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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서희 Sep 06. 2021

여행작가라는 부캐

부캐가 만들어준 삶의 에너지


책을 써야겠어!!

대체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홍콩에서 돌아온지 3~4년쯤 지난 터라 홍콩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이 최고조에 달해 있어서 제대로 된 홍콩 정보를 정리해서 알리고 싶다는 어쭙잖은 의욕이 발동했던 걸까. 아니면 서점에서 찾아본 몇몇 홍콩 가이드북보다 내가 더 잘 쓸 수 있다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불타올랐던 걸까. 그도 아니면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 뭔가 기발한 전환점이 간절했던 걸까.

무튼, 어느날 갑자기 홍콩 여행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은 그저 꿈으로만 그치지 않고 빨리 움직이라고 내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책을 낼 수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이야 출판사마다 투고할 수 있는 창구가 공식화되어 있고 책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도 꽤 많으며 또 SNS를 통해 나를 PR할 수 있는 방법도 적지 않지만, 2004년 당시에는 그런 게 일반화되어 있지 않았다(물론 당시에도 있었을지 모르나, 난 그쪽 분야와는 전혀 친하지 않아서 알 도리가 없었다). 결국 별볼일 없는 온갖 인맥을 다 동원하여 출판서에 기획서를 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또 찾았다.

다행히 운좋게도 랜덤하우스에서 기획서를 한 번 내보라는 응답을 받았다. 지금은 책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이런 로또같은 운을 기대할 순 없겠지만, 당시만 해도 나처럼 무모하게(?) 덤비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이런 기회라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홍콩에서 살았던 경험과 중국 문화에 대한 모든 지식(참고로 난 중문과 전공이다)을 총동원하여 최선을 다해 출간 기획서를 썼다. 홍콩 친구들에게도 SOS를 보내 소소한 자료들까지 꼼꼼하게 참고했다.

나의 간절함과 열정이 편집자에게 잘 전해졌던 것일까. 책 낸 경험 없는 초짜 아마추어의 기획서는 거짓말처럼 채택되었고 그로부터 만 1년 뒤, 드디어 나의 첫 책이 세상에 나왔다.

       


(좌) 초판(2005~2010)   (우) 전면 개정판(2010~2017)


베스트셀러가 된 거야?

꼬박 1년 여의 시간 동안 나는 퇴근 후의 시간과 주말, 그리고 방학을 오롯이 책 쓰기에 바쳤다. 내가 글쓰기를 이렇게까지 좋아했었나?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질 만큼 글쓰기는 재미있었다. 하루 12시간 동안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책상 앞에 앉아 밥 먹는 시간조차 아까워하며 글을 썼지만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뭔가를 이렇게 좋아하며 몰입해본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였다.

  

2005년 7월 11일. 드디어 나의 첫 책인 '아이 러브 홍콩'이 세상에 나왔다.

처음 책이 나왔을 때의 감동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거의 주말마다 서점에 가서 형광색 커버의 내 책이 잘 누워있는지, 사람들이 내 책을 얼마나 보고 있는지 한참을 지켜보곤 했다.

'라떼는 말이야'이긴 하지만, 당시만 해도 여행 정보책은 "세계를 간다, 자신만만" 등의 건조한 정통 가이드북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랜덤하우스에서 처음으로 말랑말랑한 에세이 스타일의 여행서인 "아이 러브" 시리즈를 내놓았고, 첫 책인 "아이 러브 뉴욕"에 이어 "아이 러브 도쿄"까지 연타로 대박이 났더랬다. 그리고 세 번째 나온 책이 바로 "아이 러브 홍콩"이었다.

기획서가 채택된 것도 운이 따라준 일이었지만, "아이 러브" 시리즈 책을 쓰게 된 것 또한 나에겐 엄청난 행운이었다. 첫 책이었는데, 교보문고 실용분야 베스트셀러 10위에까지 올랐으니까(지금 같았으면 당연히 인증샷을 찍어놓았을 텐데, 당시엔 왜 그런 생각도 못했을까... 사진이 없는 게 아쉽기만 하다).

무튼, "아이 러브 홍콩"은 2005년 7월에 초판을 찍은 뒤, 매년 개정을 거듭했고 2010년에 표지까지 싹 바꾼 전면 개정판을 출시하고도 한참을 버티다가(?) 2017년쯤 최종 절판 처리를 했으니 무려 10년이 넘도록 장수한 책이 되었다.

이처럼 운좋게도 첫 책이 소위 대박을 내준 덕분에 나에겐 교사만큼이나 소중한 부캐가 생겼다.

바로 여행작가라는 직업 말이다.   




1쇄로 끝난 두 권의 책


부캐가 견인하는 삶

안타깝게도 첫 책이 대박난 행운이 연달아 계속 이어지진 않았다.

물론 첫 책 덕분에 기회는 꾸준히 찾아왔다. 첫 책을 낸지 1년이 채 안 되어 랜덤하우스에서 "금요일에 떠나는 베이징"을 썼고, 중앙북스로 간 편집자님을 따라 중앙북스에서 "홍콩 쇼핑 산책"이란 책도 연이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두 권 모두 2쇄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1쇄로 삶을 마감해야 했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썼고 남들이 모르는 알짜배기 팁을 꼼꼼하게 정리했다고 자신했지만, 책이란 건 열심히 썼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진 않았다. 책의 컨텐츠 외에 기획도, 구성도, 출간 시기도, 마케팅도 모든 조건이 다 맞아떨어져야 비로소 2쇄를 찍을 수 있는 것이었다.

비록 나에겐 아픈 손가락 같은 두 권의 책이지만, 그럼에도 돌이켜보면 이 책을 쓰는 시간 덕분에 나는 중국어 교사로서도 행복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여행작가라는 부캐 없이 오로지 교사로서만 살았다면 지루한 걸 못 참는 내 성향상 아마 10년이 채 안 되어 매너리즘에 빠져 심각하게 다른 직업을 고민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심심해"를 입에 달고 살면서 열정 없는 교사로 하루하루 그럭저럭 살아갔을지도 모르지만, 책을 쓰는 부캐 덕분에 나는 삶의 에너지를 잃지 않을 수 있었고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소통할 수 있었으며 오히려 교사라는 직업을 더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여행작가라는 부캐로부터 받은 에너지를 아이들에게 주었던 셈이다.




또 하나의 글쓰기, 블로거라는 부캐

첫 책 출간 후, 뒤늦게 시작한 블로그 역시 나에겐 "쓰는 삶"을 유지하게 해준 소중한 놀이터가 되었다. 블로그 덕분에 책을 쓰지 않을 때도 꾸준히 글을 쓸 수 있었고 또 짐작컨대 책의 판매에도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10년 넘도록 이어온 소중한 인연들을 만나게 된 것 또한 초창기 블로거들만이 누릴 수 있는 감사한 혜택이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블로그가 점차 광고의 장이 되어가고 있으며 호흡 짧은 다른 sns나 유튜브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블로그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래왔듯이 지금도 여전히 나에게 가장 즐거운 놀이터이자 글쓰기 훈련장이 되어주고 있다. 이제는 브런치가 그 자리를 조금씩 대신하고 있지만, 언젠가 책을 더 이상 쓰지 못할 때가 온다 해도 블로그와 브런치만큼은 나만의 포트폴리오가 되어주리라 기대한다. 여행작가와 마찬가지로 블로거로서의 부캐 또한 내가 교사로서의 정체성과 열정을 잃지 않게 해준 고마운 존재이니 말이다.


        



쓰는 삶은 계속된다


계속 쓰는 삶. 그러나....

지금까지도 글을 쓰는 삶은 이어지고 있다.

기초중국어 회화책도 썼고, "아이 러브 홍콩"에 이은 나의 최대 베스트셀러인 "디스 이즈 타이완"도 여전히 잘 살아있으며(?), 세 번째 홍콩책도 출간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코로나 상황이 길어지면서 서점의 여행 매대는 사라졌고 해외여행은 멈췄으며 내가 사랑하는 대만과 홍콩도 문을 굳게 걸어잠근 상태라 나의 책들도 긴 잠에 빠져있긴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잠에서 깨어날 거라 믿고 있다. 그날이 되면 다시 날개를 펼쳐 높이 날아올라주기를....


그러고 보니 여행작가의 부캐를 갖고 살아온지 올해로 만 15년이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새 책을 내지 못한지 벌써 2년이나 되었지만, 2년 전까진 거의 매년 새 책을 내거나 개정판을 준비하며 15년의 시간을 신나게 달려온 것 같다.




다시 시작된 호기심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나의 못말리는 호기심.

그렇게 여행작가와 교사로 멈출 줄 알았던 나의 호기심은 내가 만 40세가 되던 해에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교사로도 어느 정도 경력이 쌓였고 여행작가로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무렵 또 다시 새로운 삶이 궁금해진 것이었다. 나이의 앞자리가 3에서 4로 바뀌었으니 뭔가 또 새로운 궁리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의 호기심은 바로 심.리.학....이었다.

고등학교 때 막연히 심리학과를 가고 싶었지만, "심리학과 가서 뭐할래?"라고 되묻던 부모님과 담임 선생님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는데, 무려 40세가 되어 문득 생각난 것이었다.

어릴 적 잠시 품었던 그 막연한 호기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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