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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인 Jan 21. 2021

보드카 마티니 스트레이트로, 아주 드라이하게.

넷플릭스 <그레이스 앤 프랭키>와 보드카 마티니

마티니는 남자의 술이다? 누구 맘대로?

"마티니"로 검색하면, 대체로 "남자의 술"이라는 닉네임이 주로 붙어있다. 대체 남자의 술이란 건 무엇인가. 담백한 비주얼과 드라이한 맛이 지배적인 술에는 남성의 성별이 붙여지고, 화려한 비주얼과 달달한 맛이 지배적인 술엔 여성의 성별이 붙여지는 듯하다. 거기에 더불어 대표적인 "마초 남성" 캐릭터인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가 늘 마티니를 마셨으니까 더더욱 남성성이 부여됐다.


"바에 가서 바텐더의 실력을 보고 싶거든, 마티니를 주문해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마티니는 바텐더 실력의 척도가 되는 술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마티니는 "칵테일의 왕"이라는 닉네임이 있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술이라 그런가 보다. (하지만 왜, "칵테일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맨해튼은 동일하게 바텐더 실력을 볼 수 있는 술로 통용되지 않을까? 둘 다 동일하게 왕인데 말이지.)


남자의 술이라고 불리든 말든, 많은 여성들이 이 멋진 칵테일을 즐길 줄 안다. 미디어에서도 여성 캐릭터들이 마티니를 마시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그녀들이 마티니를 마시는 모습은 어쩐지 더 멋있었다. 여성 캐릭터가 마티니 잔을 들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세련된 어른의 느낌이 물씬 풍긴달까. 그런 장면을 보면 제임스 본드의 기름진 눈빛은 금새 잊힌다. 많은 여성 캐릭터 중에서도 "찐어른"인 넷플릭스 시리즈 <그레이스 앤 프랭키>의 그레이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여성, 그레이스

그녀는 남성의 술이라고 불리는 이 마티니의 엄청난 애호가이다. 그것도 진과 베르무트를 넣은 마티니가 아니라 보드카 마티니를 선호한다. 그레이스라는 캐릭터부터 설명하자면, '세이 그레이스'라는 뷰티 비즈니스를 이끌다가 딸에게 넘겨주고 쉬고 있던 여성이다. 그러다가 남편이 남성 동업자와 바람이 나서 커밍아웃과 이혼을 통보받게 되고, 남편과 바람난 남성 동업자의 아내인 프랭키와 같이 살게 된다.


1화에서 그레이스의 마티니 취향이 나오는데, 그녀는 레스토랑에서 이렇게 주문한다. "보드카 마티니 스트레이트로, 아주 드라이하게. 그리고 올리브 2개도요."

ⓒ 넷플릭스 <그레이스 앤 프랭키> 시즌1-1

주문한 마티니를 한두 잔 홀짝였을 때, 남편과 바람난 그의 동업자는 커밍아웃과 이혼 통보를 한다. 예의도 없지. 아직 마티니에 담긴 올리브를 맛보기도 전에 그런 통보를 해버린다. 식사 자리는 아주 엉망이 되었고, 그레이스는 혼란에 휩싸인다. 만약 내가 그레이스였다면, 그날의 모든 것들을 증오하기 시작했을 거다. 나와 몇십 년을 살던 남편이 알고 봤더니 게이였고, 게다가 바람까지 피우고 있었다니. 식사하던 레스토랑은 물론이고, 그때 먹은 음식, 음료 모두 두 번 다시는 쳐다도 보기 싫어할 거다. 전 애인과 갔던 장소들을 우연히 가게 될 때, 기분이 더러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그레이스는 이 사건 이후에도 계속 보드카 마티니를 즐겨 마신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취향을,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게 이 사건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실제로 그녀는 매우 단단한 사람이다. 그녀는 남편의 보호 안에서만 사는 것이 싫어서 그녀만의 비즈니스를 꾸리고, 심지어 성공으로 이끌었다. 사업에서 물러난 후에도 노인용 바이브레이터의 시장성을 빠르게 캐치하고는, 또 새로운 사업을 거침없이 시작하는 사람이다. 투자사에 가서 투자를 요청하고, 상품을 베낀 회사에 가서 협상을 시도할 정도로 커리어적으로 굳세다.


그리고 자신의 사업적 지혜를 다른 여성들에게도 나눠 주고 싶어 하는데, 우연히 알게 된 구직자 여성에게도 열성적으로 코치해주기도 하고, 모호한 사업 아이템을 구상 중인 젊은 여성에게도 세부적인 코칭을 해준다. 두 경우 모두 그레이스가 상대에게 실수를 했는데,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리고는 바로 사과를 한다. 모두 알겠지만, 단단한 사람만이 자신의 결점을 인정할 수 있는 법이다. 그레이스가 이렇게 할 수 있던 것은 그레이스의 모토가 '업그레이드된 그레이스가 되자'일 정도로 성장에 대한 욕구가 강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고여있기를 거부하며, 몰랐던 것을 배워가는 것에 적극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실수도 쿨하고, 깔끔하게 수습한다.



친구 덕분에 솔직해지기 시작한 그레이스 

하지만 매사에 단단한 건 아니고, 그녀 역시 이혼, 사랑 등에 감정적으로 흔들리곤 한다. 그때마다 그녀의 옆에는 프랭키라는 친구가 있고, 서로의 지지자와 가족이 되어 서로를 붙잡아준다. 대표적인 장면으로는 시즌2의 2화가 있는데, 전남편이 쓰러지는 바람에 그가 새 남편과 사는 집에 와서 짐을 챙겨주다가 울적해진 그레이스를 프랭키가 위로해주는 장면이다.

ⓒ 넷플릭스 <그레이스 앤 프랭키> 시즌2-2화

자신과 살 때와는 사뭇 달라진 가구 배치를 유심히 보다가, 전남편이 그의 파트너와 거실에서 다정히 붙어있기 위해 가구 배치를 바꾼 것을 깨닫고 '나와는 그러지 않았는데....'하고 슬퍼한다. 그때 프랭키가 마티니를 건네고, 살면서 소원을 빌어본 적이 없다는 그레이스에게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묻는다. 그러자 그레이스는 사실은 전남편의 짐을 날라주기 싫다고 고백하고, 프랭키는 그럼 그러자! 하고 다른 친구를 불러 짐을 전해주고, 둘이 타코를 먹으러 가기로 한다. 덕분에 신난 그레이스는 전남편의 결혼 선물로 들어온 블렌더 하나를 들고 튀기까지 한다.


이들의 관계는 대체로 이렇다. 그레이스는 감정을 드러내기 어려워하는 캐릭터이고, 가끔은 감정이 꼬여서 본인조차 그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때마다 자유로운 영혼의 프랭키가 옆에서 위로하기도 하고, 자극하기도 하면서 그레이스는 점차 자신이 감정적으로 원하는 것도 무엇인지 알아차린다. 마음이 강하게 끌렸던 옛사랑을 다시 찾아가 보도록 부추기고(끝은 좋지 않았다만), 새롭게 찾아온 사랑에 주저하는 그레이스에게 이제는 좀 솔직해지라며 용기를 주기도 한다. 그 덕에 그레이스는 그동안 본인이 무시해왔던 감정을 하나씩 알아차리고, 한결 더 솔직한 사람이 되어간다.



나이 들어도 사랑은 어려워

그레이스는 이혼 후에 몇 차례의 사랑을 만나고, 극에서도 이를 비중 있게 다룬다. 사랑 이야기가 뻔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극에서의 사랑 이야기는 제법 재밌게 봤다. 사랑만이 이 극의 주제였다면 재미없었겠지만, 그레이스라는 사람이 성장해나가는 과정 중 하나로 다뤄져 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심지어 성숙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고, 실수하고, 찌질하게 울기도 하고, 붙잡기도 하는 일련의 과정을 볼 수 있어서 더 그랬다. 그런 과정이 다 나와서 그레이스가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쳐서 사랑하는 법과 사랑받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고 느껴졌다.

ⓒ 넷플릭스 <그레이스 앤 프랭키> 시즌2-8화

마음을 흔들었던 옛사랑을 다시 만나서 오랜만에 설렌 마음을 느끼는 그레이스. 하지만 곧 그가 여전히 결혼한 상태라는 사실과 그의 아내가 알츠하이머를 앓게 되어 이혼하지 못했다는 그의 해명까지 듣게 된다. 이 사실은 들은 직후에는 그레이스가 이성적으로 둘의 관계를 끊어낸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레이스가 현명하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충동적으로 자버린다. 잔 직후에 어쩌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그의 아내를 만나고, 현타가 온 그레이스는 그제야 그 관계를 끊어낸다. 그리고는 또다시 보드카 마티니를 진탕 마시며 망가진다. 이렇게...

ⓒ 넷플릭스 <그레이스 앤 프랭키> 시즌2-11화


시즌 후반으로 가면 사업을 하다가 적으로 만났던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와 만남에서도 마티니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 남자가 그레이스에게 반해서 들이대고 있고, 데이트 한 번만 해달라며 애원하고 있는 장면이다.

ⓒ 넷플릭스 <그레이스 앤 프랭키> 시즌3-13화

이때 그는 그녀가 했던 뷰티 비즈니스가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음을 언급하며 사업가인 그녀가 딱 좋아할 법한 멘트를 날린다. 그레이스는 '요놈 봐라?' 하는 반응을 보였고, 이윽고 데이트에 응한다. 그녀 또한 그에게 끌리지만, 나이가 한참 어린 그를 부담스러워하며 데이트 이후에도 끊임없이 밀어낸다. 하지만 결국엔 자신의 진짜 모습을 하나둘씩 보여줄 수 있게 되면서(주름, 아픈 무릎 등) 사랑받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여성 노인의 성장물

이 글을 쓰기 위해 <그레이스 앤 프랭키>에서의 그레이스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 작품이 그레이스의 성장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년기의 인생 과업은 삶을 회고하고, 정리하는 거라고 하던데, 그레이스의 노년기는 여전히 진취적이다. 커리어, 이혼, 우정, 데이트, 사랑, 재혼 등의 굵직한 사건을 겪으면서 절망 또는 후회를 하기도 하고, 그를 통해 조금씩 성장해 나가기 때문에. 여성 노인의 성장물이라니, 익숙하지 않은 단어의 조합임은 틀림없지만, 현실에도 그레이스처럼 하루하루 성장해나가는 여성 노인은 분명 존재한다. 우리의 렌즈가 그들을 비추지 않았기 때문에 몰랐을 뿐이지. 그런 점에서 <그레이스 앤 프랭키>와 같은 콘텐츠는 소중하다. 여성 노인의 노년기를 다룬 콘텐츠 중에 이렇게 다양한 소재를 다룬 게 있을까? 아마 없다고 본다. 게다가 삶의 과정에서 절망하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하고, 성장하기도 하는 입체적인 여성 노인 캐릭터를 전면에 세우는 콘텐츠는 더더욱 없고 말이다.


본인처럼 쿨하고, 깔끔해 보이는 보드카 마티니를 홀짝이는 그레이스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취향의 술을 우아하게 마시고, 인생의 동반자 같은 친구도 있고, 커리어적 욕망도 채우고, 사랑할 줄도 아는 어른이 되고 싶다. 그레이스를 들여다보면서 내 노년의 한 장면을 상상해보게 된 것은 생각 밖의 재미였는데, 얼마 전에 본 영국의 106살 할머니에 대한 기사가 떠올랐다. 코로나 19 양성이었다가 말끔하게 완치되어 106번째 생일파티를 하는데, 장수 비결로 "우유와 밤마다 마시는 위스키 한 잔이다."라고 답했고, 이어서 "완치가 되고 상태가 정말 괜찮아졌다. 아무것도 날 막을 수 없다."라고 답했다. 이거다. 술을 즐길 수 있고, 위트도 갖춘 할머니로 늙고 싶다.



나로 존재하기

잠시 내 상상의 세계로 빠졌지만,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그레이스에게 보드카 마티니는 무슨 의미일까?'라는 질문을 갖고 이 글을 썼다. 많은 술 중에서도 왜 그레이스가 보드카 마티니를 좋아하는지는 모른다. 사실 좋아하는 이유는 상관없다. 다만, 그레이스가 자신을 지키고, 가끔 실수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일어서서 성장시키고자 하는 모든 순간에 이 보드카 마티니가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보드카 마티니는 그레이스의 그런 순간들을, 자신의 삶을 이끌고 온 "그레이스의 고유함"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건 그레이스의 딸들이 술 마시는 장면에서 힌트를 얻었는데,

ⓒ 넷플릭스 <그레이스 앤 프랭키> 시즌3-5화

둘째 딸인 말로리가  보드카 마티니와 보드카를 번갈아 마시자, 첫째 딸인 브리아나가 네가 웬일로 "그레이스 핸슨"을 마시냐고 놀란다. 처음에 "그레이스 핸슨"이라는 이름의 칵테일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레이스가 자주 마시는 조합이라 저렇게 대명사처럼 그레이스의 풀네임을 부르는 거였다. 인생이라는 혼란 속에서도 본인의 고유함을 잃지 않고 단단히 중심을 잡고 서 있는 그레이스처럼 보드카 마티니도 그레이스의 삶 속에 늘 있었기에 가능한 대명사가 아닐까. 그레이스는 자신만의 고유함, 시그니처를 갖고 있다는 걸 본인도 알고 있고, 지킬 줄 아는 그런 여성이다.


온전한 나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 그레이스를 떠올리며 보드카 마티니를 주문해보자.

"보드카 마티니 스트레이트로, 아주 드라이하게. 올리브 2개도."

라고 끝맺으려고 했지만, 글의 본질을 흐릴 뻔했다. 그레이스를 따라 시키지 말고, 내 취향의 술을 자세히 주문해보자. 베이스가 되는 술이라든지, 얼음을 넣을지 말 지라든지, 어떤 향을 더 넣어달라고 할지까지 정해서 구체적으로 말이다. 아직 내 취향의 술이 뭔지 모른다면, 일단 많이 마셔보자. 그중 좋아하는 맛과 향을 하나씩 고르고, "올리브 2개"와 같은 킥을 하나 추가하면 나만의 근사한 시그니처 술이 되지 않을까? 유일무이한 내 삶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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