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이디 맥베스>
‘파국이다…’
플로렌스 퓨 주연 영화 <레이디 맥베스>를 보고 나면 처음 드는 생각이다. 그러던 중에 내 눈에 플뢰리 와인이 들어왔다. 이 와인은 시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캐서린과 식사를 하면서 하녀 안나에게 “플뢰리 와인을 가져와”라고 명령하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도대체 저 와인은 뭔가 하고 찾아봤더니,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플뢰리라는 마을에서 만들어진 와인이었다. 이 와인은 꽃과 과일 향이 많이 나며, 대부분의 설명글에 “여성스럽고 섬세한 맛”이라고 표현된다.
이 “여성스럽고 섬세한 맛”의 플뢰리 와인, 캐서린을 억압하던 시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던 와인이었지만 그가 집을 비운 사이 캐서린이 다 마셔 버린다. 여기서 나의 레이더가 작동한다. 이거, 이거... 연결할 수 있겠는데?
인형의 집
영화는 캐서린이 팔리다시피 하면서 늙은 남편인 맥베스 공작과 결혼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 늙은 남편과 시아버지는 그녀가 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할 정도로 억압한다. 심지어 남편은 주로 캐서린에게 단호하고 짧게 명령하는 어조로 말한다. 캐서린이 조금만 말대답을 하면 “옷을 벗어라”, “벽을 보고 서 있어라”처럼 굴욕감을 주는 명령으로 그들 간의 권력 관계를 주입한다.
그런 상황에서 캐서린은 집에서도 꽉 조이는 코르셋을 차고, 드레스를 입고 거실 소파에 꼿꼿하게 앉아 있어야 한다. 거실에서 꾸벅꾸벅 조는데, 답답하고 무기력한 캐서린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캐서린은 왜 세바스천에게 끌렸을까?
그러던 중, 남편과 시아버지가 오랫동안 집을 비우면서 캐서린의 광기 어린 자유가 시작된다. 편하게 거실 소파에 누워 낮잠을 자던 캐서린은 밖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나가 봤다가 남자 하인들의 집단 성폭력 현장을 목격한다. 당하고 있던 안나에 대한 걱정보다는 안주인으로서의 권력을 남자 하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며 남편이 자신에게 했던 대로 하인들에게 벽을 보고 서있으라고 명령한다.
하인 무리 중 세바스찬이라는 놈은 캐서린에게 제대로 복종하지 않고, 흘끔흘끔 돌아보며 피식댄다. 캐서린은 그런 세바스찬을 응시하는데, 일종의 자기투영을 한 것 같다. 언젠가 남편이 캐서린에게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주인행세를 할 때, 캐서린은 그런 남편을 보며 피식댄 적이 있다. 남편이 웃지 말라고 하자 바로 웃음기를 거두고 그의 이어지는 명령에 복종했지만, 세바스찬은 캐서린의 눈치도 보지 않고 계속 비아냥거렸다. 캐서린은 세바스찬의 이런 불복종에 당황함과 동시에 끌린다.
남지 않은 플뢰리 와인, 캐서린의 선전포고
캐서린과 세바스찬은 쾌락의 나날을 보내지만, 시아버지가 다시 집에 돌아오면서 브레이크가 걸린다. 시아버지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캐서린은 다시 코르셋을 차고, 드레스를 입는데 달라진 점이 있다면 와인을 먹고 시아버지보다 늦게 다이닝룸에 나타나기도 하고, 시아버지의 고리타분한 말에 타격입지도 않고, 태연히 식사한다는 것. 더는 시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의 말이 그저 우습기만 하다.
그러던 중, 시아버지가 하녀 안나에게 플뢰리 와인을 가져오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그동안 캐서린은 그 와인을 모조리 마셔버렸고, 안나는 주인에게 사실 그대로 말하지 못하고 왜 없는지 모르겠다고만 말한다. 캐서린은 자신 때문에 난처해지고 심지어 벌까지 받는 안나를 흥미롭지만 한심한 눈빛으로 보며 모르는 척을 한다.
누구보다도 가부장적이며 억압적인 시아버지가 “여성스럽고 섬세한 맛”의 플뢰리 와인을 좋아한다는 점도 제법 웃기다. 여성의 젊음과 아름다움은 취하돼, 여성을 자신의 발밑에 둬야 직성이 풀리는 가부장의 표본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캐서린이 이 와인을 다 마셔버린 건 일종의 비웃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시아버지와 남편이 없는 동안 힘과 욕망에 눈을 떴고, ‘니들이 즐기던 게 이런 거냐? 이제 나도 즐길 줄 안다!’하는 쾌감 섞인 비웃음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플뢰리 와인은 그들이 말하는 아내의 의무를 뒤집으려는 캐서린의 선전포고와도 같다.
캐서린이 사랑한 것
그런 캐서린의 소유물인 세바스찬을 시아버지가 건드리자 캐서린은 독버섯을 이용해 살인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자신이 플뢰리 와인을 다 마셔버린 것을 말하지 못하고 잘못을 뒤집어쓴 적이 있던 안나를 이 살인에 강제로 가담 시켜 공범으로 만들고, 범죄 사실을 세바스찬과도 공유한다. 그들을 공범으로 만들며 도망칠 수 없는 덫을 만들고, 자신의 사랑에 방해가 되는 남편과 남편의 혼외자식을 차례대로 죽인다.
세바스찬은 그 죄책감을 못 이기고, 범죄 사실을 고백하며 캐서린의 범죄를 폭로한다. 하지만 이미 덫을 만들어 놨던 캐서린은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사랑에 배신한 세바스천을 진범으로 몰아간다. 사랑을 위해 살인을 저질렀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에서 캐서린이 사랑한 건 세바스찬이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캐서린이 사랑한 건 세바스찬이 아닌 자유였다. 시작은 남편과 시아버지가 떠나고 처음 외출해서 맡은 신선한 바람이었지만, 비틀린 집착에서 비롯된 살인으로 끝났다. 남편을 죽인 직후, 죄책감에 잠 못 이루는 세바스천에게 캐서린은 이렇게 위로한다.
“우린 함께하기 위해 그런 것뿐이야. 이제 무시당하면서 복종하지 않아도 돼.”
억압당하던 사람이 자유를 맛보고, 새로운 욕망에 눈을 뜨면 그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날 옭아매던 무언가에 정면 돌파를 하거나 합의점을 찾는 게 일반적이다. 여기서 캐서린은 보다 뒤틀리고, 파괴적인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만약 캐서린이 합의점을 찾는 걸 선택했다면, 결혼 생활을 유지하되 밀회를 즐기는 식으로 살아갔으리라.
캐서린은 어쩌다 뒤틀리고, 파괴적인 정면돌파를 선택했을지 생각해보면, 캐서린 안의 폭력성을 터트린 사건이 있었다. 캐서린의 외도를 알게 된 시아버지가 세바츠찬을 감금하고 폭행했고, 극단적인 상황에 캐서린은 이성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폭력에 가장 효율적으로 맞대응할 수 있는 건 또 다른 폭력이고, 그 폭력의 강도가 더 높아야만 하기에 캐서린은 독버섯을 떠올린 것 아닐까?
다양하고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의 필요성
캐서린은 동시에 아무 말을 하지 못하는 안나를 공범으로 끌어들이며 자신은 빠져나간다.
여성의 서사를 보여주고, 억압하던 사람을 단죄하는 내용을 보고도 쉽게 주인공 캐서린에 공감할 수 없고, 응원할 수 없는 건 그녀가 안나를 대하는 태도 때문이다. 본인이 약자였음에도 더 약자인 안나를 이용하는 캐서린을 쉽사리 옹호할 수 없다.
자매애와 연대를 담은 여성 서사 영화에 익숙해져서 여성 주연의 영화인 레이디 맥베스도 필시 그럴 것이라는 편견으로 일단 손뼉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레이디 맥베스는 두 손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그 정도로 캐서린의 범죄에 대한 배경과 감정의 흐름을 보여주되, 그녀를 옹호할 수 없도록 설계된 영화이다(범죄자의 서사를 그릴 때 이런 장치가 필요하다). 그래서 더더욱 캐서린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는 게 의미가 없기도 하다. 애초에 캐서린을 옹호하고 지지해달라는 영화가 아니므로.
6개월 전쯤 레이디 맥베스를 보고 플뢰리 와인을 맛보고 싶었으나, 검색해보니 가격대가 조금 높아서 시도해보고 있지는 못했다. 혹시 몰라 편의점 와인 예약 서비스 창에서 검색해 보니 적당한 가격대의 플뢰리 와인이 1개가 나왔고, 추석 기념으로 사 마셨다. 무슨 꽃과 과일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풍미가 좋았고, 달지 않은데 떫은맛도 없었다. 이런 맛의 와인은 처음 먹어봐서 한입 마시자마자 눈이 커졌다. 비록 영화를 보는 내내 충격에 휩싸이게 한 캐서린이었지만, 덕분에 새로운 술을 맛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