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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서희 Oct 30. 2020

내 마음의 팩트 체크

지금 내 감정의 강도는 적절한가


사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따지듯이 따박따박 짚고 갈 일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이 다소 매끄럽지 못해서 말의 앞뒤가 맞지 않았을 뿐인데, 그걸 어렴풋이 알면서도 난 좋은 게 좋은 거다 그냥 넘기지 못했다. 그가 앞뒤가 맞지 않는 설명을 되풀이할수록 나는 점점 화가 났고 아까 한 말과 다르니 절차를 명확하게 알려달라고 다그쳤다. 그렇게 한참을 실랑이하다 결론 없이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언성을 높이거나 갈등 상황까지 이어진 건 아니었지만 썩 기분 좋은 대화가 아니었던 건 분명하다.


시간이 한 템포 지나니 내가 그때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궁금해졌다. 그가 나를 공격한 것도 아니었고 내 감정을 상하게 할 만한 일도 없었는데, 난 왜 기어이 그의 매끄럽지 못한 업무 처리를 지적하고 싶었을까 의아했다.




이럴 때 가장 도움이 되는 건 역시 팩트 체크.

변증법적 인지행동치료인 DBT의 여러 기술 중에서 나의 일상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팩트 체크이다. 팩트 체크란 말 그대로 이 일에 이런 감정을 이 정도 강도로 느끼는 게 적절한지를 체크해보는 과정을 의미한다.


먼저 1단계는 내 감정을 제대로 인식하고 이름을 붙여보는 것이다.

체크해 보니 나는 당시에 20 정도의 강도로 ‘화’가 났던 것 같다.


2단계에서는 무엇이 이 감정을 촉발했는지, 스스로 관찰한 내용을 사실대로, 판단이나 해석 없이 적어보는 것. 당시의 상황과 오갔던 말들을 복기하며 차분히 적어보았다.


3단계는 2단계에 적은 사실에 대한 나의 해석과 예측 가능한 해석들을 적어보는 작업으로, 난 그가 자신이 틀린 걸 알면서도 계속 변명을 한다고 생각했다. 또 나의 지적을 인정하기 싫어서 계속 자신이 옳음을 주장한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나의 이런 해석과 달리 어쩌면 그는 자신의 업무 처리 절차가 맞는데, 내가 괜히 딴지를 건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또 실제로 절차가 맞았지만, 단지 그가 그걸 말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오류가 발생했을 수도 있다.


4단계는 2단계의 사실로 예상되는 결과를 적어보는 것이다.

만약 계속 실랑이를 이어갔다면 결국 언성이 높아졌을 것이다. 그와 나 모두 마음이 상해서 관계가 어긋났을 것도 같다. 내가 끝까지 따지고 들어 기어이 그에게서 자신의 일처리가 미흡했다는 사과를 받아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나는 그 일로 인해 한참 동안 마음이 불편했을 게 분명하다.


이 중에서 최악의 상황과 이에 대해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적어보는 것이 다음 단계이다. 아마도 나로서는 그와의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이 가장 최악의 상황이 될 것 같다.      


마지막 5단계는 내가 느낀 감정이 상황에 맞는 것인지 체크해본 뒤, 1단계에 적은 감정의 강도에 변화가 있는지 관찰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난 상대방이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변명을 거듭하는 상황을 유독 참지 못하고 그걸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듯하다. 그냥 그의 그런 마음을 인정해주고 적당히 넘어가면 되는데 그러지 못하는 건 결국 나의 문제인 것이었다. 그러니 당시에 내가 느낀 감정인 ‘강도 20의 화’는 상황에 맞지 않은 것까진 아니어도 강도 20이 아닌 2 정도가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팩트 체크 덕분에 나의 감정은 다시 평온해졌고 나의 기질을 다시 한번 점검해볼 수 있었다.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거나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 사람 앞에서 나도 모르게 반감이 올라오면서 반박하고 지적하고 싶어지는 나의 기질은 타고난 것이니 그런 감정이나 생각 자체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과 감정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건 반드시 주의해야 할 일이다. 또한 이를 거르지 않고 표현하거나 이런 감정이 화나 짜증, 상대방에 대한 공격 등의 표현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은 생각일 뿐, 사실이 아니므로 내 생각을 옳다고 믿는 것이 가장 위험한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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