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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크M Nov 22. 2019

엉덩이는 죄가 없다.

납작해져 버린 엉덩이들의 반격




 엉덩이들의 숨이 막혔다. 의자에 찰싹 달라붙어 숨 쉬는 방법조차 잊은 지 오래다. 그들에게도 애플힙이 될 자유가 있고, 업(up)된 모습으로 자태를 뽐낼 권리가 있다. 하지만 엉덩이에 대한 억압은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 그들은 지나치게 혹사당하고 있다. 이러다가 곧 모든 인간의 엉덩이가 납작해져 버릴 것만 같다. 평평한 발을 ‘평발’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엉덩이도 이제 ‘평덩이’라 부를까 무섭다.


 원하는 꿈을 이루고 성취하기 위해서는 오래 앉아 있어야 한다고 우리는 배웠다. ‘글은 엉덩이로 쓰는 거다’라든가, ‘공부는 엉덩이로 하는 거야’처럼 오래 앉아서 단 몇 분이라도 더 버티는 사람이 승자가 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좋은 대학교에 가기 위해서 엉덩이를 돌볼 겨를이 없다. 대학교에 가서도 취업 전쟁에 뛰어들거나 고시, 자격증을 준비하느라 엉덩이는 쉴 틈이 없다.


 요즘은 버팀의 문제가 다른 차원으로 전개된다. 원래 버티는 일은 타인의 통제로 인해 발생한 강제 상황에서 주로 행해져 왔다. 이제는 타인의 통제보다 자기가 스스로를 통제하고 억압하는 ‘자발적 통제(self-restriction)’가 진행되고 있다. 즉, 행동이나 결정을 할 때, 자신이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고 참는다. 강의나 강연에서 궁금한 점을 질문하지 ‘못’하고 듣기만 한다. 정말 ‘못’하는 게 맞을까?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지나치게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집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에서 김개미 시인은 거의 암흑에 가까운 시선으로 인간 군상의 나약함을 읊조린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 괜찮습니다 늘 있는 일입니다 / 잠시 죽었다가 깨어나면 그 뿐 / 나는 피를 흘릴 줄 모릅니다 / 아파할 줄 모릅니다   <해맑은 웅덩이>중에서

당신이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나는 구겨진 종이처럼 쓸모없었다. 침대 모서리에 매미처럼 붙어 불안한 잠을 연명했다. / 나의 역할은 눈코입이 없는 구슬. 차이고 밟혀도 명랑하게 굴러다니는 것. 나에게는 깨지는 것도 금가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잔인한 동거>중에서


 언제부터 우리가 바늘에 찔려도 피 한 방울 흘릴 줄 모르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일까. 왜 깨지는 것도, 금 가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 구슬처럼 이리저리 굴러 다니고만 있어야 하는가. 물론 능력에 따라 충분히 대우받지 못하는 사회의 탓도 있겠지만, 탓만 하다가는 차이고 밟혀도 명랑하게 굴러 다녀야 하는 구슬과 다를 바 없어진다.


 상처가 나면 아프다고, 상황이 가혹하면 힘들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절대적 권력자인 ‘빅브라더’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가 자신에게만 작동하는 가상의 ‘빅브라더’를 만들어 스스로 구속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처럼 도시를 떠나 호수로 갈 자유, <호밀밭의 파수꾼>의 16세 소년 ‘홀든 콜필드’처럼 시대와 배경을 떠나 자유분방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배경과 상황을 떠나 적어도 스스로에게는 가난하지 않게 살기를 희망한다. 경제적 가난은 벗어날 수 있지만, 심리적 가난은 헤어 나오기 어렵다. 나는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부유한 마음을 품으려 노력한다. 책에 의지하기도 하고 사람에 기대 보기도 하지만 언제나 중심에는 자유의지를 놓아두려 한다. 삶은 살아 ‘지는’ 게 아니라 살아 ‘가는’ 것이니까. 내가 나의 주인이 될 때, 오래 앉아 있어도 엉덩이는 가벼워진다. 엉덩이가 숨을 쉰다. 납작해진 엉덩이의 반격은 그렇게 시작된다.



 소설가 김중혁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설은 엉덩이로 쓴다는 표현이 있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빈 화면이나 원고지 앞에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해서 글은 절대 써지지 않거든요. 오히려 가만히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하세요. 운동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고 지우고 다시 정렬하고 버리고를 반복하다 보면 ‘이런 글을 써야겠다’하고 생각이 정리되는 순간이 옵니다. 바로 그때 책상에 앉으면 됩니다. 글이 아주 잘 써질 거예요. 절대 책상에 무작정 오래 앉아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버팀이 능사는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버텨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목적이 명확한 버팀이 필요하다. 우리의 엉덩이는 죄가 없다. 주어진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인생의 주인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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