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를 치고 나서 이상한 증상이 나타났다. 관심도 없던 스터드와 가죽 제품에 눈이 가기 시작한 거다. 언젠가 락스타가 되겠다는(...) 꿈 때문일까. 누가 봐도 ‘저 사람 모범생이었겠군' 싶은 내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 성질의 것들이나, 어쩐지 그런 것들을 장착하면 락스타에 한 걸음 가까워질 것 같았다. 기타 실력을 높여야 하지만, 가장 쉽게 그들과 비슷해 보이려는 간사한 심리인 셈이다. 아무튼 그래서 스터드가 박힌 인조 가죽 가방과 점퍼를 샀다.
가방은 부피가 작기도 하고 존재감이 그렇게 크진 않아서 무난하다. 다만 가죽점퍼는 아직 적응이 필요하다. 사실 전에 가죽 재킷을 산 적이 있지만, 어울리지 않아서 한 두 번 입고 말았다. 실패 전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 고민을 많이 했지만, 이번에 산 건 좀 더 벙벙한 점퍼여서 그나마 이질감이 덜하다. 하지만 솔직히 잘 어울린다고 당당하게 말하긴 어렵다. 하하… 그래도 장착했을 때 멋있어진 기분이라 맘에 든다.
이번에 이 아이템들을 사면서 나의 또 웃긴 면모를 깨달았는데, 새로운 정체성이 생길 때마다 그에 맞는 아이템을 득달같이 찾아낸다. 가령, 한창 글쓰기에 좋아하던 때에는 ‘작가'(라고 하기엔 아직도 간지럽다만)로서 안경을 갖추고 싶어 했다. 뭔가 멋진 안경을 써야 글이 더 잘 써지는 듯 한 기분에 조금 특이한 안경을 구매했다. 일할 때는 무난한 검정 테의 안경을 쓰다가, 퇴근 후엔 큼직한 금색의 안경으로 갈아끼고는 키보드를 두드리곤 했다. 스타트업으로 이직할 당시엔 스타트업씬 특유의 통통 튀는, 개성 강한 느낌을 내고 싶어서 노란색과 파란색의 숏비니를 구매했다(회사에 한 번도 안 쓰고 갔다는 사실).
느낌적인 느낌을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각 정체성별 아이템으로 정체성을 구분시키고 싶어 한다. 특히 이번에 꽂힌 스터드와 가죽 아이템으로 장착함으로써 일하는 나와 분리하려고 한 것 같다. 일할 때는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성적인 척, 합리적인 척, 차분한 척 하는 나지만, 퇴근 후 음악을 듣거나 기타를 치거나 공연을 볼 때는 순간순간의 기분에 충실한 사람이 되기 때문. 구분함으로써 일하는 나로서의 정체성을 잠시 내려 놓기. 생각하기를 멈추기. 일에서 고통 받으면 일상에도 그 고통이 잔잔하게 이어지는 편이라, ON OFF 할 장치가 필요했다. 특히 요즘은 더.
그래서 내 이미지와 이질적이어도, 가죽점퍼를 입은 나를 요리조리 돌려가며 “네가 웬일로 이런 걸 샀니? 늦바람이 들었네"라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던 가족들의 반응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음악을 즐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에 힘을 실어주는 아이템이 결과적으로 나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으니, 필요했던 소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