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의 초상
젊은 세대가 나이 든 세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경험법칙의 하나다. 최근 꼰대라는 말이 다시 유행한다는 뉴스가 놀랍지는 않았다. 그런데 마음이 조금 불편하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꼰대로 되는 것일까? 진짜로 이 생각은 진실일까?
젊은이들은 소통이 잘 되지 않는 나이 든 사람,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신념을 강요하는 어르신들을 꼰대라고 부른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예전에는 말이야…….", "요즘 애들은 어려운 것을 잘 몰라"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꼰대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자신만의 관념과 경험에 갇혀 사는 답답한 시니어를 비꼬는 말이다. 가슴이 뜨거웠던 청년시절을 돌이켜보니 꼰대라는 말이 희귀한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시니어 세대로 막 진입한 나로서는 이런 현상이 몹시 불편하다. 꼰대화 현상을 따져보는 이유다.
나이 듦이 꼰대를 만드는 것일까? 나이 듦은 시간과 경험의 축적이다. 시간은 경험을 낳고 사람은 경험을 통해서 가치와 신념을 얻는다. 가치와 신념은 사람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삶을 지탱하는 기둥과도 같다. 세상을 살면서 가치가 모호하거나 약하다면 온전한 삶을 살기는 힘들다. 또한 경험은 세상살이를 위한 지혜를 낳는다.
이 점에서 나이 듦은 자연현상이면서 인생의 축복이다. 내가 이것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하는 후회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젊은 시절에 깨달았으면 하는 지혜를 돌이켜 보지 않는 어른은 없다.
그럼에도 꼰대는 있다. 제법 많다. 가치와 신념에 동반하는 어두운 면이 있기 때문이다. 가치와 신념이 강할수록 다른 가치와 신념을 배제하기 쉽고 인정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용인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부정일 수 있고, 가치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준다. 꼰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대체로 고집스럽고 다른 가치와 신념에 닫혀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면 꼰대는 과연 인간에게는 불가역적인 현상인가? 다른 경험을 했다는 차이로 생기는 소통의 장벽은 불가피한 것인가? 나이 든다는 것, 나이 든 사람의 모습은 무엇일까? 무엇이 되어야 할까?
나이 듦은 분명히 이해와 소통의 장벽을 만든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이 상대방을 온전하게 이해하기란 어렵다. 다만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고 자란 세대에게는 비슷한 사회문화적 경험이 동질성을 주기는 한다. 하지만, 수십 년의 간격, 세대차이가 큰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마저도 없다. 다른 세대 사이에서 최소공배수를 찾기는 어렵다. 나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다. 중고등학생들에게 20세기 초 유럽인들이 겪어야 했던 세계대전과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떠난 그들의 선택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었다. 무척 힘들었다. 21세기에 태어나고 자란 청소년들에게 당시 유럽인들이 마주했던 삶의 엄청난 무게와 자유에 대한 갈망을 이해시키기란 매우 어려웠다.
일단, 세대 차이에 따른 소통의 어려움을 인정해야겠다. 그런데 나이에 따른 소통의 어려움이 언제나 같지는 않았다. 과거부터 꼰대는 있었지만, 세대 간의 차이가 지금처럼 크게 여겨지지는 않았었다. 내가 자란 시대에는 비록 소통이 힘든 어른들이지만 존경받는 어른들도 많았다. 오늘날의 현상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중년 세대가 놓여 있는 사회적 조건을 살펴보는 이유이다.
꼰대의 생물학적 나이는 중년 이후 세대이다. 중년은 사회의 중심 집단이다. 그리고 경력의 정점에 있는 세대이다. 물론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대 사회에서 이들이 놓여 있는 위치는 다르다. 조직사회인 현대 사회에서 중년은 조직을 이끄는 최고경영자이거나 임원이거나 관리자로 일하고 있고 또 전문가로 일하고 있다. 이들은 젊은 시절에 일을 시작했고 젊은 시절의 노력이 모여 현재의 위치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풍요에서 중년 세대는 청년세대를 앞선다.
그런데, 현대의 중년 세대는 큰 압박 속에 살고 있다. 중년 세대에게 허용된 여유가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에 뒤이어 지식이 중심인 지식사회로 전환되고 있는 추세는 이들의 위치를 위협하고 있다. 지식사회는 이들에게 냉정하다. 지식의 유효기간을 급속도로 단축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대학을 졸업하면 어느 정도는 배운 지식을 유효하게 활용했지만 이제 이것은 불가능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중년 세대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으며 빨라지는 은퇴시기를 고민하고 있다.
그런데 사회 각 분야에서 경력을 이어가고 있는 중년은 그나마 다행스럽다. 일을 떠난 중년 세대도 상당하게 많으며 늘어나고 있다. 사오정이라는 말이 회자되기 시작한 지도 수십 년이 지났다. 이제 커리어를 튼튼하게 지탱하던 정년이라는 체제는 일부 조직에게만 살아남아 있다.
문제는 조직을 떠난 이후에, 어떻게 살아 나가고 있느냐이다. 삶은 지속되기 때문이다. 재산을 여유 있게 축적한 사람들은 여행, 골프, 맛집 탐방, 취미생활 등 조직생활로 희생했던 여가와 휴식, 자신이 하고 싶었던 활동을 하며 잘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양태를 행복한 은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모습이 진정으로 만족스러운 삶의 모습인가는 확실하지 않다. 일정 기간은 여유와 회복을 즐길 수 있겠지만, 지속적인 충만감을 주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자산 축적에 실패한 중년들은 경력단절과 경제문제 해결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열심히 일자리를 찾아 나서지만 큰 어려움을 겪는다. 불경기라는 경기변동요인 외에도 기술변화와 경제구조가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지식사회에서 이들이 보유한 지식과 역량은 큰 가치가 없다. 냉정하지만 현실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이들은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지킨다는 압박감과 사회적 지위를 상실했다는 상실감을 견뎌내며 살고 있다.
중년 세대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삶의 영역과 삶을 꾸리는 방식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경력의 정점에 있지만 자리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압박감, 사회발전 추세에 뒤쳐지고 있다는 위기감,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혹은 급작스러운 경력단절과 원하지 않는 은퇴라는 현실 속에서 상실감을 감내하고 있다. 가장이자 관리자라는 역할을 잃어버린 지 오래고 어려움을 나누고 도와줄 사람도 많지 않다. 그런데, 인생을 정리하거나 마감하기에는 정신이 생생하고 육체도 건강하다. 중년 세대는 출발도 마감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년이 놓여 있는 이런 사회적 조건이 꼰대를 만드는 것인가? 이 가설은 답이 명확하지 않다. 답답한 젊은이, 개방적인 노인이 있는 것처럼 개인적 성격이나 태도가 꼰대를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년 세대가 겪는 어려움이 꼰대화(Ggondanization)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중년 세대는 자신이 있어야 하는 영역을 잃었거나 잃고 있다. 한 개인에게 단절감과 지위 상실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타인과 세계에 대한 관용과 개방성을 막는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거나 그의 입장을 경청하거나 배려할 수 있는 정신적 여유를 박탈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청년도 아니고 노인도 아닌 중년 세대가 다른 세대와 소통하기 힘든 꼰대로 되어 버리는 현실이 나는 안타깝다.
꼰대가 되고 싶은 중년 세대는 없다. 꼰대는 분명한 구별이고 관계 단절을 의미한다. 관계의 단절은 충만한 삶에 큰 구멍을 만든다. 충만한 삶이란 독립적 존재로서 자신의 가치대로 살면서 다른 사람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삶이기 때문이다. 또한 꼰대만 있는 청년세대는 나이 든 세대로부터 배울 수 있는 지혜를 체득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 삶을 살아가는 지혜는 자신의 경험으로부터만 오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삶을 통해서 사람은 배우고 깨닫고 영향을 받는다. 청년세대는 앞서 살아간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소중한 기회를 상실하고 있다.
꼰대화는 분명히 중년 세대나 청년에게 삶의 불행이다. 꼰대화를 역전시켜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꼰대화는 단절이고 차별이다. 따라서 역전은 단절을 공감과 소통으로, 차별을 다름으로 포용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즉 새로운 관계 맺음이다. 관계 맺음은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 속에서 공감과 이해를 교환할 때 이루어진다. 다른 경험과 가치는 차별과 단절의 근거가 아니라 소통과 관계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삶을 재조정한다는 자각과 함께 삶의 영역을 재구축해야 한다.
행복한 삶에 대한 성찰은 그 출발점이다.
모든 사람은 행복을 원하고 추구한다. 그런데 무엇이 행복인가에 대해서 단 하나의 답변은 있을 수 없다. 삶의 주인은 온전히 각자이기 때문이다. 순수하고도 유일하다는 의미에서 행복에 대한 정의는 없다. 여러 위대한 사상가나 철학자가 정의를 내렸지만 말이다. 그런데 행복이란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궁극적 가치라는 점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한다. 행복은 그 자체가 목적인 삶의 가치다. 부유함, 명예, 권력 같은 중요한 가치가 있지만 이들 모두는 궁극 성이 없다.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이다. 행복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다. 행복은 인간에게 제1의 가치다.
이제 실질적이고 중요한 것은 행복에 담겨야 혹은 담아야 하는 내용이다. 무엇이 행복을 구성하는가? 사람마다 다르지만 인간에게는 존재로서 공통되는 요소가 있다.
나는 경험의 질과 관계의 깊이에 행복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삶에서 무엇을 체험하는가? 그 체험이 주는 가치와 의미는 무엇인가? 또한 그것은 부족하지 않고 충분한가? 경험을 통해 사람은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경험이 있는 순간에 자신을 느낀다. 경험은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준다.
또한 사람은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 사람들과 무엇을 주고받는가? 관계는 사람의 존재 조건이고 양식이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무인도에 불시착한 톰 행크스가 제일 힘들어한 것은 배고픔도 아니고 추위도 아닌 고독이었다. 누구와 만나며 누구와 관계하는가? 슬픔보다는 기쁨을 많이 느끼는 사람, 고독한 사람보다는 우정을 나누는 사람이 행복한 이유는 그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행복은 나이 듦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까? 먼저 나이는 행복과 무관한 듯 보인다. 사람은 늘 행복을 추구할 수 있고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행복과 소년의 행복, 중년의 행복과 노인의 행복은 똑같이 중요하다.
그런데 나이는 행복과 관련이 있다. 앞서 말한 이유와 모순인 것 같지만 이 또한 진실이다. 나이에 따라 행복의 내용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에 따라 삶의 조건은 달라진다. 이 조건이 삶의 경험과 관계를 다르게 만든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삶의 방향과 목표, 영역, 가치와 정서는 달라진다. 이것은 개인에게도 그렇고 넓게 보면 세대에도 적용된다. 세대에 따라 행복의 내용과 행복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달라야 한다.
청년 세대의 행복: 이 세대는 자아를 발견하고 미래를 위한 준비와 숙련을 시작하는 세대이다. 삶의 영역에서는 가정에서 사회로 확장하는 세대이다. 공부하고 자격을 얻고, 경력을 선택하고 적절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을 찾고 연마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성장과 우정은 중요한 행복의 내용이 된다.
시니어 세대의 행복: 시니어에게 삶의 조건은 무엇일까? 시니어는 자아를 찾았고 준비와 숙련의 시기를 거쳤다. 직장인으로든 전문가로든 경력을 만들어 왔고, 가족과 동료라는 삶의 영역을 만들어 왔다. 그 영역에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고 사회적 지위를 얻고 나름의 기여를 통해 의미를 얻는 것이 행복의 중요한 원천이다.
그런데 시니어가 처한 사회적 조건이 이들에게 큰 어려움을 던지고 있다. 자부심과 의미의 바탕이었던 경력과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지위는 불안하다. 급격한 사회문화적 변화는 미래에도 현재의 경력과 삶의 영역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 깊은 불안감을 던진다. 또는 급작스러운 은퇴로 인해 지금까지 안정적인 울타리이자 의미를 느꼈던 영역을 떠날 준비가 부족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다른 사람, 특히 젊은 세대와의 단절과 소통의 어려움, 적절한 삶의 영역을 찾지 못하는 상실감은 행복한 삶에 대해 깊은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시니어에게 삶은 혼란스럽다.
이러한 삶의 상황 속에서 행복한 삶은 어떤 모습일까? 행복한 삶은 경험의 질과 관계의 깊이에 큰 영향을 받는다. 결국, 시니어의 삶의 조건에 부합하면서 경험의 질을 높이고 관계의 깊이를 더해 주는 삶의 영역을 재구성하는 것에 답이 있지 않을까? 시니어가 마주한 삶의 조건과 상황을 상세하게 살펴보고 그 방향을 찾기를 조언하고 싶다.
인간은 처음으로 생명을 얻고 그 뒤에 지식과 경험을 통해 자신을 완성하고 삶을 만들어 나간다. 이것이 누구에게나 같은 보편적인 인간의 조건이다. 시니어의 삶의 조건은 무엇일까? 이 보편적인 조건에 더해서 나이 듦에 따른 조건이 더해진다. 이를 단적으로 말하면 반쯤 색이 칠해진 도화지라는 것이다.
시니어는 청년세대와 삶의 조건이 다르다. 그것은 경험을 했다는 것,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 사물과 세계를 보는 관점과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있다. 행복한 삶은 이러한 삶의 조건과 부합하는 삶이다. 이 조건에서 경험과 관계를 질과 깊이를 더하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다.
어떤 시니어들은 은퇴했다는 생각, 편안한 노후생활을 한다는 생각,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려는 생각에 머물러 있다. 이 생각의 바탕에는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 대한 보상, 그간 미뤄 둔 삶의 경험을 찾으려는 소망이 있다. 그러나 시니어로서의 삶의 조건에 대한 성찰을 거친 생각은 아니다. 과거와 현재에 생각이 머물러 있다.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휴식과 안정에 대한 욕망이 앞서 있다.
이러한 삶이 하나의 대안이라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유일한 대안은 아니다. 이러한 삶은 삶의 조건과 부합하지 않고 궁극적 가치로서의 행복을 실현하기에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삶을 다 마쳤을 때 행복했다고 말하려면 언제나 행복함에 대한 민감성을 의식하고, 할 수 있는 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이것은 이기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행복추구는 존재로서 자신에게 최고의 선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행복은 언제나 삶의 조건과 부합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제2의 인생을 찾는 출발점이다. 제1의 인생은 자격과 능력을 얻는 삶이다.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삶의 목표를 설정하며, 커리어를 시작하는 인생이다. 제2의 인생은 발견과 성찰을 거친 또 하나의 생이다. 시니어로서 보다 넓은 지평에서 인생을 생각해보고 진정한 가치대로 온전하게 살아가는 삶으로서 제2의 인생을 추구하는 것이다.
물론, 삶의 변화와 대안은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럼에도 모두가 동의할 만한 원칙이 있다. 그 어떤 삶이더라도 충만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득 찬 삶. 충만한 삶이란 자신의 가치대로, 바람대로 최선의 경험을 하는 삶이다. 아쉽다거나 후회된다거나, 갈등이나 부족함이 아니라 인간 존재로서 이 세계에서 자신의 바람을 실현하는 삶이다. 길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충만함이라는 목적지는 같다.
시니어에게 행복한 삶의 방향은 하나의 영역에서 벗어나 다양한 영역에서 삶을 펼치는 것이다. 그리고 축적한 지혜와 경험을 활용해서 보다 깊이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시니어는 자신 밖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자격과 역량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시니어는 의미와 가치, 공헌이 행복의 핵심 내용이 되어야 한다.
(2)에서 계속
우리는 우리가 얻는 것으로 삶을 꾸려 나간다. 우리는 우리가 주는 것을 통해 인생을 만들어 나간다.
we make a living by what we get, we make a life by what we give.
<윈스톤 처칠 Winston Churchi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