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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크M May 06. 2020

어느 밀레니얼의 줄임말 공부 분투기

‘아재’가 되기 싫어 줄임말 공부를 시작하다.






 “차장님, 차장님은 ‘자만추’ 예요, ‘인만추’ 예요?”

 넉넉하지 않은 황금 같은 직장인의 점심시간, 빨리 먹고 휴식 시간을 가지려고 밥을 거의 마시다시피 먹고 있는데, 마주 앉은 후배가 정적을 깨고 질문을 던졌다.

 “네? 자만이요? 인마? 그게 무슨 말이에요?”

 후배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나는 식사를 멈추고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시는지, 인위적인 만남을 추구하시는지 여쭤본 거예요. 줄임말 모르시는구나......”

 후배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어휴, 차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아재(아저씨의 낮춤말)셨구나.’라는 생각을 감추는 일에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요즘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언어 행태 중 하나는 ‘말 줄이기’이다. 줄임말은 현세대를 대표하는 용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젊음을 대변한다. 줄임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면 ‘아재’로 둔갑하여 대화에서 소외되거나 불통의 아이콘이 되기도 하니, 줄임말을 잘 모르면 젊은 세대와 대화하기 힘들겠다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그렇게 어느 밀레니얼의 줄임말 공부가 시작됐다. 국가고시를 패스하는 일보다 더 어렵다는 젊은 세대와의 소통과 연대를 위한 분투가.





 <90년생이 온다>의 저자 임홍택은 '간단함'을 90년대 생의 특징 중 하나로 정하고, 이를 대표하는 '은어'에 대해 설명한다.


 은어의 특징은 1. 줄임말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다. 2. 신규 은어의 생성 및 쇠퇴가 빠르다. 3. 줄임말이 더 다양하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지속해서 이뤄지고 있다.
(임홍택, <90년생이 온다>, 웨일북, 2018, 75쪽)


 이처럼 다양하고 창의적인 방식을 바탕으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줄임말을 공부하는 첫 단계로 자주 사용되는 줄임말을 찾아보기로 했다. 줄임말은 젊은 세대가 주로 사용하면서 새롭게 만든 문화이기에 그 특징이 다채롭고 비일관적이어서, 특정한 카테고리로 분류하는 작업이 쉽지 않았다. 굳이 정리해본다면 상황(감정), 일상, 물건(작품), 사람, 이 네 가지로 줄임말을 분류해볼 수 있다.


 먼저 '상황(감정)' 관련 줄임말이다. 특정 상황이나 감정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되는 줄임말이기 때문에 모르면 모를수록 인싸(인사이더; 유명인, 인기인)에서 멀어진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특히 갑분싸(갑자기 분위기 싸해진다),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 혼코노(혼자 코인 노래방에 가다), 낄끼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라),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 할많하않(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자주 쓰는 줄임말이다.


 다음은 교통수단이나 인터넷 등 일상에서 자주 쓰는 줄임말이다. 대중교통을 자주 이용하는 학생들이 많이 사용하는 줄임말로 버카충(버스 카드 충전), 버정(버스 정류장)이 있다. 인터넷은 '줄임말의 장(場)'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줄임말 사용 빈도가 높은 공간이다. 스압(스크롤 압박; 긴 글), 전공(전체 공개), 강추(강력 추천), 스샷(스크린 샷) 등을 주로 쓰며, 심지어 ㄴㅁ(냉무; 내용 없음), ㅇㅈ(인정)처럼 자음으로만 글을 쓰기도 한다. 자음만으로도 말이 통하는 대단한 소통능력을 보니, 나도 모르게 혀를 내두르게 된다. 인터넷 상에서는 웬만한 단어나 문장은 다 줄여 쓴다고 생각하는 게 편할지도 모른다.


 사용 빈도는 낮지만 물건이나 작품, 사람을 지칭할 때 쓰는 줄임말도 있다. 물건이나 작품을 줄여서 지칭하는 대표적인 예로 문상(문화상품권), 보배(보조 배터리), 무도(무한도전; 예능 프로그램), 미드(미국 드라마)가 있고, 사람과 관련해서는 비담(비주얼 담당), 자낳괴(자본주의가 낳은 괴물), 나일리지(나이+마일리지; 나이를 앞세워 권력을 행사하거나 우대받기를 원하는 사람)가 대표적인 줄임말이다.






 나름의 방식으로 줄임말을 공부하고 나니 조금은 자신감이 생겼다. 이제는 실전이었다. 나도 이제 '아재'나 '꼰대'가 아닌, 젊은 감각을 가진 열린 밀레니얼 세대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마침 나를 기죽이며 줄임말 공부를 시작하게 만든 장본인인 후배가 보였다. 그 앞에서 나는 거침없이, 현란하게 줄임말을 뽐냈다.


 "대리님, 기획팀에 그 '인싸' 과장님 있잖아요. 커피는 '얼죽아'를 고집하고 아이돌 '덕질'도 하는데, 평소에 '열일'하고 센스 있게 '낄끼빠빠'도 잘하는, 그분이랑 친해요?"

 쉼 없이 줄임말을 뱉어내자 속이 후련했다. 나도 이제 젊은 감각을 가진 선배라고 생각하겠지, '아재'만은 피할 수 있을 거야, 따위의 생각으로 스스로 만족하던 순간 후배가 던진 말에 숨이 턱 막혔다.

 "아, 그 '알잘딱깔센' 과장님이요? 그렇게 친하진 않은데."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알잘? 깔센? 도무지 알아들을 수도, 대충 비슷한 단어가 떠오르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날 놀리려고 아무 말이나 막 던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네? 알잘딱, 깔세요? 그게 뭔데요?"라고 묻자, 후배는 "알아서 잘하고 딱 깔끔하고 센스 있다. 줄여서 '알잘딱깔센' 이요."라며 핀잔을 주듯 대답했다.

 "아니, 그거 대리님이 지금 만드신 거 아니에요?"

 "네? 아닌데요. 제 친구들은 다 이렇게 말하는데요?"


 패배감이 밀려왔다. 어떤 심정이었는지 적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도 '이세돌'이 '알파고'와의 바둑 대국에서 패배했을 때 느꼈을, 그 아리송한 패배감과 비슷하리라. 하긴, '말을 줄여 쓴다'는 표현마저도 '별다줄(별 것을 다 줄인다)'이라는 말로 줄여버리는 기염을 토하는 시대이니, 이 정도 패배감은 그저 개별적인 열패감(劣敗感)에 불과할 것이다. 불현듯 한 가지 물음이 떠올랐다. '이렇게 많은 줄임말을 누가 다 만들었을까?'





 줄임말의 탄생과 기원은 기이한 특징을 갖는다. 누가 최초로 줄임말을 사용했는지 찾을 수 없을뿐더러, 누군가 구태여 그 기원을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지식재산과 같은 '소프트 파워'가 중요한 시대에 작은 발명이라도 먼저 특허권이나 실용신안권 등을 취득하려고 동분서주한 반면, 줄임말과 관련해서는 그러한 경쟁 자체가 없다.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일까? 굳이 자신이 창시자임을 증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이렇게 탄생과 기원을 궁금해하는 일조차 철학과 역사 — 현실에서는 무의미해 보이는 — 를 탐구하는 일처럼 무용하다고 생각해서 일까, 라고 일갈하고 나니 못내 씁쓸해진다.


 줄임말의 또 다른 특징은 '편의성'이다. 말을 줄여 쓴다는 것은 하려는 말을 신속하게 전달하고, 그 반사적 효과로 자기 혼자만의 시간을 더 확보하겠다는 심리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그만큼 젊은 세대를 둘러싼 현실이 각박하고 퍽퍽해서 매 순간 빠르게 할 말만 하고 빠지도록 사회가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온전한 문장으로 차분하게 의견을 전달하고 싶지만, 그러는 동안에 '기회의 평등'은 시시각각 '본질적 불평등'으로 변질되어 버리고 말 것이라고 느껴지는 현실이니까.






 줄임말을 쓰는 행위를 양궁에 비유해보자. 양궁 선수가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빠르게 쏘면 그 화살은 쏜살 같이 날아간다. '줄임말'이라는 화살 또한 '빠름'을 대변한다. 화살이 바람에 따라 궤적을 달리하는 것처럼 줄임말 또한 상황에 따라 변하고 진화한다. 단, 양궁 선수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고려해서 과녁을 조준하는 반면, 줄임말을 쓰는 젊은 세대는 변동성과 영향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줄임말을 무분별하게 수용하고 사용하기 때문에 화살처럼 궤적을 추적하는 일은 요원해 보인다.

 

 CEO리더십연구소장인 김성회는 그의 저서 <센 세대, 낀 세대, 신세대 3세대 전쟁과 평화>에서 "세대 간 '다름'은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이 아니라 다양성 조화를 위한 천혜의 기회다"라고 말하며, 필터와 프레임을 달리 하면 '이상하다'가 '신기하다'로 뒤집힌다는 점을 강조했다. 줄임말을 무작정 따라 해서 '아재'를 탈피해 보려던 내 의도 자체의 오류를 깨닫는다. 줄임말을 쓸 수밖에 없는 젊은 세대의 현실과 심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우리가 집중해야 할 정확한 시도가 아닐까. 그런 노력은 우리가 '나일리지' 적립을 멈추고 젊은 세대와 '불소(불타는 소통)' 할 수 있도록 도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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