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시작과 끝은 인생의 시작과 끝과 일치한다.
학창 시절, 우리의 귀와 입, 머리는 모두 외울 거리로 가득 찼다. 그 중에서 국어시간에 가장 먼저 외운 ’표준어'의 정의가 기억난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 얼마나 모호한 정의인가. 박사 학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석사 학위는 받아야 교양 있는 사람일까? '두루 쓰는'은 얼마나 자주 써야 두루 쓰는 걸까? 기준과 조건이 '두루'뭉술한 정의를 달달 외우며 우리의 국어는 시작되었다. 그나마 국어는 양호한 편이다. 수학이나 과학, 사회 과목에는 내 생각이 개입할 여지조차 없었다. 창의보다는 끈기, 생각보다는 암기가 '교양'의 자리를 차지했다.
친구 세 명이 카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신다. 창을 통과하며 부서진 햇살이 커피에서 피어오르는 김에 아련한 극적 효과를 부여한다. A가 혼잣말을 한다. "날씨 진짜 좋다. 여기 커피도 맛있네." 옆에 앉은 B가 대답한다. "이 카페는 세계 3대 커피 중 하나인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커피를 쓰잖아. 바디감이 묵직하고 신맛과 단맛이 조화를 이루니까 맛이 없을 수가 없지." 맞은편에 앉아 가만히 듣고만 있던 C가 말한다.
"너 오늘 휴가잖아. 아, 분위기란 무엇인가."
아마 C의 대답에 대다수의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제정신인가? 분위기란 무엇이냐니. 괴짜가 분명해, 라고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도록 길들여졌다. C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괴짜고 B는 똑똑하고 교양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같은 카페에 가더라도 상황에 따라 커피맛은 다르다. 회사 점심시간에 선배들과 촉박하게 마시는 커피와 휴가를 쓰고 친구들과 차분하게 마시는 커피맛은 차이 날 수밖에 없다. C는 전체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분위기’라는 낭만적인 단어로 정리했다. 지식을 뽐내기보다는 관조하고, 맥락을 파악하여 자연스럽게 사유로 연결했다. 이처럼 사유는 절대 어렵지 않다. 외려 보통이고 평범하다. 연습하지 못해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사유의 과정은 인간의 실존 전체에 너무나 깊이 침투하여 사유의 시작과 끝은 인생의 시작과 끝과 일치한다."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 옮김, 한길사, 2019, 258면)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사유는 필수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한 대로 사유는 곧 인생이다. 단, 정확한 사유를 위해서는 ‘무사유’ 상태에서 시작해야 한다.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해야 한다는 말이다. 관찰하는 습관에서 개별성이 생기고 개인의 리얼리티는 선별적으로 재구성된다. 매일 지나는 길에 자리한 건물이나 가로수 따위가 낯설어 보여야 한다. 낯섦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일이 바로 사유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어렵지 않지만 평소와 다른 작업이기에 사유는 필연적으로 불편을 초래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단한 불편을 즐길 때에야 비로소 사유는 진정성을 얻는다.
외워서 터득한 지식은 금방 잊힌다. 얕고 넓게 아는 지식으로는 사물과 현상의 본질에 접근하기 어렵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우리가 상상하는 ‘교양 있는 사람’은 대부분 사유하기보다는 외워서 지식을 확장한 사람이다. 잘못된 상상이다. 교양은 단순히 지식의 다채로움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깊은 생각을 통해 원만한 ‘인격’을 배양해가는 노력이나 성과를 말하기 때문이다.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혹은 교양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사유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아니, 사유해야만 교양의 본질에 접근하는 일이 가능하다.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블레즈 파스칼’은 “우리의 모든 존엄성은 사유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올바르게 사유하도록 힘쓰자.”라고 했다. 교양 있는 사람이 두루 쓰는 생각법은 ‘사유’이기를 바란다.
Copyright 2019. 제이크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