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과 ‘고독’의 상관관계(相關關係)
"구독과 좋아요는 필수입니다."
옷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몸에 더 가까이 달라붙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요즘, 누구나 흔하게 만나게 되는 문장이다. 대중의 관심을 바라고 자신의 인기를 증명하려는 ‘인정 욕구’는 어느 역사에서나 존재해왔다.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자체를 잘못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다만 구독자 수로 그 사람의 가치를 환산하고, 허상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숫자로 인간됨을 입증받으려 하는 세태가 안타까운 것도 인정할밖에. 이렇게 생각하는 나조차도 하릴없이 구독이나 팔로우, 좋아요 따위의 숫자놀음에 연연하며 이 매체에 글을 끼적이고 있으니, 문제가 심각하다. 문득 내 글을, 심지어 글을 초월해 ‘나’를 지켜보는 자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에 손가락 마디마디가 저려온다.
스스로 만든 '반대형 파놉티콘(Reverse Panopticon)'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겠다. 여러 명의 죄수를 관리 감독하는 한 명의 감시자 배치(파놉티콘)가 아닌, 여러 명의 감시자가 한 명의 죄수를 관리하는 감옥. 여기서 죄수는 '나'이고, '구독자'는 감시자가 된다. 감시자가 많을수록 나의 자유는 고갈된다. 지시하고 엿보는 사람이 많을수록 나의 일상은 가식으로 대체된다. 그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 않아 더 화려하고 쿨해 보이는 사진이나 글을 게시한다. 마치 꼭 그래야만 한다고 강요당한 것처럼. 나아가 심연으로 침잠하려는 순간에도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이런 상태의 침잠도 진정한 의미의 고독이라 할 수 있을까? 구독자들은 나의 고독을 허락하는가? 그들이 허락하지 않는 한 나에게는 고독할 권리조차 부여되지 않는 것일까?
작은 수영장 속에 한 사람이 잠겨 있다. 그 위로 정오가 조금 넘은 시각의 태양이 작열하고, 빛은 물을 잘게 쪼개 그물망 같은 얼개를 만든다. 물에 잠긴 사람이 수영을 즐기고 있다고 하기엔 물살이 잠잠하다. ‘일어남’이라는 현상 자체가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수영장에 쏟아진 빛은 종내 그 옆에서 수영장을 응시하며 서 있는 — 빨간 재킷을 입은 사람에게까지 치닫는다. 그와 맞부딪힌 빛은 뒤편으로 보이는 산세와 어우러져 초록에 가까운 그림자를 만들어 낸다. 내리쬐는 빛이 무색할 정도로 빨간 재킷을 입은 남자는 빛을 뚫고 물속에 있는 사람을 응시한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가라고도 불리는 영국의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예술가의 초상 : 수영장의 두 인물’이라는 작품이다. 호크니는, 말하자면 '고독'을 그리려고 한 것이 아닐까. 수영장 속에 있는 사람을 발행자(콘텐츠 크리에이터), 수영장 밖의 사람을 구독자라고 생각해 보자. 물속의 사람은 밖을 쳐다볼 의지가 없어 보인다. 즉, 고독에 잠긴 순간이라 할 수 있겠다. 발행자에게도 고독과 침잠의 시간은 필요하다. 발행자 자신이 단단하고 확고해야 타인으로 확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 그 자립감은 ‘스스로 고독할 권리’에서 생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독자도 포기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누군가가 '당신은 저 사람을 계속해서 감시하세요'라고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닌데, 구독자는 마치 그런 명령을 받기라도 한 듯 명령을 착실하게 수행하며 발행자의 고독을 방해한다. 구독자가 늘어날수록 방해의 강도는 더욱 거세진다. 결국 구독자 수와 고독할 시간은 반비례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가. 프랑수아즈 사강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말한 대로 구독자 중 누구라도 나에게 "당신에게 고독형을 선고합니다."라고 외쳐줄 수는 없는 걸까.
우리는 대체로 ‘고독’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혼동한다. 아마도 '외로움'이라는 단어 때문이리라. 하지만 고독과 외로움은 엄연히 구분해야 하는 감정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고독(Solitude)과 외로움(Loneliness)을 철저하게 구분했다. 외로움이 주변에 누군가가 없어서 느끼는 쓸쓸함이라면, 고독은 스스로 선택해서 홀로 선 상태라고 말이다. 쓸쓸하고 허무한 상태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행위가 고독이고, 누군가의 부재(不在)를 견디지 못해 허전해하는 감정은 외로움이다.
골목길 어귀 구석진 곳에 한 남자가 가만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담배를 뻑뻑 피우는 남자의 맞은편으로 아이 두 명의 손을 양쪽으로 잡은 아빠가 지나간다. 그 두 남자를 바라보며 걷던 중, 나는 우연히 담배를 피우던 남자와 아이들의 손을 잡은 아빠의 눈이 5초 정도 마주치는 순간을 인지한다. 서로를 공허한 눈으로 바라보던 두 남자 사이에 미묘한 정적이 흐른다. 잠시 후 그 둘은 각자 반대 방향으로 흩어져 걸어간다. 이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떠올렸을까?
담배를 피우던 남자가 아이들의 아빠를 바라보며 느꼈을 감정은 '외로움'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연대와 동떨어져 혼자인 상태를 스스로 선택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가 만약 아빠라면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미혼이라면 자기만의 아이를 원해서 느끼는, 그런 외로움 말이다. 맞은 편의 아빠가 느낀 감정은 '고독'에 가까웠을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연대에 포함되어 있음에도 공허한, 그 찰나의 순간은 자발적으로 침잠하는 고독의 시간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김연수 작가의 글을 보면 고독과 외로움의 차이가 보다 명확해진다.
"내가 말하는 건 눈에 띄지 않는 고독이다. 예컨대 그 저녁, 관광객들로 시끄러운 술집에 들어가 맥주를 마시며 내가 느낀 것과 같은 고독 말이다. 그 고독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익명의 존재로 남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리고 내게는 그 즐거움을 만끽하는 재주가 있었다."
(김연수, <언젠가, 아마도>, 컬처그라퍼, 2018, 160쪽)
“구독자 수가 적어서 고독해.”라고 말하는 사람을 더러 만난다. 그렇다면 그들은 고독하지 않기 위해 구독자를 찾는다는 말인데, 옳은 것일까? 구독자 수를 늘리는 일에 집착하는 사람은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지, 고독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이 아니다. ‘구독자 수’는 ‘외로움’과는 일정한 상관관계가 있겠지만, ‘고독’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고독은 결여(缺如)가 아니라 내적 충만(充滿)이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무르익은 것은 소멸하고 소멸하는 것은 모두가 무르익는다”라고 말하면서, 소멸하고 무르익는 순간을 ‘조용한 시간’이라고 불렀다. 철학자이자 번역가인 김진영은 그 시간은 또한 ‘거대한 고독의 순간’이라 칭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이 난숙한 무화과의 순간에 도착하기 위해서 평생을 사는가.”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한겨레출판, 2018, 112쪽)
고독은 결국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감정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구독자 수 따위와는 별개로 고유한 고독의 길을 택하는 일은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 ‘더 큰 첨벙(A Bigger Splash)’처럼 큰 파동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자기 내면으로 침잠하여 고독을 즐겨야 한다. 고독이 깊어질수록 파동은 강력해진다. 힘을 얻은 파동은 설사 장애물을 만나더라도 즉시 소멸하지 않고 회절(diffraction)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그러한 상태의 파동은 상대에게 더 잘 전달되어 울림을 줄 수 있다. 표피적 숫자에 집착하는 ‘작은 첨벙’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 낸 ‘더 큰 첨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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