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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크M Oct 22. 2020

당신이 선택한 언어는?

단편적인 언어에 매몰되지 않는 일



 

 하나의 세계에 탄생한 모든 것들은 각자에게 부여된 고유의 쓰임새를 갖는다. 생명이 없는 사물은 당연히 쓰임새가 있지만, 생명이 있는 존재 또한 고유한 쓰임새를 가지고 있을까? 적확하게 정의하기는 곤란하지만, 식물은 산소 발생과 대기 정화를, 동물은 생존과 번식을, 인간은 사고와 번영이라는 쓰임새를 갖는다. 신성한 인간에게 어떻게 ‘쓰임새’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느냐며 얼굴을 붉히는 사람이 있다면 미리 사과한다. 그래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도 쉽게 답할 수 없는 존재인 인간에게 무려 사고와 번영이라는 어렵고 고상한 쓰임새를 붙여드렸으니,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모든 존재는 각자의 생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도구를 적절하게 사용한다. 이때 사용하는 도구는 각자의 고유한 언어이다. 시곗바늘은 돌아가면서 시간의 흔적을 ‘째깍째깍’과 같은 소리 언어로 기록한다. 그림은 그려질 당시의 환경과 마음 그리고 분위기라는 언어를 품는다. 음식은 맛으로, 꽃은 향기로 언어를 전달한다. 무릇 만물은 언어를 갖는다.


 이렇게 수많은 언어로 채워진 바다에서 유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이 사용하는 협소한 언어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둔다. 여행을 예로 들어보자. 여행을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무언가를 보기 위해 여행한다. 또 다른 여행자는 먹기 위해서, 혹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여행을 결심한다.


Copyright 2020. 제이크M. All Rights Reserved.


 무언가를 보기 위해 여행하는 사람은 보는 행위 자체에만 집중한다. '보려는' 여행자는 시각적인 자극, 즉 눈에 보이는 것에 매몰되고야 만다. 시각적 언어에 한정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들에게 여행의 결과물은 잘 찍은 사진이고, 그 사진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SNS의 성공방정식을 ‘참’으로 만드는 ‘근’이 되고 있다. 화려한 건물 주위에서 어우러지는 새들의 지저귐, 은은하게 흩날려 건물과의 친밀성을 높여 주는 꽃과 숲의 향기는 여행자에게 잘 전달되지 못한다. 자발적 언어의 단절.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만 발현 가능한 ‘총체적 분위기’는 형성되지 못하고, 결국 총천연색 언어의 향연은 누릴 수 없게 된다. 한 가지 언어에 천착하여 그 언어만을 답습하는 순간, 다채로운 언어는 미완성의 형태로 전달될 수밖에 없다.




 지금껏 인간의 한정된 언어에만 관심을 가졌던 사람은 간혹 반문하기도 한다. 하나의 언어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영어도 배우고 제 2 외국어도 배우지 않느냐고. 이 발언은 언어의 폭넓은 정의 중 일부분에 해당하는, 단편적인 개념에만 치중한 발언이다. 물론 인간이 쓰는 언어가 우수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문학평론가인 신형철이 미시적 관점으로 표현한 문장만으로도 우리 언어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모든 예술 장르는 각자의 매체를 갖는다. 음악이 소리를, 회화가 색을, 영화가 영상을, 무용이 몸을 갖고 있듯이, 문학은 언어를 갖고 있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2018, 159면)


 인간의 언어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협의의 언어가 전부인 것처럼 여기며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현상을 주의하자는 말이다. 조금만 더 넓은 시야로 주위를 둘러보면, 만물에서 언어가 터져 나온다. 단지 우리는 그 신비롭고 고귀한 언어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는 일종의 빈곤이고 허약함의 반증이다. 황현산 번역가는 ‘어느 언어건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제멋대로 만들어진 임시 언어일 뿐’이라며 거시적인 관점에서 인간 언어의 한계를 꼬집었다.


어쩌면 인류가 여러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 사고의 허약함을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다. (황현산, <사소한 부탁>, 난다, 2018, 147면)


 먹고살기에도 바쁜 현대인이 왜 인간이 쓰지 않는 언어까지 신경을 써야 할까. 우리가 언어를 쓰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면 의외로 쉽게 그 이유를 구할 수 있다. 당신은 왜 언어를 쓰는가. 바로 의사소통 때문이다. 모토히로 카츠유키 감독의 영화 ‘사토라레(サトラレ)’에는 말을 하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기이한 능력을 가진 사토미 켄이치가 등장한다. 모든 인간이 그와 같을 수 있다면 굳이 언어 자체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입술을 뗄 필요도 없이 생각만 하면 되니까. 그런 초능력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우리에게 언어는 반드시 필요하다. 김인환 문학평론가의 말을 빌리면 ‘언어는 신체로부터 떨어져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자기에게로 가는 반성을 가능하게 한다.’(김인환, <타인의 자유>, 난다, 2020, 231면). 언어란 상대에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정의 교류를 권유하는 일이며, 성사된 교감을 바탕으로 자기반성과 깊은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작용이다.


 범위를 확장하여 식물과 동물을 떠올려보자. 그들은 우리에게 향기를 선물하기도, 때로는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기도 한다. 인간 상호 간의 교감을 넘어 고차원적인 층위에서 우리와 공생 관계를 이루는 그들과의 의사소통은 필수이지 않겠는가. 아니, 이는 오히려 인간 상호 간의 소통보다 더욱 중요할지도 모른다. 동식물과 같은 생명들의 부재는 곧 인간의 탄생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을 테니까. 반대로 생각하면 인간이 아닌 생명체와의 소통은 우리의 존립 근거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포괄적인 언어를 인지해야 하는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광의의 언어를 마주해야 할까. 영국의 비평가이자 작가인 존 버거(John Berger)에게 힌트를 구해보자. 그는 자신의 저서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에서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인지는 하고 있지만 쉬이 말해지지 않거나, 텍스트로 옮기기 어려운 언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말이나 글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표현되는 언어들을 오직 자기만의 사유와 통찰로 읽어낸 다음, 섬세한 감각으로 알아낸 그 다채로운 언어를 오롯이 글로 표현한다. 결국 생각이 열릴수록, 언어 감각이 섬세할수록 글은 풍성해진다. 인간의 말이나 글이 아닌 언어를 인지하고 표현하는 일은 한 가지 언어에만 매몰되지 않고 만물에 감각의 촉을 세우는, 그러니까 일종의 ‘영민한 감정 작업’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Copyright 2020. 제이크M. All Rights Reserved.


 모든 익숙함은 편의를 주지만 숙고(熟考)를 앗아간다. 숙고하고 사유하지 않으면 인간은 쓰임새를 다하기 어렵다. 목표를 성취하기는커녕 꿈을 이루기 위한 첫 발걸음조차 떼지 못할 수도 있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수시로 마주하고 귀를 열어야 한다. 호기심 어린 눈을 부릅뜨고 마음을 열어 관찰해보자. 익숙함에 도취하지 말고 낯섦에 흥미를 가져야 한다. 예술가와 같은 마음을 가지려 노력하는 것도 좋다. 이를테면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뮤지션처럼, 대기와 공명에 몸이 반응하는 발레리나처럼, 자연과 호흡하며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는 아티스트처럼. 내면에 잠재된 당신만의 섬세한 감각을 깨우고 예리한 시선과 호흡으로 펄떡이는 언어를 낚아챌 수 있기를 희망한다. 문학에서 그림, 음악, 영화까지 넘나들며 우리를 예술적 모험으로 인도한 오종우 교수의 말은 당신의 언어 탐험에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그림도 음악도 시도 영화도, 예술작품은 일상의 언어로 완벽하게 옮길 수 없다. 예술은 관습 언어로 짜인 기성 논리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세계에 있다. 세상에는 창의성과 상상력이 나오는, 끊임없이 사유해야 하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 (오종우, <예술적 상상력>, 어크로스, 2019, 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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