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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크M Nov 17. 2019

사인을 하려는 자와 받으려는 자

Signature(사인)이 주는 위안




 좋아하는 작가님이 삼 미터 앞에 앉아 있다. 오늘도 역시나 청초하다. 우아한 모습으로 앉아 책의 하얀 첫 페이지에 미끄러지듯 깔끔한 곡선과 직선을 그려내고 있다. 줄을 선 대부분이 휴대폰을 손에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나는 가만 폰을 주머니에 넣고 남아있는 십 분 정도의 시간을 차분하게 즐긴다. 차례가 다가온다. 이제 앞에는 두 명뿐이다. 별일 아닌 척, 무표정으로 서 있다고 생각하지만, 누가 이런 내 모습을 본다면 왜 그렇게 웃고 있냐고 할 것만 같다.

 내 차례가 왔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떨리지?’ 작가는 포스트잇에 적혀 있는 내 이름을 본다. 나를 보며 가볍게 미소 짓고 책의 첫 페이지에 내 이름을 적는다. 내 얼굴은 지금까지 참았던 엄청난 양의 미소를 뿜어 내고 만다.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한 채, 사인이 끝난 책을 들고 돌아선다. 그제야 기대감에 풍선처럼 부풀었던 몸이 다시 원래대로 쪼그라든다.



 나는, 이를테면 사인을 받으려는 자에 속한다. 사인을 받는 행위의 떨림과 울림이 좋다. 종이 위로 미끄러지는 선의 일정한 형태들이 ‘떨림’이라면, 상대가 친필로 내 이름을 적어 주는 낭만은 ‘울림’이다. 우리는 사인을 받은 책이나 물건에 ‘소장용’이라는 가치를 부여한다. 스스로 내리는 마음속 평가에서 사인이 있는 물건의 순위는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사인을 받으려는 자에게 사인은 일종의 '머묾'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누군가 내 이름을 한 번 불러 주는 행위, 그 숨결을 텍스트의 형태로 변환하여 영원히 책이나 물건 속에 머물게 하는, 그러니까 마음을 담은 기록이라는 의미를 말이다. 사인을 받는 순간은 또 어떤가. 평소에 좋아하던 누군가가 내 이름을 적어주고, 날짜를 적어 보통날을 특별한 날로 만들어 준다. 사인을 함으로써 한 토막의 시간을 공유했다는 흔적을 남겨주는 일, 어쩌면 그 아찔한 떨림이 나를 계속 ‘사인을 받으려는 자’로 남겨 놓는지도 모른다.


 사인을 하려는 자의 마음은 어떨까. 사인을 하는 사람은 인기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지만, 단순히 인기만을 위해 사인을 하지는 않는다. 사인을 하는 사람에게도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과 나누는 잠깐의 시간은 혼자서 덧대어 온 생에 단비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그 사람도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는 사인을 받으려는 자에 불과했음을 문득 돌이켜 볼 수도 있을 테니까.


 김영하 작가가 괜히 불특정 공간에서 연쇄적으로 깜짝 사인회를 한다는 뜻의 ‘연쇄싸인마’ 별명을 얻은 게 아니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초월하는 사인의 분위기를 즐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어느 북토크에서 김중혁 작가에게 사인을 받은 적이 있다. 독자의 이름을 듣자마자 이름을 거꾸로 —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거침없이 척척 써가며 사인하는 모습은 즐거움을 넘어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사인이라는 행위는 하는 사람에게도, 받는 사람에게도 안온(安穩)을 선사한다. 나는 사인의 순간이 주는 고요를 즐긴다. 하려는 자와 받으려는 자의 분위기가 교차하고 단 한 번 눈빛을 마주치는 일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명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을 말이다.


 책이나 물건을 들었다가 우연히 사인을 발견했을 때, 그 순간과 일상 사이의 확연한 온도차를 기억한다. 분명한 건, 단순히 누군가와 같이 찍은 사진을 발견하는 일보다는 훨씬 뭉클했다는 점이다. 펜을 잡은 손 끝에서 전해진 온기는 내 이름에서부터 날짜를 거쳐 사인까지 흐르고 있었다. 결국 나는 계속 사인을 받으려는 자로 남을 것이다. 사인이 주는 안온함에 흠뻑 취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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