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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크M Nov 24. 2019

어제도, 오늘도, 온통 보통의 하루

매일이 보통이라는 생각에 대하여




 일상은 대체로 특별한 일 없이 반복된다.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직장 상사가 갑자기 해외로 발령 난다거나, 내가 SNS에 쓴 글이 인기를 얻어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는, 그런 일은 꿈에서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 하루가 저물어도 내일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가 생기지 않는 게 당연하다. 똑같은 영상을 반복 재생하면 아무리 재미있는 영상도 지겨워지듯이, 출근길에 펼쳐지는 매일 똑같은 풍경을 이제는 더 이상 쳐다보지 않는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로 가득하고 운전을 할 때면 좁은 도로는 언제나 꽉 막혀 있다.


 이런 일상이 하루 종일 앉아서 벽만 쳐다보는 독방 죄수의 삶과 별 다를 바 없다는 다소 과장된 생각이 들었을 즈음, 영화가 한 편 떠올랐다. 바로 1993년에 개봉한 미국 영화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이다. 기상캐스터인 ‘필 코너스’는 어느 날 갑자기 신기한 일을 겪는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것이다. 그 전날 어떤 일이 있었든, 다음 날 눈을 뜨면 모든 세상이 원상태로 돌아와 있는 환상. 영화 속 주인공의 모습이 26여 년이 지난 현재의 우리 모습과도 참 많이 닮았다, 생각하니 마음이 씁쓸해진다.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


 매일 지나던 출근길을 주말에 혼자 걸어봤다. 모든 건물들은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스산한 날씨에 바람은 굳건히 서 있는 건물들 사이로 내달렸고, 나는 '불어감'이라는 자연현상에 내 몸을 온전히 맡겼다. 바람에 섞여 걷다 보면 보통날과는 다른 특별한 하루가 만들어질 거라 믿었다. 착각이었다. 매일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버스만 타지 않았을 뿐, 어제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다시 그저 그런, 보통의 하루였다.


 기분 전환도 할 겸, 처음 갔을 때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던 카페를 다시 찾아가 보기로 했다. 분명 그 근방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에 얼핏 스치듯 몇 번 봤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기억하는 그 자리에는 새로 생긴 듯한 술집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 검색해 보니 내가 찾던 카페는 며칠 전에 없어졌다고 한다.



 '아, 없어졌구나'라는 짧은 탄식은 '내 관심의 바깥에 있는 세계는 부지런히 변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한 자리를 지키던 카페가 술집으로 바뀌었는데, 달라진 걸 눈치채지 못하다니.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순간이 쌓여 '보통'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버린 것이다. 일상의 변화조차 감지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내 안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감정의 변화와 동요를 감지하지 못하고 흘려버리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괜찮아. 지나갈 거라 여기며 덮어둔 지난 날들. 쌓여가다 보니 익숙해져 버린, 쉽게 돌이킬 수 없는 날. 그 시작을 잊은 채로 자꾸 멀어지다 보니 말할 수 없게 됐나 봐. 오늘도 아무 일 없는 듯, 보통의 하루가 지나가.


 정승환의 노래 <보통의 하루> 가사다. 이 노래를 듣다가 문득 어쩌면 우리가 쉬이 흘려버린 오늘은 보통의 하루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의 시작은 어디일까? 얼마나 익숙해져야 보통이라 부를 수 있을까? 보통은 오랜 반복의 산물이다. 경험은 각자가 정한 어느 시점을 통과하면서 익숙함이 되고, ‘보통’이라는 자격을 획득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작위(不作爲),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보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보통의 상태는 오히려 강력한 작위(作爲), 그러니까 적극적인 태도가 있어야 생긴다. 즉, 마음의 변화무쌍한 성격을 억압하고, 시시각각 튀어 나가려는 내면의 고통을 묵인하고 짓누를 때 보통이 된다는 말이다. 나를 둘러싼 환경과 감정은 사실 시시각각 변하고 있지만,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억누르기 때문에 보통이 아닌 것도 보통으로 보였던 게 아닐까.


 사소한 변화 하나만으로도 보통의 지위는 쉽게 깨질 수 있다. 우리는 그 작은 변화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애써 부정하고 덮어 둬 버린다. 이런 상태를 보통이라 불러서는 안 된다. 아무리 작은 변화라도 그것은 일상을 특별함으로 바꿀 자격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변화를 특별하다고 인정하는 순간 보통은 간단하게 부서진다. 마치 ‘보통’이라는 개념에 관성이라도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 상태를 깨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발버둥 쳐 왔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보통은 결국 마음의 문제다. 내가 매일 지나가는 길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했던 것처럼 보통은 습관이 된다. 매일의 억눌림이 쌓여 '보통'이라는 명사를 만들어 가듯, 내 생각과 감정 또한 일정한 힘으로 억누르는 습관에 의해 보통으로 남게 된다. 하루하루를 매번 똑같은 보통의 하루로 남겨놓을 것인지, 특별한 하루를 만들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다. 타인이 대신할 수 없고 타인에게 맡겨서도 안 된다.

 매일을 특별하고 소중하게 살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단지 스스로 만든 보통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최소한의 노력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노력의 중심에는 일상에 대한 예리한(sensitive) 관찰과 관심이 있어야 한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에서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던 기상캐스터는 결국 반복된 일상을 깨고 보통의 하루에서 벗어난다. 자신의 사소한 행동 변화에 따라 바뀌는 순간들을 보면서, 주위의 사소한 사건들을 진심으로 대할 때 ‘보통’이 ‘특별함’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반복되던 하루가 깨지고 드디어 돌아온 새로운 내일에 눈을 떴을 때, 그토록 원했던 여인이 내 옆에 있다는 행복한 결말은 덤이다. 작은 변화도 흘려보내지 않고 소중한 차이로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가 빠져 있는 ‘보통의 블랙홀’은 깨어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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