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그런 아이였다
친구가 좋은 아이.
물론 친구가 한창 좋을 나이이긴 하지만, 몇 년 전, 우리 반의 그 아이는 유독 눈에 띄었다. 자존심도 없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친구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고 조금의 무심함에도 서운해했다. 늘 친구의 반응을 살폈고 주목을 받고 싶어했다. 그 아이를 보면 그의 종종거림이 느껴져 안쓰럽기도 했지만, 때로는 왜 저럴까 화도 났다. 그건 어쩌면 그 아이에게서 나의 10대를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돌이켜 보면 나도 그렇게 종종거리는 아이였다. 친구가 좋았고 그 친구에겐 내가 몇 번째일까 궁금해했다. 친구에게 마음을 너무 많이 주었고 그만큼 서운함도 컸다. 지금 생각하면 이불킥 하고 싶은 경험도 적지 않다. 당시엔 내가 왜 이럴까, 내 마음을 돌아볼 만한 내면의 힘이 없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사는 게 바빴던, 그다지 세심하지 못했던 엄마에게 받지 못한 쓰담쓰담을 친구에게 기대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면 타고난 예민함 때문일 수도 있을 테고. 여튼 나는 학창 시절 내내 친구들만 졸졸 쫓아다녔던, 친구에게 잘 보이려 늘 애쓰는 아이였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내가 10대의 나를 보면 마치 우리 반 그 아이를 보는 것처럼 안쓰럽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 시간을 꿋꿋하게 견뎌낸 나는 여전히 한없이 예민하긴 하지만, 다행히 친구에게 전전긍긍하는 조급함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장 내에서 동료들과 친해지기를 원하는 마음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동료들과 너무 친하게 지내는 것도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아예 마음을 주지 않고 거리를 두고 지내면 또 한편으로는 공허해지기도 한다. 또한 누군가와 '친하다'는 게 과연 어느 정도의 선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기준도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 친구와 나눈 이야기가 마음에 남는다. 친구가 그랬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마음인 거 같다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정말 그 말만큼 '친하다'는 의미를 잘 표현해주는 정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시시콜콜한 가족사를 다 공유할 수 있어야 친하다 생각할 수도 있고, 또 흔쾌히 큰 돈을 빌려줄 수 있어야 친하다 여길 수도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내 편이 되어줄 수 있어야 비로소 친하다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사람마다 '친하다'는 기준이 아주 높을 수도, 또 반대로 아주 후할 수도 있다. 사실 나이가 들수록 이런저런 일도 많고 나만의 시간도 필요하고, 괜히 일상 가운데 마음만 분주해지기도 하기에 이럴 때 기꺼이 '내 시간'을 내어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거기에 바로 내 '마음'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비록 어마어마한 비밀(?)을 공유하지 않아도, 덥석 빌려줄 만한 큰 돈이 없어도,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겠다 감히 장담하진 못해도, 언제나 흔쾌히 그를 위해 '내 시간'을 쓸 수 있는 사이라면 아마도 평생을 만날 수 있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좋든 싫든 가족 이외의 타인들과도 관계를 맺으며 더불어 살아가야 할 존재다. 대상관계이론에서도 현재의 '나'는 많은 인간관계의 경험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하니, 우리에게 관계란 꼭 풀어야 할 숙제와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타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거리'는 내가 정하는 것이며 무엇이 '마음'인지에 대한 정의에도 정답은 없겠지만, 조금 더 행복하고 조금 더 든든한 삶을 위해서 평생 살면서 마음을 주는, 언제든 기꺼이 내 시간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관계는 꼭 필요할 것 같다.
과연 나에게 있어서 무엇이 마음인지, 또 '시간'이 마음이라면 내가 언제든 기꺼이 시간을 내어줄 수 있는 관계는 얼마나 될지 돌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