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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대혁 Mar 06. 2022

미움이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믿음 대로 될지어다

영화 <별장에서 생긴 일 The Lodge>를 보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온다'라고 썼던 시인은 인생의 한면만 보기로 했던 모양이다. 구원이든 불행이든 원래 모든 인생사가 늘 갑작스럽다. 미아의 엄마 로라의 죽음처럼. 마치 <싸이코>의 주인공인양, 알리시아 실버스톤이 연기한 로라는 그야말로 느닷없이 자살을 감행한다. 엄마의 죽음은 아이들에게 싱크홀처럼 커다란 트라우마를 남기고, 영화는 트라우마에 빠져 추락하다 결국 파국을 맞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엄마를 잃은 미아와 에이든의 증오는 자연스럽게 아빠의 연인 그레이스에게로 향한다. 그레이스는 이 영화를 구성하는 또 다른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광신도의 교주였고, 그레이스는 집단 자살(이라고 쓰고 ‘학살'이라 읽어야겠지만)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다.


생존자는 종종 공모자로 의심받곤 한다. 에이든은 그레이스를 ‘사이코패스'라 하고, 이런 낙인을 뒷받침하는 기사와 기록들은 지워지지 않고 인터넷을 떠돌고 있다. 이런 세간의 낙인을 표현한 것일까? 그레이스는 아이들과 별장으로 향하는 차에 오르기 전까지 줄곧 흐린 유리에 번진 실루엣이나 뒷모습으로만 표현된다.


(c) The Lodge 왓차플레이에서 갈무리


아이들과 새엄마를 친하게 만들려는 아빠 리처드의 무리한 기획은 매 순간 긴장과 공포를 가져온다. 환경의 변화에 처한 주인공과 낯선 이와의 만남은 공포 영화의 밑간으로 자주 쓰이는 요소이지만, 이 영화가 이전 공포 영화에서 진일보하는 지점은 ‘낯섬이 불러오는 공포'를 일상의 소소한 순간으로 끌어내려온다는 점이다.

이 듀오 감독의 전작인 ‘굿 나인 마미'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이 ‘엄마가 자는 척하다 과자를 먹는’ 순간이었던 것처럼 새엄마가 아빠와 히히덕거리는 장면은, 그리고 그걸 들으며 귀를 막는 아이들의 모습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들을 일거에 만든다.


영화가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가장 큰 동력은 일종의 편견이다. 학살의 생존자가 웃고, 섹스하고, 누군가의 엄마가 되려는 것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는 것은 피해자가 ‘피해자 다움'을 보이지 않으면 그 역시 ‘공모자' 혹은 ‘주모자'일지 모른다는 편견이 깔려 있다.


(c) The Lodge 왓차플레이에서 갈무리


아빠 리처드가 일 때문에 별장을 떠나고 별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그레이스의 트라우마 탓으로 관객에게 인식된다. 영화 초반에 그레이스를 외면하던 카메라가 그레이스의 내면과 꿈으로 들어가면서 더욱 이런 혐의를 짙게 만든다. 상처입은 사람들은 열악한 환경에 처하면 다시 상처가 불거질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이런 편견에 착착 들어맞는 상황들이 펼쳐지고 그레이스는 관객의 바람처럼 정해진 종착지에 도착하게 된다.


‘굿 나잇 마미'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실은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지만)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어놓고 그 상황 속에서 파국을 맞는 인간들을 펼쳐보이면서 감독은 하려는 얘기가 뭐였을까?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처럼 이 영화는 일상을 채우는 갖은 감정들이 어떻게 크고 작은 가시가 되어 살을 찌르는지를 시뮬레이션 하는 듯 하다.


(c) The Lodge 왓차플레이에서 갈무리


‘증오'에서 이미 본 연출이지만 마치 영화의 챕터를 나누듯이 미니어쳐가 보이는 것도, 그 미니어쳐를 통해 누군가 음모를 시뮬레이션 했던 것처럼, 감독도 이런 감정의 육화를 시뮬레이션 하는 것에 천착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지. 영화란 짐짓 그런 것이기 마련이라지만, 이 감독들이 펼치는 ‘물화된 감정'은 그 어느 공포 영화보다 깊게 파고든다. 사소한 증오가 사람을 죽일 수 있을지 궁금하다면 이 영화를 보시라. ‘믿음 대로 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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