계에 섞여 사는 트롤을 소재로 한 ‘경계선'에서 새로운 감각에 대한 상상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 책 또한 물고기의 관점에서 보는, 물고기의 감각에서 그려지는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옆구리 측선으로 만져지는 바다와 그 바다의 기억이란 건 대체 어떤 느낌일까?
저자인 레이첼 카슨이 어떤 자료를 보고 인용을 했든 이 새로운 감각에 대한 상상은 바다 속 세계에 대한 경외가 없이는 이뤄낼 수 없었을 게다.
초반에 읽으면서 그래픽 레코딩으로 정리하기에 너무 어려운 책이다 싶었는데, 읽고나니 이런 책이야 말로 그림을 그려가면서 여럿이 함께 읽으면 좋은 책일 듯 싶다. 어쩌면 이미 누군가가 이 책을 애니메이션이나 자연 다큐로 옮겨놓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 레이첼 카슨의 책 <바닷바람을 맞으며>를 읽고 그린 그림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북토크x그레픽레코딩' 4강이 오는 4월 15일(금) 저녁 7시에 삼양청년회관에서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