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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크M Oct 07. 2020

애매한 포지션과 모호한 경계

나는 취미와 특기가 헷갈린다, 아직도.




 초등학교 시절, 가장 어려운 숙제는 취미와 특기가 무엇인지 적어내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취미와 특기가 무엇인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고민이 깊어지던 어느 순간, 나는 더욱 원초적인 것을 탐하게 됐다. 취미와 특기란 무엇인가. 어린 나에게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와 같은 나름의 진리를 구해보겠다는 기염을 토해낸 것인데, 답을 쉽게 구하는 일이 가능할 리 없었다. 치기 어린 맹랑함은 금세 사그라들고 결국은 부모님이 알려준 대로 적어내는 사태에 이르러서야 꼬마 철학자의 진리 찾기 놀이는 강제로 종료되었다.


 취미와 특기의 정의는 비단 어린 시절만의 문제는 아니다. 어른이 되어 생각해보아도 어디까지가 취미이고 어느 수준부터 특기라 할 수 있을지 명확한 구분이 어렵다. 말콤 글래드웰이 말한 대로 1만 시간 이상 어떤 분야에 몰두하면 그것을 내 특기라고 칭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연마했지만 좋아하기는커녕 어쩔 수 없이 터득한 기술이라면, 그 기술을 특기라고 할 수 있겠는가. ‘좋아함’과 ‘특기’는 상관관계가 전혀 없는 걸까?


 이쯤에서 내 취미를 생각해 본다. 단언컨대, 내 취미는 독서이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나는 책 읽는 것이 취미라고 말한다. 그럴 때마다 상대방은 대부분 미묘하게 한쪽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콧방귀를 뀐다. “훗, 독서? 그래, 그럴 수 있지. 자, 이제 진짜 취미를 말해봐.”와 같은 반응이 부지기수. 어렸을 때는 같은 반 친구들 중, 절반 이상이 독서를 취미라고 했고, 그렇게 표준화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그들은 책 좀 읽으라며 핀잔을 받거나 학생의 취미는 독서여야 한다는 관습적인 강요를 당했기 때문에, 누군가가 독서를 취미라고 말하면 냉담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그렇다면 어른이 된 지금, 책을 어느 정도 읽어야 자신의 취미는 독서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한 달에 평균 20권 정도의 책을 읽는데, 이 정도면 독서는 취미일까, 특기일까? 어떤 사람은 한 달에 딱 1권을 읽는데, 그 책이 1,408쪽에 달하는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의 심리학 저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나, ‘톨스토이(Leo Tolstoy)’의 <안나 카레니나> — 민음사 합본 기준으로 무려 1,568쪽이다. — 라고 생각해보자. ‘당신이 하는 독서는 그저 취미에 불과합니다.’라고 그에게 말할 수 있을까. 독서가 아닌 운동을 예로 들어보자. 단 한 번 하프마라톤을 완주한 기록이 있는 사람과, 비록 하프마라톤 대회에 출전하지는 않았지만 매일 꾸준히 마라톤을 연습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이 둘 중 마라톤이 취미인 사람은 누구이고, 특기인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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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와 또 다른 하나를 구분하는 일은 경계의 문제로 귀결된다. 경계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이 어떠한 기준에 의하여 분간되는 한계’를 말하는데, 사회 대부분의 영역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취미와 특기의 구분뿐만 아니라 정치적 견해 차이, 빈부의 가름, 젊음과 늙음의 구별, 호오(好惡)의 판단 등에서 두루 문제시된다. 그뿐인가. 경계의 문제는 인간 사회의 영역이 아닌 자연의 영역에도 존재하는데, 낮과 밤의 구분, 계절의 변화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문제는 경계가 명확하지 않을 때가 많다는 점인데, 모호하고 불분명한 기준으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특히 인간의 감정이 관여하는 상황에서 모호한 경계 문제는 두드러진다. 형법에는 ‘미필적 고의’라는 개념이 있는데, 어떤 행위로 범죄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면서도 그 행위를 행하는 심리 상태를 말한다. 쉽게 말해서 상대방이 해를 입을 수 있음을 알면서도 어떤 행위를 하는 경우, 즉 상대방이 죽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심하게 때리는 행위 등을 일컫는다. 가해자에게 미필적 고의가 있었는지 여부를 판단해야 할 때 모호한 경계의 문제가 등장한다. 특별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생각과 감정의 문제만으로 미필적 고의라는 기준을 충족했는지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그 기준은 더욱 모호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인 견해가 반영된 개인의 이데올로기에서 모호한 경계 문제는 확연히 드러난다. 우파와 좌파, 그리고 중도파를 상정했을 때 이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긴급재난지원금과 같은 공공복지는 찬성하면서도 부유한 사람들에게 세율을 높이는 이른바 ‘부자세’ 신설에는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정치적 포지션은 우파인가, 좌파인가? 아니면 그저 모순된 견해를 가진 아둔한 정치적 부랑자에 불과하다고 일갈해야 하는가. 이처럼 인간의 감정 또는 신념과 관계된 사회의 영역은 그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에 경계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한 경우도 발생한다.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상황에서, 모호한 경계를 자신의 힘으로 분명하게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감정과 견해를 표출해야 할까. 모호한 기준을 적확하게 구분하려는 노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전에 자신의 포지션을 확고하게 설정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영국의 비평가이자 소설가인 ‘존 버거(John Berger)’는 우리는 하루하루를 측정할 수 없는 것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열화당, <A가 X에게>, 2019, 176쪽). 측정 자체가 곤란하다면, 측정이 불가능한 것을 측정하려는 시도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견해를 명확하게 하려는 시도가 더욱 현명하다. 인간은 대체로 이익을 좇아 언제든 변경 가능한 포지션에 서 있으려고 하는데, 그런 이기(利己)를 조금 줄여보자는 말이다.


 애매한 포지션은 우유부단함이나 갈팡질팡이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로 만연한 데다가 제너럴리스트라는 근사한 용어로 포장되기도 한다. 자연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파타고니아’와 고객 최우선 경영을 하는 ‘아마존’처럼 자기만의 확고한 사업 철학도 없이 남들이 하니까 따라서 치킨집 운영하거나, 여행 에세이가 유행하니까 명확한 목적도 없이 퇴사를 하고 여행을 떠나는 일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심지어 현시대에 만연해 있는 차별과 혐오의 문제 또한 애매한 포지션에 기인하기도 한다.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인식조차 불분명한 채로 불가해한 구분과 편 가르기에 익숙해지고 차별과 혐오에 나도 모르게 동조하게 되는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미지 출처. Pixabay



 애매한 포지션을 극복하고 확고한 위치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목적을 분명하게 설정하고 주변의 방해에도 흔들리지 말고 행동해야 한다. 타자의 강요에 이끌리듯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설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대나무는 생장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굳센 바람에도 적응하며 자라나고, 길고양이는 숱하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핥음으로써 자신을 가꾼다. 우리도 취미와 특기의 구분에 천착하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일과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분명히 인지하고 꾸준히 정진하는 것이 좋다. 상대방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 맹렬히 비판하거나 선을 긋는 행위보다는, 창의적이고 포괄적인 대안을 찾기 위해 공부하고 합의를 위한 실천에 동참하는 것이 낫다.


 분명한 목적의식과 확고한 철학은 모호한 경계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 <동물농장>, <1984> 등으로 유명한 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모더니즘의 틈바구니에서도 전통적 리얼리즘과 저널리즘의 원칙을 무기로 르포르타주와 순수 문학의 경계를 무색하게 했다.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두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환상적 사실주의를 원칙으로 한 문학에 집중하면서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미술 분야에서도 경계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 화가가 있다. 관찰력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미술뿐만 아니라 물리학, 해부학, 철학에 이어 작곡까지, 다방면에 걸쳐 천재성을 입증한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가 그 주인공이다. 이 시기의 미술가들은 모호한 경계로 인해 강요된 화풍으로 그려낼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았는데, 다빈치는 천재적인 능력과 노력으로 이를 극복했다. 그는 진정한 창의성은 관찰력과 상상력의 결합, 그에 따른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 무너뜨리기를 포함한다고 하며 경계 자체에 종속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표면의 경계를 구성하는 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 두께를 가지고 있다. 화가여, 그러므로 물체의 윤곽을 선으로 에워싸지 말라. (월터 아이작슨, <레오나르도 다빈치>, 신봉아譯, 아르테, 2019, 347쪽)






 모호한 기준으로 한 사람의 일생 자체가 흔들리거나 심지어 속박까지 당했던 날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보았을 불편한 시간이다. 사회 문제나 강요의 근본적 원인인 모호한 경계를 칼로 무 베듯 분명하게 나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명확한 경계 설정이 불가능하다면 자신의 포지션을 정확하게 설정하려는 노력으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취미인지 특기인지 구분하기보다는 좋아하는 일에 꾸준히 몰입하고, 사회의 물리적 현상들을 탓할 시간에 자기만의 지속 가능한 매력을 스케일업(Scale-up) 해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포지션은 명확해지고 모호한 경계 자체는 무의미해질 것이다. 강요당한 대로 살거나 한탄만 하면서 당신이 가진 장점과 꿈틀거리는 매력을 소진해버리기에는 생의 잔여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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