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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서희 Jan 05. 2020

무엇이 마음일까

나도 그런 아이였다


친구가 좋은 아이. 

물론 친구가 한창 좋을 나이이긴 하지만, 몇 년 전, 우리 반의 그 아이는 유독 눈에 띄었다. 자존심도 없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친구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고 조금의 무심함에도 서운해했다. 늘 친구의 반응을 살폈고 주목을 받고 싶어했다. 그 아이를 보면 그의 종종거림이 느껴져 안쓰럽기도 했지만, 때로는 왜 저럴까 화도 났다. 그건 어쩌면 그 아이에게서 나의 10대를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돌이켜 보면 나도 그렇게 종종거리는 아이였다. 친구가 좋았고 그 친구에겐 내가 몇 번째일까 궁금해했다. 친구에게 마음을 너무 많이 주었고 그만큼 서운함도 컸다. 지금 생각하면 이불킥 하고 싶은 경험도 적지 않다. 당시엔 내가 왜 이럴까, 내 마음을 돌아볼 만한 내면의 힘이 없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사는 게 바빴던, 그다지 세심하지 못했던 엄마에게 받지 못한 쓰담쓰담을 친구에게 기대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면 타고난 예민함 때문일 수도 있을 테고. 여튼 나는 학창 시절 내내 친구들만 졸졸 쫓아다녔던, 친구에게 잘 보이려 늘 애쓰는 아이였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내가 10대의 나를 보면 마치 우리 반 그 아이를 보는 것처럼 안쓰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 시간을 꿋꿋하게 견뎌낸 나는 여전히 한없이 예민하긴 하지만, 다행히 친구에게 전전긍긍하는 조급함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장 내에서 동료들과 친해지기를 원하는 마음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동료들과 너무 친하게 지내는 것도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아예 마음을 주지 않고 거리를 두고 지내면 또 한편으로는 공허해지기도 한다. 또한 누군가와 '친하다'는 게 과연 어느 정도의 선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기준도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 친구와 나눈 이야기가 마음에 남는다. 친구가 그랬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마음인 거 같다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정말 말만큼 '친하다'는 의미를 표현해주는 정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시시콜콜한 가족사를 공유할 있어야 친하다 생각할 수도 있고, 흔쾌히 돈을 빌려줄 있어야 친하다 여길 수도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편이 되어줄 있어야 비로소 친하다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사람마다 '친하다'는 기준이 아주 높을 수도, 또 반대로 아주 후할 수도 있다. 사실 나이가 들수록 이런저런 일도 많고 나만의 시간도 필요하고, 괜히 일상 가운데 마음만 분주해지기도 하기에 이럴 때 기꺼이 '내 시간'을 내어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거기에 바로 내 '마음'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비록 어마어마한 비밀(?)을 공유하지 않아도, 덥석 빌려줄 만한 큰 돈이 없어도,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겠다 감히 장담하진 못해도, 언제나 흔쾌히 그를 위해 '내 시간'을 쓸 수 있는 사이라면 아마도 평생을 만날  수 있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좋든 싫든 가족 이외의 타인들과도 관계를 맺으며 더불어 살아가야 할 존재다. 대상관계이론에서도 현재의 '나'는 많은 인간관계의 경험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하니, 우리에게 관계란 꼭 풀어야 할 숙제와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타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거리'는 내가 정하는 것이며 무엇이 '마음'인지에 대한 정의에도 정답은 없겠지만, 조금 더 행복하고 조금 더 든든한 삶을 위해서 평생 살면서 마음을 주는, 언제든 기꺼이 내 시간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관계는 꼭 필요할 것 같다.

과연 나에게 있어서 무엇이 마음인지, 또 '시간'이 마음이라면 내가 언제든 기꺼이 시간을 내어줄 수 있는  관계는 얼마나 될지 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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