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과 인간의 따뜻함에 대하여
추운 겨울, 카페에 들러 뜨거운 커피를 한 잔 사서 밖으로 나왔다. 커피 컵을 잠시 들고 있자 커피 위로 하얀 김이 뽀얗게 솟구쳐 올랐다. 김은 마치 '이 컵을 빨리 벗어나야겠어'라고 외치듯 소용돌이치며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마치 미리 설정된 법칙에 의해 자동으로 움직이는 기계처럼 김은 일정한 형태를 그리며 대기 중으로 뿜어져 나왔다. 액체가 기화되면 김이 나는데, 따위의 어쭙잖은 과학 상식을 떠올려 볼 때 즈음이었을까. 매서울 정도로 차가운 날씨를 이기지 못하고 금방 식어버린 커피의 김은 점점 사그라들었다. 아마 커피도 뜨겁게, 기화점(氣化點) 이상의 온도를 계속 유지하며 버티기는 힘들었으리라.
문득 우리 마음도 추운 날의 커피와 같을까, 생각했다. 마음씀이 섬세하고 심연이 자존감으로 가득 차서 심장이 뜨거운 사람은 아무리 추운 날에도 얼기설기 얽힌 진한 농도의 김을 내뿜는다. 우리는 이를 기세나 기운이라 부른다. 뜨거운 사람이 내뿜은 김에서는 에너지가 느껴지는 건 물론이고, 그 강렬한 기운은 상대방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반면, 심장이 차가운 사람에게서는 강인한 자태의 김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에게서 나오는 김은 절대량이 적을뿐더러 생기도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한강 작가는 입김을 '몸속이 따뜻하다는 증거'라고 표현하면서,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동작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따뜻함에 기대고 싶다는 느낌을 전달한다.
"끈질기게, 그러나 성과 없이 반복되는 그의 손동작을, 그의 몸속이 따뜻하다는 걸 증명하듯 입술 사이에서 끊임없이 하얗게 뿜어져 나와 흩어지는 입김의 움직임을 그녀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한강, <작별>, 은행나무, 2018, 23면)
뜨거운 커피에 김의 문제가 있듯, 무릇 사람에게는 마음의 문제가 있다. 마음이 따뜻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외모를 꾸며도 매력적인 사람이 되기 어렵다.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뿜어져 나오는 온기를 머금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명석하지만 계산적인 두뇌보다는 적정하게 안온한 온도를 품은 사람. 존재의 질량보다는 밀도를 고민하고, 주체하기 힘든 따뜻함을 발산하는 사람 말이다.
갓 추출한 뜨거운 아메리카노에 얼음을 넣으면 탁탁 소리와 함께 얼음에는 까만 금이 생긴다. 검은 선들 사이로 스며든 커피는 순식간에 얼음을 녹여 버린다. 이미 식어버린 커피는 뜨거운 커피와 다르다. 얼음을 넣어도 금이 생기기는커녕 녹을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온도의 차이는 사람의 마음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상대에게 미지근한 사람으로 남을지, 따뜻한 사람으로 다가갈지는 온전히 자기 마음의 온도에 달려 있다.
매서운 칼바람 속의 커피를 바라본다. 새까만 아메리카노 위로 급하게 어스러지는 김을 응시한다. 그것은 커피가 내뿜은 강한 입김일까, 추운 날씨에 식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서 내뱉은 한숨일까. 투명에 가까운 하얀 점들을 찍다가 대기 속으로 사그라지듯 사라져 버린 커피의 촘촘한 입김에, 혹은 가벼운 한숨에, 그렇게 내 생각도 섞어 보낸 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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