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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크M Dec 17. 2019

'높이'는 있는데, 왜 '낮이'는 없을까?

더 높은 곳을 향한 갈망과 분투




 젊은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누구보다 노력하는 내가 유일하게 포기할 수 없는 고리타분한 취미가 있다. 바로 사전 찾아보기이다.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메모하기 전에 반드시 사전을 찾아본다. 그래도 벽돌처럼 두꺼운 종이사전을 들고 다니진 않으니까 너무 걱정은 마시라. 어느 날 나는 인터넷 사전을 검색하다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높다’는 ‘높이’라는 명사형을 갖는데, ‘낮다’를 의미하는 명사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 ‘낮다’는 ‘낮이’ 같은 명사형을 갖지 못할까. ‘높음’의 도움이 있을 때에 겨우 ‘높낮이’라는 명사를 만들어 낼 수 있으니, '낮다'의 입장에서 보면 퍽 서글픈 일이다.


 '높낮이'의 영향력은 각자의 삶에 생각보다 깊숙이 침투해 있다. 성적을 높이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승진을 하기 위해 야근을 일삼더라도 업무능력을 높이려고 한다. 집중력을 높이고 목표를 높게 잡고 심지어 꿈마저 높게 잡아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배운다. 그러다 보니 낮게 보는 새는 멀리 날 수도 없게 되어버린 현실이다. 인정과 성공의 기준은 결국 '높이의 법칙'을 따른다.


 이미 생의 결정적인 척도로 자리매김한, 높낮이를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사람의 키, 시험 성적처럼 확연하게 식별할 수 있는 높이가 있다. 하지만 외관상 명확해 보이는 높이도 전후 사정과 주변 환경을 고려해 봤을 때, 명확하다고 할 수 없는 상황도 분명 존재한다. 다음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A는 토익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학원 수업을 등록했다. 한 달 동안 공부해서 토익시험을 봤는데, 같은 클래스 학생들과 비교해 보니 30명 중 20등을 했다. A는 당연히 낮은 성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경우라면 어떨까? 다른 학생에게 물어보니, A를 제외한 29명 모두 시험을 준비한 지 1년 이상 지났다고 한다. A는 한 달을 공부하고 치른 첫 시험에서 30명 중 20등을 했다. 토익 시험을 1년 이상 준비한 다른 학생들의 틈바구니에서 말이다. 이런 경우에도 A의 성적이 낮다고 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한, 나는 높낮이가 상황이나 생각에 따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높낮이에는 어김없이 감정이 개입한다. 높이에 대해 어느 정도 습관화된 내 감정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스스로 적당한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에 따라 감정적 높낮이를 결정하고 있을 때가 많다.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 중에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라는 말이 있다. 기복이란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모습을 일컫는다. 감정의 높음은 격하다 또는 격정적이다로, 낮음은 침착하다 또는 차분하다는 말로 달리 표현한다. 감정이 격해졌는지, 차분한 상태인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자기 자신 또는 상대방의 주관적 감정이다.


 감정의 높고 낮음을 구분해 주는 객관적인 지표는 존재하지 않는다. 높낮이란 오롯이 자신의 감정과 그로부터 파생된 행동에 의해 결정되는, 이를테면 주관적인 파고(波高)라 할 수 있겠다. 파도는 더 이상 높아질 수 없는 상한(파고)에 이르면 포말이 되어 부서진다. 우리의 감정도 걷잡을 수 없는 격정에 이르렀을 때, 파고에 다다른 파도처럼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격정으로 대변되는 높이의 중심은 언제나 자신의 감정이 설정한 기준이 차지한다.



 유미주의를 대표하는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의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도리언 그레이는 화가 ‘바질’이 그려 준 자신의 초상화를 미(美)의 기준으로 삼는다. 초상화 속 자신은 젊고 아름다운 반면, 현실의 자신은 점점 늙고 지쳐간다. 그는 늙지 않는 초상화 속 모습으로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자신의 영혼이라도 내어 놓겠다고 말한다. 그의 욕망은 결국 초상화 속 자신과 현실의 자신이 바뀌는 믿기 힘든 결과를 초래한다. '영원한 젊음'을 얻은 도리언은 그 대가로 영혼을 잃어버리고 결국 광기의 세계로 빠져들고 만다. 도리언은 자신의 영혼을 팔아넘길 정도로 ‘젊음’이라는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포기하지 못한다. 가치는 높이와 상관관계에 있다. 만약 내가 일생 동안 하고 싶은 일들을 서열화하는 작업을 한다면, — 순서대로 적어 보는 버킷리스트처럼 — 나는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높은 순위를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의 사건에 우선순위를 줄지, 후순위로 밀어낼지는 온전히 내 감정이 정한 기준에 따른다. 기준의 대상 자체가 도리언이 갈등한 '젊음'과 '영혼'처럼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가치일지라도.




 나는 높낮이의 기준을 스스로 통제하고 의식적으로 조정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기준은 자기감정의 영역이기 때문에 굳이 고정할 필요는 없다. 나 자신의 감정을 마주할 때에는 최대한 기준을 엄격하게 설정한다. 자존감, 자신감, 자아정체성 등은 높을수록 단연 빛이 난다. 반면 타인과의 관계에서, 혹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는 그 기준을 낮춘다. 이기심, 잘난 척 따위는 낮을수록 관계에 득이 된다.


 경쟁이 전부가 되어 버린 현대 사회에서는 높음의 가치를 중요시한다. 마치 황금성인지 모래성인지 구분조차 하지 않고 모두가 정상만을 바라보며 내달리는 격이다. 가치에 대한 의식 없이 지나치게 '높음'만을 추구하는 일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낮은 감정에도 차분함과 침착함 같은 묵직하고 소중한 가치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기억하자. 박산호 번역가는 자신의 저서에서 낮음이 주는 감각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영어에 ‘grounded’란 형용사가 있다. 30대에 번역을 시작하면서 이 말을 처음 접했지만 이 말의 진정한 뜻이 발을 단단한 땅에 확실하게 딛고 선 감촉이자, 거기서 나온 ‘현실에 기반을 둔’이라는 의미를 그 전에는 실감하지 못했다." (박산호, 「어른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 북라이프, 2018, 216쪽)


 높음은 하늘에 닿아있는 반면, 낮음은 땅에 가깝다. 낮음을 추구하면 땅을 딛고 서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곧, 현실을 직시한다는 사실로 연결된다. 낮음을 추구할수록 현실의 감각이 깨어 난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언제나 스스로를 낮춘다. 픽션의 세계에는 '만약'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하지만, 나는 감히 만약의 상황을 가정해 본다. 도리언 그레이가 현실을 직시하고 젊었을 때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로 늙었다면 어땠을까? 실력 있는 화가 '바질'이 죽을 일도, 사랑하는 여인 '시빌'의 자살도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우리에겐 아직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다. 끝없는 높음을 추구하며 이상을 향해 전력 질주할 것인가? 높이에 대한 자신만의 적정한 기준을 설정하며 낮음의 가치를 인정할 줄 아는 현실적인 삶을 살아갈 것인가? 선택은 온전히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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