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분위기, 그리고 나답게 사랑받을 분위기
바야흐로 '취함'의 시대가 도래한 것일까,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우리는 매일 무언가에 취한 채 살아간다. 누군가는 술 또는 약에 취하고, 혹자는 자본의 맛에 취한다. 취기는 취한 사람에게 평소에는 꺼려하던 어떤 행동을 실행하도록 유도하는데, '관계 맺음'을(좋아서든 억지로든) 강제하기도, 반대로 '관계 끊음'을(가엽게도) 종용하기도 한다. 이 모든 '취함'을 끈적하게 아우르거나 대충 무마할 수 있는 현명한 단어가 있는데, 바로 '분위기'이다.
분위기라는 단어는 "그냥, 분위기가 좋아서......"라며 얼버무리기에도 탁월하고(단, 잘못 얼버무렸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으니 조심!), "그 사람은 뭔가 분위기 있어 보여." 같은 칭찬 수단으로도 사용이 가능하다. 분위기가 어떤 것을 담고 있기에 우리는 분위기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또 받아들이는 걸까? 분위기가 좋은 곳을 찾아다니고 심지어 사람에게서도 특유의 분위기를 찾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자. '분위기'를 한 가지 의미로 명확하게 정의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한데, 이러한 현상은 표준국어대사전만 찾아봐도 인지할 수 있다.
[분위기]
1.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기체
2. 그 자리나 장면에서 느껴지는 기분
3.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나 환경
4.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지니는 독특한 느낌
5. 어떤 시대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사회적인 여론의 흐름
6. 문학 작품의 바탕에 깔려 있는 색조나 느낌
표준국어대사전에서조차 여러 가지 풀이를 제시하듯이, 분위기라는 단어는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된다. 보편적으로 가장 자주 사용하는 의미는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나 환경'이다. 말하자면 '분위기'라는 단어를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연상되는 이미지는 '공간'과 관련된 분위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여행을 갈 때에는 멋있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뽐내는 여행지를 찾고, 음식점이나 카페에 갈 때에도 아늑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갖춘 공간을 찾는다. 상대방이 누구인가에 따라 만날 장소를 신중하게 고르는가 하면, 공간이 그날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하나의 공간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어떻게 결정될까. '프란츠 카프카'는 소설 「굴」에서 '완벽하게 깊은 정적'과 '정적을 깨는 민망함'을 소재로 공간의 분위기를 표현한다. 그는 스스로 들어간 굴 속에서 느낀 깊은 정적에 대해 "여기는 얼마나 좋은가, 저 밖에서는 아무도 나의 굴엔 관심이 없고, 각기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 자신의 일들에만 신경을 쓴다."라며 예찬한다. 하지만 실재가 아닌 마음에서 피어난 작은 불안 하나로 인해 깊은 정적은 깨지고 만다. 소설 속 주인공은 정적이 깨진 원인을 자신의 민망함에서 찾으며 이렇게 말한다.
"굴을 소유했다는 행복이 나를 버릇없게 했고 굴의 민감함이 나를 예민하게 했으며 굴의 상처가 나 자신의 상처인 것처럼 나는 아프다. 바로 이 점을 나는 예상했어야 했다."
(프란츠 카프카, <굴>, <<법 앞에서>> 중에서, 전영애 옮김, 민음사, 2017)
그의 말을 곱씹어보면 분위기란 마음이 만들어 낸, 이를테면 안개의 어스름에 비유해볼 수 있겠다. 마음이 차가우면 공간 가득 안개가 퍼져 시야와 상념의 명징함이 사라지는 반면, 마음이 따뜻하고 여유로울수록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 드는. 그러니까 현재의 내 감정에 조응하는 수준에서 공간과 순간의 분위기는 형성된다는 말이다.
분위기는 결국 의식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는 요즘 유행하는 '가심비'라는 용어에서도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요즘에는 가격 대비 성능을 의미하는 '가성비'보다 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도를 의미하는 '가심비'를 더 우위에 두는 것이 소비 트렌드이다. 가격이 싸다고 무작정 구매하기보다는 비싸고 무용해 보이더라도 자신이 만족할 만한 물건을 구매한다. 말하자면 심리 중심의 소비문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심리적 만족도를 결정하는 핵심 요인이 바로 '분위기'이다. 사실 어떤 물건도 구매해서 직접 사용해보기 전에는 만족도를 미리 결정할 수 없다. 물건을 구매할 때, 단지 '이 물건은 만족도가 높을 것 같아'라는 의식이 작용할 뿐인데 그 의식을 결정하는 인상 자체가 바로 전체적인 분위기이다. 그러므로 심리적 만족도는 분위기에 의해 좌우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매일 어떤 분위기 속에 놓여있는 존재다. 아니, 자신이 어떤 분위기를 찾아 들어간다는 능동형 표현이 더욱 어울릴 듯하다. 그만큼 우리는 '분위기 좋음'을 높게 평가한다. 이런 현상은 철학자나 문인에게서도 흔히 발견된다. 철학에서 분위기는 '현상학'으로 연결된다. 이 학설은 독일의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오스트리아의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주장했는데, 현상이나 사물을 인지할 때 기존의 모든 판단을 중지한 채, 선입견 없이 직관적으로 바라보고 본질을 파악하는 철학적 사고법을 의미한다. 특히 신체현상학을 주장한 '헤르만 슈미츠(Hermann Schmitz)'는 이런 말을 남겼다.
"감정이란 신체의 동요에 의해 감지되는 분위기 그 자체에 다름 아니다."
시인에게도 '분위기'라는 소재는 활용도가 높은데, 분위기를 가장 잘 표현한 시를 꼽자면 단연 오은 시인의 '아이디어'라는 시를 꼽을 수 있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정말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하는 것 같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 엄습하는 것들을 사랑해 // 때때로 우리가 직접 나서서 / 그것들을 접기도 하지"
(오은, '아이디어',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문학동네, 2013)
공간에 대한 분위기에서 한 차원 더 나아가, 사람 자체에 대한 분위기는 존재할 수 있을까? 존재한다면 어떤 형태로 사람의 분위기는 결정될까? 분위기는 주관적인 감정의 일부이기에 보편타당하거나 객관적인 방법으로는 결정할 수 없는 영역이다. 하여, 사람 자체에 대한 분위기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의식이 만든 산물로 이해해야 한다. '저 사람은 분위기가 멋있네', '그분은 분위기가 조금 별로야.'와 같은 생각은 스스로 분위기의 기준을 정하고 그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 일정한 평가를 거쳐 산출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타인이 느끼는 나의 분위기는 고정적일까, 변동적일까? 고정적이라면 타인은 나를 볼 때마다 같은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고, 변동적이라면 나에게서 매번 다른 분위기가 연출된다고 느낄 것이다. 분위기는 의식의 산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특별한 변화 없이 시간이 흐르면 무의식의 영역으로 전환된다. 이를테면 계속 가던 카페를 여러 번 재방문했을 때, 처음 느꼈던 좋은 분위기가 '그저 그런' 분위기로 바뀌어 분위기에 대한 호오(好惡) 자체가 무뎌지는 것처럼. 정리하면 의식이 발동할 때를 '변동성', 무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갈 때를 '고정성'으로 정의해볼 수 있겠다. 특히 의식과 무의식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분위기의 변동성과 고정성도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데, 나는 이러한 현상을 '분위기의 혼재(混在)'라고 칭한다.
분위기의 혼재 속에서 자신의 분위기를 '호(好)'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첫 번째로는 고정적인 이미지를 결정하는 첫인상을 잘 설정하고 계속 유지하는 방법이 있다. 무의식이 작용하는 영역을 사로잡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하여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모습도 있었나? 새롭네.'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면 성공이다. 두 가지 방법과 함께라면 스스로 자신의 분위기 자체를 지배하는 것도 가능하다. 사람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글을 쓸 때에도, 혹은 직장생활이나 모임에서도, 분위기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꾸준히 노력하면 그 공간의 모든 분위기를 스스로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가 내 분위기에 흠뻑 취하도록, 그러다 내가 가진 분위기를 모두 탕진하더라도 그 취함이 끝나지 않도록. 사랑하는 분위기 속에서 당신이, 오롯이 당신답게 사랑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지닌 사람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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