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예찬할 만한 걸음에 대하여.
“와, 사람 정말 많다. 이 수많은 걸음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퇴근길 지하철의 인파 속에서 출구를 찾아 걸어가던 친구가 말했다. 일상과 맞닿아 있지만 약간은 철학적인,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사람들의 걸음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한 순간은.
지하철 플랫폼은 다양한 걸음을 마주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다. 무리 속에 나를 숨긴 채, 마음 놓고 사람들의 걸음을 관찰해도 걱정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얼기설기 섞여 걸어가는 사람들의 걸음을 가만히 주시한다. 한 발자국 떨어져 흐린 눈으로 바라본 걸음걸이는 비슷하거나 심지어 똑같아 보이기도 한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유심히 들여다보면 걸음걸이는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그려진다. 선연하지 않던 걸음의 꼴은 점차 각양각색의 춤사위가 되어 내 눈에 아롱진다.
바삐 걸어가는 걸음과 여유로운 걸음, 좌우로 많이 흔들리는 걸음과 앞으로 쭉 치고 나가는 걸음, 왼발과 오른발을 정확한 비율로 교차하는 걸음, 규칙 없이 왕복하는 발로 걷는 걸음, 바닥에서 거의 발을 떼지 않고 걷는 걸음과 완전히 땅에서 발이 떨어지는 걸음. 모두 표현하기에는 적당한 단어가 모자랄 정도로 걸음의 형태는 다양하다. 이 모든 그대의 걸음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사람마다 제각각인 걸음을 보노라면, 그동안 간과하고 있던, 아니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는 걸음을 걷는 법에 대해서는 배워본 적이 없구나.’ 사람들은 자신의 걸음에 무심하다. 어렸을 때 걷는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는지, 커가면서 점점 걸음의 형태가 바뀌었는지는 관심 밖이다. — 올림픽을 앞둔 경보 선수는 물론 제외하고 — 누구든 걷는 법을 가르치려 하지도, 배우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일 걷고 있다. 자연스레 몸에 익힌 자신만의 걸음걸이로, 바닥에 고유한 걸음의 꼴을 남기면서.
걸음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먼저 걸음의 사전적 의미를 보자. 동작이나 움직임을 의미하는 일종의 모양새를 일컬어 '걸음'이라고 한다. 이런 모양새를 자발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걷기’라는 행위이다. 걸음은 ‘내가 걷는다’라는 의식적 행동이 있어야 비로소 생겨난다. 의식이 만들어 낸 행위의 산물이 바로 걸음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의식에는 필연적으로 목적이 수반된다. 부지런히 걸어가는 사람이든 천천히 여기저기 서성이는 사람이든 모두 목적을 가지고 걷는다. 즉, 걷는 행위는 자발적 의식으로 결정된 목적의 울타리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 사회학과 교수인 ‘다비드 르 브르통’은 오히려 목적이 없는 걷기를 예찬하고 나선다.
"우리는 목적 없이 그냥 걷는다. 지나가는 시간을 음미하고 존재를 에돌아가서 길의 종착점에 더 확실하게 이르기 위하여 걷는다. 전에 알지 못했던 장소들과 얼굴들을 발견하고 몸을 통해서 무궁무진한 감각과 관능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확대하기 위하여 걷는다. (중략) 걷기는 어떤 정신상태, 세계 앞에서의 행복한 겸손, 현대의 기술과 이동수단들에 대한 무관심, 사물에 대한 상대성의 감각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근본적인 것에 대한 관심, 서두르지 않고 시간을 즐기는 센스를 새롭게 해 준다."
(다비드 르 브르통, <걷기 예찬>, 김화영 옮김, 현대문학, 2002, 21쪽)
목적 없는 걷기를 떠올리면, 양가적 감정이 든다. 아무런 목적 없이 걷는 일이 자유롭고 관능적이라는 사실은 일견 명백해 보인다. 한편 속도가 지배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목적 없는 걷기'는 허황된 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각박하고 바쁜 현실 속에서 누군들 유유자적하며 하릴없이 누비는 시간을 싫어하겠는가. 나는 오히려 브르통 교수가 말한 ‘목적 없는 걸음’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의미한 걸음을 걷기보다는 의식적으로라도 즐기며 걸어야 한다. 시간을 음미하고 감각과 관능의 세계를 탐하기 위해 억지로라도 목적을 갖고 걸어보자. 목적이 반드시 종착지일 필요는 없다. 도달이 목적의 동기가 되어서도 안 된다. 걷는 순간의 공기를 느껴보라. 나를 포위한 향기의 정체를 찾아 헤매 보자. 해의 머묾과 사라짐으로 인해 녹아내리는 하늘의 노을을 벗 삼아 걸어볼 수도 있겠다. 주위를 둘러보고 시간을 즐기는 일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보자. 만물이 목적이 되는 걸음은 비록 작은 움직임이라도 숭고함을 자아낼 것이다.
목적이 뚜렷하지 않고 오로지 종착지에 도달하는 일에만 매몰된 걸음은 무겁고 어색하다. 반면 목적이 아름다운 걸음은 경쾌하고 활기차다. '목적 없는 걸음'처럼 아름다운 걸음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목적이 뚜렷하고 지극히 의식적이어야 한다.
걸음은 종종 생각하는 일에 비유되곤 한다. 어떤 생각을 떠올려 처음으로 무언가를 시작할 때, 우리는 ‘첫걸음’을 내딛는다고 말한다. 생각이 확장되지 못하고 한 자리에 머물러있을 때를 가리켜 ‘제자리걸음’이라 일컫는다. 걸음은 생각의 모양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올바른 걸음걸이에 대해 정해진 기준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하게 자유가 주어진 영역, 오히려 이런 것도 자유인가, 라고 느낄 정도로 열린 자유. 이런 자유는 '생각이 나아가는 길'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걷는 모양을 제한하거나 틀에 집어넣지 않는 것처럼, 생각을 펼치는 방식 또한 억압하거나 비난함으로써 무형의 틀 속에 가두지 말아야 한다. 단, 스스로 옳다고 판단한 생각은 흐트러지지 않을 정도로 확고해야 한다. 목적은 명확하게 설정하자. 목적이 분명한 생각이어야 쉬이 침해당하지 않는다. 다소 철학적이었던 친구의 물음에 내가 이렇게 답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
“그들이 가는 곳은 자기만의 확고한 세계일 거야. 각자의 걸음을 자세히 보면, 그 세계로 이동해야만 하는 명확한 목적이 보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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