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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인 Feb 02. 2021

그렇게 좋은 위스키도 아니라 잔에 따르기엔 좀 그래요.

넷플릭스 <제시카 존스>와 위스키

위스키 하면 멋진 바에서 예쁜 잔을 우아하게 들고, 향을 깊게 들이마시고, 맛을 음미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성공한 어른의 모습이랄까. 또는 남성 중심의 범죄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룸살롱에서 로얄 살루트를 마시는 장면이나 화나면 병이나 잔을 던져 깨부수는 장면이 꼭 등장해야 한다는 국룰이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하여튼 위스키 하면 막연히 고가의 술이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모든 위스키가 고가인 것은 아니고, 편의점에서도 비교적 저렴하게(10만 원 이하) 구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블렌디드 위스키인 제임슨, 조니워크 레드, 시바스 리갈 등도 있고, 버번위스키인 짐빔, 잭 다니엘 등이 대표적이다. 나 역시 10만 원 이하의 위스키를 좋아하는데, 가성비가 넘치기 때문이다.(그중 버번위스키인 와일드 터키 101을 선호한다.) 조금씩 먹으니까 오랫동안 보관하며 마실 수 있다는 것도 가성비가 좋지만, 조금만 마셔도 빠르게 취기가 오른다는 것도 가성비의 중요한 부분이다. 배가 부르지 않게, 짧은 시간 안에 취할 수 있어서 효율적인 술이다.



스스로를 원망하고, 하대하는 제시카

넷플릭스 <제시카 존스>의 제시카도 이러한 이유에서 일까, 이런 저렴한 위스키를 매일같이 마신다. "즐겨 마신다"는 표현보다는 "끼고 산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많이 마신다. 집 안 곳곳에 위스키 병이 굴러 다니고, 잠이 오지 않아 밤에 외출할 때는 텀블러에 짐빔 위스키를 담아 나갈 정도로... 위스키에 중독된 모습을 보여준다. 솔직히 마시는 모습이 멋있진 않고, 폐인 같다.

ⓒ 넷플릭스 <제시카 존스> 시즌1-1

우선 제시카는 어떤 인물인가 설명해보자면, 마블 유니버스에 속해있는 제시카는 한 사고로 인해 엄청난 파워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정신을 조종하는 빌런으로부터 조종당한 적이 있고, 그에 의해 정신적, 신체적, 성적 착취를 당했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다행히 빌런이 사고로 죽으면서 제시카는 그로부터 도망쳤다. 하지만 그때의 악몽으로 인해 PTSD를 겪고, 그때마다 위스키를 들이켠다. 그래도 먹고살기 위해 사설탐정으로 활동하던 중, 한 사건을 겪으며 죽은 줄 알았던 빌런이 나타났음을 깨달으면서 이 시리즈가 시작된다.


제시카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모든 게 조종되던 경험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의 손으로 누군가를 죽였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움츠러들어있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건 아니고, 만사에 냉소적인 태도와 거친 행동으로 본인을 방어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은 웃을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일관하고, 하루 종일 술에 의존한다.


제시카가 위스키를 사서 오는 길에 동네의 바에 얼쩡거리다가 바텐더가 발견하는 장면이 있다. 바텐더가 위스키를 보며 "잔에 따라 마시지 그래요?"라고 하니까, 제시카는 이렇게 답한다.

"별로 좋은 위스키가 아니라 잔에 따라 마시기 그래요."

ⓒ 넷플릭스 <제시카 존스> 시즌1-1

이 장면에서 멈칫했는데, 제시카가 자신을 대하고 있는 태도를 느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대우를 받을 수도, 받아서도 안 되는 사람"으로 대하는 태도였다. 끔찍한 일을 겪었고,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으니까 내게 좋은 걸 해줄 생각이 없던 걸까? 제시카는 위스키의 품질을 탓했지만, 사실은 자기는 위스키를 잔에 따라 마시는 최소한의 여유도 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을까.


이게 나의 과한 추측이라고 하면, 이건 어떨까. 바텐더가 갑자기 말을 걸자 당황해서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를 후려친 거다. 위스키를 후려쳤지만, "별로 좋은 위스키도 아닌" 걸 마시는 본인도 후려친 거나 마찬가지라고 보인다. 어떤 문제나 사건을 무마시킬 때, 나에게 화살을 돌리는 게 가장 쉬울 때가 있다. 스스로를 위하는 마음이 작아져있을 때 주로 그러는데, 제시카도 그런 습관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사실 제시카가 주로 마시는 위스키나 저 바 안에 들어가서 잔에 따라 마신 위스키나 가격대는 비슷한데... 그러니까 제시카는 저렇게까지 위스키를 후려칠 합리적인 이유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제시카는 의뢰받은 사건을 수사하던 중, 자신과 똑같은 수법으로 피해자가 된 다른 여성, 호프를 만난다. 호프의 사건을 맡으면서 그가 죽지 않고, 돌아왔음을 알게 된 제시카는 처음에 도망가려고 한다. 도망가려는 제시카에게 그녀의 친구인 트리시가 "너는 힘이라도 있지. 그 여자애는 무방비로 그 짐승을 상대하잖아! 너는 어떻게든 해결하려는 사람이야."라며 그녀의 도망을 막으려고 한다. 그때 제시카는 이렇게 답한다.

"난 네가 바라는 히어로가 아니었어"

ⓒ 넷플릭스 <제시카 존스> 시즌1-1

이 장면에서 제시카가 패배감과 자괴감에 빠져있음을 알 수 있다. 초인적인 힘을 가졌지만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내 손으로 그를 상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만약에 제시카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 정도로 고통받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제시카는 본인의 힘을 믿었으며,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었기에 좌절이 더 컸다.


이런 제시카를 보면서 어쩐지 사회초년생이 떠올랐다. 어릴 땐 스스로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믿었지만, 사회에 나오고는 그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사회초년생. 현실이 이렇게 가혹한 거였다면, 왜 어른들은 헛된 꿈을 꾸는 나를 말리지 않았냐며 원망하기도 하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라는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한참 동안 그렇게 패배감과 자괴감에 빠져있던 우리와 제시카가 겹쳐 보였나 보다.



<제시카 존스>는 복수극이 아니다

처음엔 도망가려던 제시카는 호프와 면회를 한 후 빌런을 마주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제시카는 호프에게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끼는데, 자신이 그를 제대로 죽이지 못해서 무고한 여성이 피해를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호프와 면담을 하면서 그가 초인적인 힘을 가진 제시카를 기준 삼아 제시카와 갔던 식당에 가고, 호텔에 가고, 제시카가 점프했던 만큼 뛰도록 지시하면서 호프를 괴롭혔음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제시카는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호프 또한 이건 당신 때문이라고 제시카를 원망한다.


동시에 수감된 호프를 보며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를 죽여야만 했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고, 결국 같은 일을 겪은 호프를 돕고 싶어 한다. 그녀의 결백을 위해서는 빌런부터 잡았어야 했으므로, 두려움을 잠시 누르고 추적을 시작한다. 그러니까 제시카는 복수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 때문에(제시카 때문이 아니라 그놈 때문이지만) 피해를 겪고 있는 호프를 위해 그를 잡고자 하는 것이다.

ⓒ 넷플릭스 <제시카 존스> 시즌1-2

제시카 말대로 그녀는 영웅이 아니다. 좀 더 정확히는 이 사회를, 나라를, 그리고 인류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젖어 온몸을 던지는 캡틴 아메리카 같은 영웅은 아니다. 하지만 본인과 같은 일을 겪은 여성을 못 본 척 지나치지 못하는 여성이다. 우리는 사실 제시카와 같은 여성을 자주 보곤 한다. 직장에서 본인은 성추행을 이미 당했지만, 후임은 자신과 똑같은 일을 당하지 않도록 본인이 막아서는 여성. 대중에게 자신의 피해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두렵지만, 다른 피해 생존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나서는 여성. 그들 모두 사명감이 아닌 나와 같은 또는 나보다 약한 타인이 내가 겪은 걸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행동한다. 그 마음은 무엇일까.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에게까지 부채의식을 느끼고 자신을 희생할 각오로 행동하는 건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폐인이었던 제시카가 그를 추격하면 할수록 독기를 품는 게 좋았다. 눈에 힘이 생겼달까? 여전히 위스키를 병째로 마시지만, 그를 잡겠다는 목표를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도 느껴졌다. 오히려 그를 상대하면서 제시카는 죄책감, 두려움, 그리고 패배감으로부터 벗어난다. 추적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죽였던 사람의 유가족으로부터 너의 잘못이 아니었음을 인정받으면서 죄책감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났고, 그의 약점과 빈틈을 발견해가며 그가 무조건적으로 두려운 무적의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누군가를 돕고자 시작했던 일이 결국엔 제시카의 발목을 잡고 있던 덫을 스스로 풀게 되는 거라고 볼 수 있겠다.



제시카와 위스키

제시카에게 위스키는 악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도구였다. 심리 상담으로도 사라지지 않는 과거의 잔상들을 떨치기 위해 마시던 술. 빨리 벗어나기 위해 빠르게 취할 수 있는 독한 위스키를 콸콸 마셔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과거에 매몰되는 것을 막기 위한 자신만의 장치라고도 볼 수 있는데(물론 건강한 장치는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현재의 일상을 지키고 싶었기에 위스키를 들이켠 게 아니었을까.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회복하려고 싶어 하는 제시카의 간절함이 느껴지는 술이다.


여튼 사건은 해결된다. 이제 더 이상 제시카를 괴롭히는 것이 없으니 위스키를 끊을 법도 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제시카는 계속 위스키를 병째로 또는 머그컵에 따라 마신다. 시즌2에서는 시즌1 때보다 마시는 양을 줄인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이제는 위스키를 콸콸 마시는 게 제시카의 습관이 된 것 같은데... 언젠가는 제시카가 부디 위스키 잔에 조금씩 따라 마셨으면 좋겠다. 빠르게 취하기 위해, 악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마셨던 위스키를 온전히 향과 맛을 즐기기 위해 마실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제시카에게 위스키 잔을

사실 그동안 나도 제대로 된 위스키 잔이 없어서 가성비 좋은 버번위스키를 머그컵에 그냥 따라 마시곤 했다. 이 글을 쓰면서 위스키 잔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고, 나도 위스키를 마시는 시간만큼은 멋지게 마시고 싶어 져서 글렌캐런 잔을 샀다. 그리고 방금 택배를 받아서 그 기념으로 위스키를 새 잔에 따라서 마시고 있다.

뭐, 실용적으로 보면 머그컵으로 마셔도 별 상관은 없지만, 제목과 같은 제시카의 대사에 흔들렸다. 내가 마시는 위스키가 가치 없다고 후려치는 건, 그걸 마시는 나의 가치도  후려치는 거니까... 내 위스키와 나의 가치를 높이고 싶어서 잔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보리차를 따라도 멋져 보일 글렌캐런 잔에 위스키를 따라 마시면, 그걸 마시고 있는 내 모습도 퍽 멋있을 거다. 여기서 또 하나, 다이소에서도 위스키 잔을 살 수 있는데 또 그러기는 싫었다. 잔만큼은... 가성비로 채우고 싶지 않았달까. 인터넷으로 영국 글랜 캐런 사 잔을 독일에서 OEM으로 만들었다는 잔을 주문했고(Tmi), 괜히 더 기분 좋게 마시고 있다. 

 

제시카에게도 이 잔을 선물해주고 싶다. 만약 제시카에게 이 잔을 준다면, 이런 거 필요 없다며 뿌리칠 가능성이 높겠다. 위스키는 모름지기 콸콸 마셔야 한다며 코웃음 칠 수도 있고... 잔을 뿌리치는 제시카에게 아래와 같은 메시지 카드를 놓고 가고 싶다.   

"생각보다 꽤 멋지게 살고 있는 나를 알아차리고, 그에 맞는 대우를 스스로 해준다면 조금은 더 살아볼 마음 이 생기지 않을까? 한번 생각해봐. 1년 전의 나와 비교했을 때 지금 나는 어떤 부분에서 나아졌는지, 그리고 나는 그런 날 충분히 대우해주고 있는지."

오글거리는 카드에 제시카는 피식하며 또 비웃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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