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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서희 Oct 26. 2020

나는 왜 뒤늦게야 화가 날까

분노를 표현하는 방법과 대처 방식에 대하여


얼마 전, J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그가 다소 공격적인 질문을 던졌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당황한 나는 버벅거리면서 겨우 대답했다. 그런데 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연거푸 날카롭게 질문을 던졌고 나는 거의 멘붕 상태로 마치 변명처럼 대답을 이어가기에 바빴다. 그의 질문은 분명히 다소 의도적이었고 공격적이었지만, 그걸 알아챌 겨를조차 없을 만큼 나는 당황했다.


그와 헤어져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야 비로소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 사안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문제가 아니었는데, 왜 나에게 몰아치듯 공격적인 질문을 한 것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물론 그가 나를 비난하려는 의도를 갖고 일부러 그런 질문을 했다고까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태도는 나로 하여금 비난받았다고 느끼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한편으로는 ‘왜 나는 그 당시에는 마음이 상한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나를 방어하기에 급급했다가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뒤늦게 화가 올라오는 걸까' 속상했다. 만약 그 순간에 내가 화가 났다는 것을 잘 알아차리고 이를 건강한 방식으로 잘 표현했더라면 그도 나를 좀 더 존중해주었을지도 모르는데, 난 당황한 나머지 내 감정을, 내 분노를 알아차릴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는 평소에도 ‘분노'의 감정이 올라왔을 때 그걸 잘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상황이 종료되고 나서야 뒤늦게 화가 나곤 했다. 그러다 보니 그 분노가 적절히 표현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뒷북처럼 분노를 표현하는 건 뜬금없기도 하고 갈등을 초래할 수 있으니 그냥 표현하지 못한 채 참고 넘기는 것이다. 특히 성격이 강하고 말투가 직선적인 사람들 앞에서는 분노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차리거나 표현하는 데 유독 서툰 편이다. 


얼마 전, 친구 K가 나에게 하소연하듯 이야기를 꺼냈다. 직장 동료인 P 때문에 화가 많이 났다는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K 말대로 P가 큰 실수를 했고 그 상황에서는 K가 충분히 화가 날 만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였어도 화가 났을 거 같다며 위로를 했더니 K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괜찮아. 난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더라고. 나 자신이 놀라울 정도로 말이야. 전혀 화가 나지도 않았고 그냥 ‘저 사람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구나' 싶더라니까. 하하~”


K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니 오히려 위로해준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다고 쿨하게 말했던 K는 그 후로도 헤어질 때까지 내내 P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고 K의 표정은 P에 대한 분노로 가득했다. 

그는 분노의 감정이 올라왔을 때 이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않고 ‘거리두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 감정이 마치 자신의 감정이 아닌 것처럼 저만치 놓아두고 애써 모른 척하고 싶은, 일종의 방어인 셈이다. 즉, 자신의 감정을 직면하기보다는 이를 보려 하지 않고 계속 ‘나는 괜찮다'를 되뇌는 것이다. 물론 때로는 그러다가 정말로 자신이 그 정도 일로는 분노하지 않았다고 믿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거리두기를 한다고 해서 분노라는 감정이 저절로 사라지는 게 아니기에 나중에 그와 유사한 자극이 왔을 때, 이전의 그 미해결된 분노 감정이 복합적으로 튀어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때는 분노의 감정이 이전보다 더 크고 과도하게 표현될 수도 있기 때문에 상대방은 당황하게 된다.


이처럼 사람들이 분노에 대처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자신을 분노케 한 사람에게 분노가 풀릴 때까지 화를 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뒤에서 그를 골탕 먹이거나 뒷담화를 하는 걸로 분노를 풀기도 한다. 또 애꿎은 제3자에게 화풀이를 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어떻게든 건수를 잡아 카드사나 통신사 등에 전화해서 상담원에게 한바탕 퍼붓는 사람도 있단다.

모든 게 내 탓이고 내가 못나서 그렇다 생각하고 자책하면서 우울에 빠지는 사람도 제법 많다. 사실 우리나라는 집단주의 문화가 강하기 때문에 화를 과도하게 표출하기보다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참고 넘기는 게 착하고 좋은 거라며 은근히 참기를 강요하기도 한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홧병이라는 단어가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분노를 억제하는 것이 과도한 분노 표출보다 오히려 더 나쁜 영향을 줄 수 있기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연구에 따르면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초반에는 분노를 과도하게 표현하는 사람이 대인관계 손상을 더 많이 경험하는 듯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결국 대인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건 분노를 과도하게 억제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분노의 감정이 올라왔을 때 이를 지나치게 감추거나 피하지 않고, 반대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 없이 날 것 그대로의 분노를 쏟아내지도 않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감정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통찰하여 이를 건강한 방법으로 잘 표현하는 지혜가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왜 분노했는지, 내가 그 분노 속에서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게 선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분노가 짜증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늘 자신을 점검해야 하는 건 기본. 

분노해야 할 사안에 대해서는 건강하게 분노함이 마땅하겠으나, 분노를 잘 통제하고 분노가 습관처럼 반복되지 않도록 늘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일이다. 


분노를 잘 알아차리고 잘 조절하고 잘 표현하는 것, 내 평생의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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