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를 가는지보다 누구와 가는지가 나에겐 중요하다
"글쎄.... 잘 모르겠네....." (침묵)
여행하는 내내 나의 질문에 대한 A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심지어 마음이나 느낌이 아닌 단순한 팩트를 물어볼 때조차 그는 모호하게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그러다보니 대화는 늘 "글쎄... 잘 모르겠네..."로 끝나버렸고 결국 어느 순간부터 나는 질문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는 여행을 마칠 때까지 "멋지다, 맛있다, 다리 아프다, 이제 갈까?" 따위의 얕은 대화 외에는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사적인 질문을 했다가는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구라기보다는 지인에 가까운 A와 여행을 가게 된 건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여행을 가야겠다 마음을 먹고 누구랑 갈까 고민하고 있던 무렵, 오랜만에 A에게서 안부 전화가 왔고 여행을 가려고 한다는 나의 말에 A는 덥석 자기와 함께 가면 안 되겠냐고 제안을 했다. 비록 A와 친하진 않았지만 평소 인간적인 호감을 갖고 있었던 데다가 마침 A는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의 전문가였기에 이 기회에 A와 친해지고 그 분야의 노하우도 배울 수 있겠다는 기대감도 여행 동행을 선뜻 결정하게 된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나의 순진한 기대였다. A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낯을 가렸고 마음을 나누는 데 인색했다.
여행 중반쯤 참다 못한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왜 너는 모든 질문에 "글쎄... 잘 모르겠네...."라고만 대답하냐고. 그럼 거기에서 모든 대화가 끝나버리는 거 아니냐고. 사실 나는 한참 망설이다가 물어보았던 건데, 의외로 그는 그런 질문에 익숙한 듯 대답했다. 너 뿐 아니라 자기 친구들도 다 그런 얘기를 한다고,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어서 그렇게 대답하는 것뿐이니 그냥 그러려니 생각해달라고 무심하게 말했다.
마음 먹고 시작했던 대화는 그렇게 싱겁게 끝나버렸고 이후에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건, A는 나에게 끊임없이 사적인 질문을 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친한 사이에도 잘 묻지 않는, 아주 내밀한 사적인 질문도 거침없이 했고 워낙 내 얘기 하는 걸 좋아하는 나는 그때마다 기꺼이 내 삶과 내 마음을 오픈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일방적인 마음 나눔의 역학 관계를 깨닫게 되면서부터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낯을 가리고 거리를 두는 내성적인 성격이 왜 자신에게만 적용되고 상대방에겐 이토록 거침이 없나 억울했다.
결국 나 역시도 점차 마음을 덜 오픈하게 되었고(사실 난 오픈하지 않는 게 더 어려운 사람인데 말이다.;;;;) 여행은 건조하게 끝이 났다. 짧지 않은 여행 기간이었지만, 나는 A와 전혀 친해지지 못했고 전문가로서의 A의 노하우 또한 조금도 배우지 못했다. 마음을 나누는 데 인색했던 A에게는 익숙한 패턴이었을지 몰라도 나에겐 꽤 낯선 경험이었고 쉽지 않은 여행이었다. 나는 A였기 때문에 함께 여행을 결정했지만, 어쩌면 A는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 때문에 마침 여행을 가려고 했던 나를 동행으로 삼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좀 슬퍼졌다.
돌이켜 보니 아주 오래 전에도 딱 한 번 그런 경험이 있었다. 그때도 A의 경우처럼 우연한 기회에 그리 친하지 않은 B와 여행을 함께 하게 되었다. 이미 오래 전 일이라 자세한 건 기억나지 않지만, 몇몇 에피소드는 지금 떠올려봐도 낯설다.
밥을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물었더랬다. 넌 꿈이 뭐냐고. 나의 호기심 가득한 질문에 B는 차갑게 대답했다. 그런 걸 왜 묻냐고, 내가 그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냐고 말이다. 당황하고 무안했던 나는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를 했고 이후에도 그런 상황에 몇 차례 반복되면서 그 여행 역시 건조한 대화만으로 채워졌던 기억이다.
생각해보면 그 때 결심했었던 것 같다. 앞으로는 친하지 않은 사람, 잘 모르는 사람과는 여행가지 말아야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그 결심이 잊혀질 때쯤 또 다시 이런 실수를 반복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혼자 여행은 하지 않고,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가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나에게 여행 동행자란 단순한 동행자 그 이상이란 생각이 든다. 하루 24시간 함께 있는데, 늘 "맛있다, 멋있다, 여기 갈까?"만 반복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사실 여행하는 스타일은 달라도 괜찮았다. 도시를 좋아하든지, 자연을 좋아하든지, 계획에 따라 바쁘게 찍고 찍고 다니든지, 계획 없이 느긋하게 다니든지, 맛집을 찾아다니든지, 지나가다 아무데서나 먹는 걸 좋아하든지, 그런 것들은 과하게 고집하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서로 맞춰갈 수 있는 문제였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함께 같은 곳을 여행하며 서로 지나온 삶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취향을 나누는 시간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 A와 B의 잘못은 아니다. 그저 관계를 맺는 방식이 나와 다를 뿐, 그들 역시 각자의 목적대로 여행을 하는 것일 테다.
기대했던 A와의 여행이 씁쓸함으로 끝나면서 나는 또 한번 오래 전 다짐했던 결심을 되새겼다. 앞으로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서로에게의 다정한 침범을 기쁘게 허용할 수 있는 친구와만 여행을 가야겠다는 결심 말이다. 그도 아니면 차라리 나의 마음을 돌아볼 수 있는 혼행을 조금씩 연습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나의 여행하는 방식과 이유가 결코 정답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와 답이 같은 친구와 여행을 해야 그 여행이 비로소 진정한 힐링과 릴렉스의 시간이 되어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