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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대혁 Mar 14. 2022

나를 설명하는 말도 연습이 필요하다

록산 게이의 <헝거>를 읽고 

요즘 '납작하다'는 말을 많이 쓰던데, 내가 MBTI를 신뢰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이유도 비슷하다. MBTI 네 가지 척도엔 양 극단만 있을 뿐 중간 지점이 없다. E와 I가 49대 51로 섞여있는 사람을 그리기에는 너무 해상도가 떨어진다. 실제 혈관에 피가 흐르는 사람들 사이엔 그 49의 스위치가 눌려서 벌어지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가? 


록산 게이가 자신에 대해, 자기 과거에 대해 설명할 때 취하는 자세도 이런 회의를 깔고 있는 듯하다. 260kg이 넘게 만든 그의 허기는 열두 살 때 당한 성폭력의 트라우마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저자는 그 쉬운 서사에 의존하지 않으려 한다. 그의 몸을 이렇게 만든 것은 결국 그 자신임을 인정한다. 


'성폭력 생존자'라는, 피해자를 배려한 이 단어도 그는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생존자'라는 말이 품은 '고통의 완료'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제대로 설명할 말이 없다면 차라리 '피해자'라는 말을 쓰고자 한다. 


페미니스트로서 '뚱뚱한 몸'에 대한 사회의 잣대를 거부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지만, 실제 그 몸의 고통을 겪고 있는 처지에서 '아닌 척' 할 수는 없다. 자신의 몸을 긍정하고 싶지만, 그 몸을 벗어나고 싶은, 실제로 벗어나기 위해서 다양한 다이어트를 기웃거렸던 것도 부인하지 않는다. 


오두막에서 집단 성폭력을 당한 일을 제대로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해 가슴 속에 묻어둬야 했던 열두 살 소녀를 위로하는 일은, 곧 지금 그가 처한 몸과 여기에 이른 과정을 '진실'되게 서술하는 일이다. 그것은 곧 인생이 나아갈 지도를 그리는 일과 같다. 당연히 그가 고른 말들은 긍정과 부정을 오가고, 이진수로 쓰인 것 같은 글들은 차곡차곡 쌓이면서 그녀 자신을 그려낸다. 


활자화된 글은, 작가가 얼마나 망설이며 고르고 고른 단어와 문장인지,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가 속에 앙금처럼 가라앉은 기억들, 상처들 그로인해 왜곡되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상상들까지 박박 긁어내는 것을 보면, 얼마나 치열하게 자신을 설명할 단어를 찾아 헤매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책의 끝무렵 자신을 성폭행한 '그때 그 아이'를 상상하는 대목에서는 생각의 자궁이 있다면 그 자궁마저 드러내려는 것 같은 안간힘, 처절함이 느껴진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 정결 의식을 치르고 있는지도. 


그가 스스로 무가치하다 여겨, 자신을 내팽겨쳤던 것은 어쩌면 그가 당한 일과 그 이후 그가 흘러온 삶의 경로를 설명할 말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책의 말미에도 그 언어는 쉽게 포착되지 못하고, 다만 상처를 헤집듯이 고르고 고르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저자만 남는다. 


우연인지, 어제 아내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물었다. 선뜻 답하지 못했는데 나도 나를 설명할 말들을 찬찬히 골라야 할까보다. 저자가 궁금해 인터넷을 뒤지니, 한 2년 전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약혼을 했다는 기사를 봤다. 다행이다. 



록산 게이의 <헝거>는 3월 18일 북토크x그래픽레코딩 시간에 또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 많이 참여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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