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프리랜서 겸 지망생의 작업 기록
2018년 1월 4일
관성의 법칙. 2주면 새로운 상황에 익숙해지고, 한 달이면 관성의 궤도에 올라타 그 궤도로만 돌게 된다. 같은 궤도를 돌다 보니, 궤도에 벗어났을 때 땅이 물컹거리고 머리는 빙빙 돌고, 다시 돌아오는 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아마도 누구나 그럴 것이다. 다행인 것은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또 한 번 그 과정 속에 있다.
2018년 1월 23일
요즘의 나는 조금 이상해. 작년과도 다르고, 그 전과도 다르고.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불안한지 불안하지 않은지도 확실하지 않고. 매우 잔잔해. 마음이 요동치지 않고, 호수처럼 고요해. 이런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서 너무 이상해.
어쩌면 작년 한 해를 겪고 마음이 더 다부져진 것이 아닐까? 그런 희망적인 생각을 하게 되네? 지금 하는 일이 나쁘지 않아. 재미있고, 보람도 있고. 근데 그 어떤 것보다도 내가 글 쓰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해. 계절이 한 바퀴 돌아오니까 첫 시나리오를 썼을 때의 설렘이 떠오르네.
2018년 1월 30일
새해도 한 달이 흘렀다. 날씨도 춥고, 2017년 한 해를 달려왔더니 지친 것인지 1월은 그저 흘려보내며 살았다. 일자리가 있음에 감사했다. 작년과 비교해 생각이 꽤 많이 바뀌었다. 영화를 꼭 찍어야 한다는 마음이 식었고, 오히려 '내 능력을 잘 팔아먹으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고 살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삶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꼭 무언가가 될 필요는 없고 꼭 내가 만들어 내는 것들이 세상을 놀라게 하지 않아도 된다. 다 잘 해낼 수 없다. 하물며 처음부터 대단할 수도 없다. 해야 하니까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을 하자. 안 하게 되면 그건 망상이다. 그저 '패터슨'처럼 매일매일을 하자. 드라마가 끝나고 여행을 다녀온 5월 이후의 일은 나도 모르겠다. 그냥 한번 가보자.
2018년 2월 23일
재미가 없다면 굳이 할 필요 없다. 고통스러워하면서 굳이 하는 것은 집착이다. 이번 주 주말까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하자. 거창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냥 재미로 해봐야 할 것 같다. 어떤 포맷으로 쓸지 모르겠다. 단막 1-2부로 쓰던가. 모 회사에 제출했던 아이템을 좀 더 다듬어서 여름용 4부작 청춘 스포츠물로 만들어도 좋고. 일단 독백부터 써봐야 할까. 신분도, 성격도, 외모도 다른 두 여자. 견원지간이던 두 사람이 가족이 된다. 자매가 된다. 그로 인해 벌어지는 좌충우돌.
2018년 2월 25일
좋은 생각들, 느낌들, 감정들이 순식간에 휘발된다. 요즘의 나는 정말 수준 이하다. 괜찮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잘 안되더라도 당장 아무 생각이 안 들더라도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그냥 곧장 도전해! 이거 시원하게 제출하고 여행 간다.
5월에는 단편 지원 사업도 있고, 드라마 공모전도 있다. 3-4월 안에 할 수 있을까. 4부작이 용기가 안 난다. 넷플릭스에서 본 <리버>나 <빌어먹을 세상 따위>가 분량상 딱인데. 18년 상반기에는 드라마 보조작가 일을 하면서 드라마 한 편, 단편 영화 지원 한 편 할 것. 하반기에는 영화 장편 시나리오 한 편, 단편 한 편.
2018년 3월 5일
지난밤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빗소리와 촉촉한 공기의 촉감. 그 모든 것이 다가올 봄을 예감하게 했다. 더군다나 오늘은 모든 학기의 시작. 본격적으로 활기찬 새해가 시작되는 달이다. '계획이 없는 것이 계획이다'라며 1월-2월을 일만 하며 보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목표로 해야 할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왜 한 가지만이어야 할까. 앞으로는 어떤 카테고리에 있건, 내 능력을 쓸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해나갈 것이다. 드라마 보조작가 일이 끝나면 무엇을 해야 하나. 걱정하지 말고 알바를 다시 시작하자. 그리고 다시 재취업을 하든 또 무슨 수가 있겠지.
올해 제일 하고 싶은 일은 장편 시나리오를 쓰는 것이다. 작년에 대학원 준비를 하며 장편을 소홀히 했고, 시간도 턱없이 부족했으니 올해는 돈 버는 일과 별개로 장편 시나리오를 꼭 써내고 싶다. 5월 공모전은 급하지만 장편의 일환으로 준비해 볼 만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오늘은 아이템 준비를 해야 한다. 계획이 없다는 것 자체가 매우 고난도의 삶이다. 지치지 않고, 꺾이지도 않는... 세상과 끌어안을 수 있는 내가 되기를. 기꺼이 세상을 끌어안을 수 있는.
2018년 3월 6일
가장 감동을 받는 이야기는 결국 보편성이 있는 이야기인 것 같다. BBC드라마 6부작 <리버>는 형사 수사물의 외피를 가지고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는 홀로 나서 홀로 죽는다. 우정이나 사랑은 그 진실의 공허함을 메우기 위한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리버와 그의 환상은 이야기한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믿고 싶은 희망대로 결말을 맞이한다. 죽은 사람이 보이고, 유독 그들에게만 솔직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현실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기대를 품을 수 없다. 그래서 리버는 죽은 자들이 더 편했던 것이다. 사랑해서 생겨나는 온갖 고통스러운 감정과 기대와 믿음의 배반으로 인한 절망을 애초에 느낄 수 없는 존재들이니까.
그 주체할 수 없는 근원적인 고독이 깊은 공감을 불러왔다. 사람들은 그렇게 리버처럼 깨닫길 원한다. 모든 에피소드들이 같은 맥락 속에 있었다. 1-2화의 장벽만 넘으면 정말 마법처럼 깊게 몰입되는데, 아무래도 스티비 사건의 실마리가 등장하며 수사가 급물살을 타는 스토리라인이라서 그런 것 같다. 이 드라마는 리버가 스티비에게 'I love you'를 하기 위해 달려간다고 해야 할까. 정말이지, 춤추는 씬은 라라랜드 엔딩시퀀스 맞먹는 감동이었다.
좋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항상 느끼는 감정은 역시 '나도 이런 거 하고 싶다' 일 것이다. 평생 누군가의 그림자만 바라보고, 뒤꽁무니만 쫓는 인생인 것 같아서 우울해졌다. 인정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오긴 하겠지만. 다 늙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절망처럼 오겠지.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죽음 이후의 이야기. 사람이 변화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 솔직하게 세상보다는 나 자신에게 관심이 많고. 그런 의미에서 사람과 사람의 감정에 관심이 많다.
내가 살아간 시간 동안 내 이름 석자를 알고, 나의 음성을 듣고,
숨결을 느끼고, 눈동자의 빛을 읽고 마주 앉았던 그 많은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가서 있을까.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을 보니 어디에는 있겠지. 혹은 소식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거나.
언제쯤 되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니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 영원히.
단지 내 기억 속에서는 살아있는 그 사람들이, 이제 실체는 모두 사라지고
유령처럼 머릿속에만 남아있다는 사실이. 오늘따라 무척 믿어지기 힘든 일로 느껴져.
현실에 솔직하지 못한 삶.
오로지 혼자서만 지나가버린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삶. 고독한 사람. 시들어버려.
화장하지 못한 얼굴이 부끄러워서 들고 다니지 못하는 사람.
의붓 남매의 이야기.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단 하룻밤 만났던 너와 내가 가족으로 만나게 될지?
나에겐 남은 날도.. 남은 사람들도 없다..
2018년 3월 7일
믿음과 믿지 못함. 배반의 두려움. 기대가 무너지는 것에 대한 절망. 그래서 끝없이 자신을 홀로 내버려 둔 채 고독에, 비정상성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많은 사람들. 모두가 한 흐름 속에 있는 형제들. 결코 만나지 못하는 혈육. 결코 밟을 수 없는 고향. 믿음에서 사랑으로. 파생되어 가는 나를 끌어내리는 감정과 사건들. 비정상성을 숨기고 사는 사람들. 모두 어딘가는 고장 나 있는 법. 가지 말라고 말하지 못했던 것,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던 것. 우리는 지나간 것을 후회하며 아파하며, 항상 눈앞의 것을 놓치며 사는지도 모른다.
사실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럼 편하니까. 쫓기듯 살 필요도 없고, 스스로를 미워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회사를 나오기로 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자꾸만 꿈꾸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어딘가는 좀 특별할 것이라고.
지독한 지옥은 희망이라는 한 줄기 빛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가장 슬픈 비극은 그곳에서, 희망에서, 헛된 생각에서, '그 생각'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내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은 '상'을 받은 순간. 선생님의 눈에 든 순간. 그로 인해 부모님의 눈에 든 순간인지도 모른다. 더 잘하고 싶어. 더 칭찬받고 싶어. 더 돋보이고 싶어. 그때부터 내가 해내는 모든 일이 내 존재의 증명이 되었다. 유치원 때, 크리스마스 선물로 산타할아버지에게 무엇을 받고 싶냐는 질문에 그저 칭찬을 받고 싶어서 '책'을 받고 싶다고 말하고 얼마나 뿌듯했었는지. 그리고 실제로 책을 선물 받았을 때 얼마나 실망했었는지. 그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나는 스스로를 기만했고 스스로를 혐오했다. 그것이 나라는 인간의 비극이다. 나라는 얄팍한 인간, 사기꾼 같은 삶의 시작. 나는 실패작이다. 오만한 실패작. 흉측한 사기꾼이자 오만한 실패작.
삶이란 악몽의 연속, 깨지 않는 악몽이다. 죽음 만이 이 악몽을 깨어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자살이 터부시되는 것도 신의 음모일지도 모른다.
2018년 3월 9일
펜과 노트와 같은 문구에 열광하는 것은 아직 써지지 않은 가능성이 마음을 설레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채워갈 많은 이야기들의 값을 미리 당겨 받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챙긴 사랑의 편지지가
그대들이 챙긴 사랑의 편지지와 빛이 다른 것
그 차이가 누구는 빛의 차이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세기의 차이다
태양과 그림자의 차이다
이것이 고독이다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허수경 -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2018년 3월 12일
5월까지는 계획이 정해져 있다. 하지만 그 후의 나날은 공백, 예측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즉흥적으로 시간 속에 나를 던져놓는다는 것이 너무나 방만하게 느껴진다. 방만하면서 자유롭다. 자유로우면서 사실 우리가 사회라는 틀 안에서 얼마나 부자유스러운지 더더욱 뼈저리게 느낀다.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세상에 없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외로움을 빛과 그림자처럼 안고 있다.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하면, 그래도 외로움을 감수하면서도 얽매이고 싶지 않은 사람에 가깝다. 돈에도, 명예도, 사랑도, 친애의 관계도 심지어 가족에게도 인생의 풍요와는 전혀 관련 없는 세상 속에서 기쁨을 느낀다. 식물처럼 살 수는 없을까. 그런 사람도 있는 거 아닐까.
완벽한 여자애, 못난이 남자애. 학창 시절 악연이었던, 두 사람이 합동해 부모님의 재혼을 막으려 하는데 그러다 여행을 떠난 부모님이 죽는다. 그래서 여자애와 남자애는 함께 각자의 헤어진 엄마 아빠를 만나 소식을 전하게 된다. 여자애는 남자애를 원망한다. 남자애는 여자애를 원망한다. 왜 두 사람을 방해하려고 했냐고. 여자애는 남자애가 그저 생각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상당히 속 깊고 어른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고, 결국 여자애가 남자애를 사랑한다고 말하게 되는 그런 이야기. 어떨까? 왜 나는 살아났을까, 왜 나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을까. 두 가지가 부딪힌 것. 좋아했던 두 사람이 재회하는데, 부모가 결혼을 하게 되고, 이를 참을 수 없었던 소녀는...
2018년 3월 14일
새로운 가능성은 계속 생겨난다. 마치 여행지에 온 것처럼 어떤 기준에 의해 어떤 선택을 할 지에 대해 늘 생각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조각배 선장의 삶이려나. 사실, 그 면접장에서 받은 질문은 내가 정말 회피하고 싶었던 질문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영화 전공도 했고, 사회생활도 하고, 어떤 영화를 하고 싶은지 명확해졌나요?' 아직까지 이렇다 할 대답을 하기가 어렵다.
2018년 3월 15일
흐린 날. 잠을 자는 동안 창문을 때리는 둔탁한 빗소리를 들었다. 전날의 석연치 않았던 감정들과 머리를 어지럽히는 기억들이 어렴풋한 잠 속에서 깨끗하게 씻기길 기도했다. 그리하여 완벽히 잠에서 깼을 때는 텅 빈 공간만 남아있기를 바랐다. 내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마주했을 때, 내 모든 노력이 다른 사람 손에서 무참히 망가지고, 그 책임마저 내가 져야 할 때, 그런 상황이 내게 닥친다면 나 역시도 무너져 버리게 될까? 나는 잘 모르겠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할 뿐.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파한들, 분노한들.
2018년 3월 16일
아무래도 오늘은 나가지 못할 것 같다. 뭐가 그렇게 힘드냐고 묻는다면 몇 가지가 있다. 지치게 하는 것이 힘들고, 기다리는 것 특히 의미 없이 기다리는 것이 제일 힘들다. 재미없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는 것도 힘들고, 내가 내 시간을 운용하지 못하는 것들도 힘들다.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환경도 힘들다. 금방 지나가버릴 시간들에 연연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즐거워질 수 있도록 다른 것에 주의를 분산시키고 조금 더 드라이해지자.
2018년 3월 20일
드라마는 영화와 달라서 전체의 완성도보다는 각 화를 어떻게 배분하고 편집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장르인 것 같다. 사람들은 시작과 끝을 다 알고 있다. 사람들은 그래서 '어떻게 펼쳐지느냐', '무엇을 보게 되느냐'에 집중한다. 이들이 무엇을 하느냐에 치중한 장르라는 것이다. 거기에 극 전체의 통일성과 16부작에 맞춰진 사건 흐름은 오히려 방해가 된다. 왜냐하면 주어진 한 시간, 일주일 두 번을 TV 앞에 있기 위해서는 보고 싶은 장면을 포함한 이들이 '무엇을 할 것이냐'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영화보다 행동중심의 장르다. 우리는 과연 시청자가 보고 싶어 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가. 스토리의 완결성보다 그 사실이 더 중요해 보인다.
우리 드라마에서 부족한 것은 주인공 캐릭터의 서사다. 그들이 단순히 알콩달콩하는 장면이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무엇을 나누고 어떻게 단단해져 가는지를 보고 싶어 하는 거다. 차곡차곡 쌓아가는 무언가를 바란다. 잘 모르겠다. 드라마가 뭔지. 숲보단 나무들이 어떤 식으로 정렬되어 숲을 이루어가는지를 탐험하는 것이 드라마인지도 모른다. 숲 전체의 아름다움을 위한 영화와 전혀 다른 장르이며 보는 환경도 상이하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어찌 되었든 내가 뭐라고 말할 정도로 아직 드라마에 대한 숙지가 부족하다. 의견에 반박하려고 해도 대안이 없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참 답답하다. 뭐라도 개선하고 싶은데.
천사를 본 사람들은
먼저
실망부터 해야 한다
천사는 바보다
구름보다 무겁고
내 집게손가락의 굳은 살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천사는 바보이고
천사는 있다
천사가 있다고 믿는
나는
천사가 비천사적인 순간을
아주 오랫동안 상상해 왔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천사를 떠올린다
본드 같은 걸로 붙여놓았을 날개가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낭패를 당한 천사
허우적거리다
진흙탕에 처박히는 천사
진흙에 범벅되는 하얀 인조깃털
그 난처한 아름다움
아니면
야간비행 실수로
낡은 고가도로 교각 끝에
불시착한 천사
가까스로 매달린 채
엉덩이를 내보이며
날개를 추스르는 모습이 그려진다
아니면
비둘기 똥 가득한
중세의 첨탑 위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측은하게 지상을 내려다보는
그 망연자실
내가 원하는 천사다
<내가 원하는 천사>, - 허연
2018년 3월 23일
목련이 만개한 봄밤. 골목길을 너와 함께 걷고 싶다. 밖은 아직 서늘하지만 괜찮아. 네 손이 따뜻할 테니. 나는 용기가 없어. 마음에, 눈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내 마음을 알지 않냐고 말할 수 있기는커녕, 그 사람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것도 두려워. 눈에, 마음에, 그 누구도 담지 않으니까.
누가 이 절대 고독에서 날 꺼내줘! 그렇지 않으면 난 이대로... 하지만 이제 내게도 환상의 장막이 사라지고 나 역시도 볼품없어졌다. 이 한 몸 이 한 마음 밖에 남지 않은 나는 그것들이 유일한 것임에도 모든 걸 던질만한 가치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사는 문제는 항상 어렵다.
2018년 3월 29일
예전에는 내가 어른스럽기 때문에 언니, 오빠들과 더 친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반대였는지도 모르겠다. 동년배들이나 후배들보다, 언니, 오빠들에게 더 편하게 어리광을 부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난 그만치 나약하고 비겁하다. 스스로가 엉망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삶 속에서 사건으로 불현듯 깨닫는 것이 꽤 괴롭다.
2018년 3월 30일
또다시 잔인한 봄이 도래하고 있다. 어떤 일이든 쉬운 일은 없다. 어제는 진득하게 앉아 마음이 풀릴 때까지 글을 쓰고 싶었는데, 앉아있기조차 힘들어서 정말 할 수 있는 만큼만 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의 아픔은 옅어지긴 했지만 아직 진행 중이다. 나의 무엇이 문제기에..? 오늘에 이르러서는 모두 끝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렇게 약해진 건가 싶다가도, 그럴 수도 있지 다른 사람이 문제는 맞잖아 했다가. 매번 이런 상황이 올 때마다 못 견딜 거냐고 하면 정말 할 말이 없다.
2018년 4월 5일
봄이 성큼 다가와 반팔이 기분 좋은 날씨다. 미세먼지 때문에 야외에서도 갑갑한 느낌이 드는 한 주가 흐르고 어젠 잠깐 날이 화창하게 갰었다. 상암동을 좀비처럼 휘적대며 한 그루 피어난 벚꽃 나무를 스치듯 겨우 보았다. 오늘은 하루 종일 흐리고 쌀쌀하고 비가 내린다. 봄비치곤 차고 우울한 느낌. 불과 몇 주전만 해도 내게 주어진 공백의 시간을 감당하지 못한 채 버거워했었다. 내 젊음, 소중한 시간, 환산할 수 없는 가치들이 손바닥 위의 모래처럼 허무하게 휘 쏟아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지금은 말이다. 언제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게 하루가 저물고 해가 뜬다. 이런 시간의 시간의 상대적인 감각이 참 놀랍고, 내가 우습다.
작가님은 내게 리뷰를 명확하게 잘한다고 하셨고, 의외로 순정파다, 또 의외로 코미디를 할 줄 알고 귀엽다고 하셨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나와 다른 사람이 보고 있는 나를 끊임없이 대조하는 것은 늘 흥미롭다. J피디님은 내게 피디도 잘할 것이라 했고, 고집이 있어 쉽게 뭔가를 하는 법이 없다고 했다. 대체로 사람들에게 상냥하고 친절하게 한다고 했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면 그것이 재능이고, 사명이라고 했다. 나는 예전부터 그 말이 참 듣기 좋았다. 조급해하지 말자. 나는 언젠가 닿을 것이다. 다만 무엇이 언제라는 것을 몰라서 깜깜할 뿐이다. 한 발, 한 발, 무섭지만 내디뎌보자. 적지 않은 나이지만 지금 이 순간이 남은 내 삶에서 가장 젊고 아름답고 가능성이 충만하다.
2018년 4월 12일
윌리엄 트레버, Love and summer을 읽으면서 결코 자각하고 싶지 않았던 나의 여린 부분이 고개를 든다. 첫사랑에게 고백한 후 맡았던 낙엽의 향기, 그 남자아이가 사랑스러웠던 달콤한 봄밤, 함께 있으면 그저 명랑하고 유쾌했던 그 사람을 바라보던 일, 내 안의 뜨거운 열기가 용솟음쳤던 겨울, 늦은 밤이 되도록 좋아하는 것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
2018년 5월 26일
무엇이 그렇게 어렵고 두려웠는지. 일기 쓰는 일을 이제야 시작한다. 파리 여행을 다녀왔다. 6월부터는 새로운 일기장을 쓸 예정이다. 작년부터 이어져온 해묵은 일기장은 이제 작별하고.
2018년 5월 27일
그래도 내겐 루틴 한 일이 필요하고, 적으나마 돈을 벌어야 행복할 것 같다. 그러니 알바를 찾긴 해야 한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공모전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2018년 5월 28일
호르몬 영향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정말 어제는 불안증이 도져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세시 넘어서 잠들었다. 날씨는 눈부시고, 찬란했던 여행 기억이 아직 바래지도 않았는데 앞으로의 일이 암흑이라니 참 기묘하다. 내가 너무 속 편하게 생각한 걸까? 당장 7월부터 가진 돈이 다 떨어지고 0원인데 말이지. 6월-9월까지는 시나리오 작업을 해야 한다. 한두 달은 몰라도, 앞으로 대책이 없으면 안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일이 없어도 불안하고, 일을 하면 잠식되고. 그래도 무일푼은 안된다. 아직 시간이 보름이 있다. 일을 구하는 것은 운이 필요하다. 운과 타이밍. 그러나 어떤 일이든 하게 되면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2018년 5월 30일
여행지에서 비행기를 놓치는 꿈을 꿨다. 일요일부터 불안함에 몸부림쳤다. 결국 답은 정해져 있는데, 맞설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사는 것 자체가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다시금 체감하고 있다. 내가 만들어 낼 무언가가 처음부터 대단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과연 할 만한 일인가 생각해 보았을 때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고, 시간 낭비라고, 소득이 없는 일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므로 해야 한다고 결심했었던 초심을 떠올렸다. 목표하는 바를 먼저 이루고 그다음에 다른 길을 모색하고 싶다.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젠가 같은 고민이 다시 도래할 것이고, 그때는 정말 늦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용기를 내고, 딱 올해, 내년 초 1~2월까지만 죽었다 셈 치고 도전해 보자.
2018년 6월 4일 - 작업일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강해진다. 해야 한다.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아무 소득도 없지만 지금하고 있는 이 일이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마음이 말한다.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면 할수록 그 생각은 더 분명해져 간다. 바보 같고 약한 모습만 보였지만,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작가든, 감독이든, 피디든. 왜 꼭 한 가지를 정해서 이것이 되고 싶다고 말을 해야 하는 건가?
32세의 여름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 어느 때보다 가장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고, 불확실한 미래에 내 모든 것을 던졌다고, 그렇게 기억되는 여름을 보내자. 결국 아무것도 안 한다는 생각이 들고 죄책감이 드는 것은 내가 게을러서 그런 거다. 어두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움직이면 내가 있는 곳이 길이었음을 언젠가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2018년 6월 2일
*아티스트에게 중요한 것
point of view
message
우울감의 실체는 생산성 없는 하루를 보낸고 있다는 것에서 비롯했다. 구슬보따리를 끌어안고만 있지, 본격적으로 실에 꿰고 있지 않고 있는 갑갑한 상태. 이 때문에 시간만 보내고, 진전되는 것은 없고, 억지로 직장에 끌려가는 것은 싫고.
해결책은 매일 루틴 하게 일정한 양의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 목표를 세우는 것이 두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 공모전이란 목표를 세웠으니, 마음을 굳게 먹고 집중해야 한다. 한 주간 참 힘들었다. 작년 11월부터 올해 5월까지 약 7개월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던 것도 인정한다. 따지고 보면 글 쓰는 일에 집중했던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징징대지 말자, 진짜.
이번주에 우울함의 끝을 봤을 때 깨닫게 된 진리.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와 소중한 관계를 맺은 사람의 존재다. 그 사람과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 새로운 세상을 알아가는 것. 그것만이 인간 삶의 전부가 아닐까? 나 자체로 받아들여지는 것. 그 사람 자체로 괜찮은 것.
2018년 6월 4일
시간이 지나니 점점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용기가 생긴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다가 결국 마음은 내가 원하는 곳으로 방향을 정해버린다. 그래서 방법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올해 목표한 바는 이루고, 모진 평가를 받고, 그 후에 나와 주변의 변화를 한번 지켜보자. 정말 하나도 해낸 것이 없잖아. 작년에 이어 올해까지. 이제 정말 꿰어야 할 때. 물러설 곳이 없다. 도망치지 말자. 맞서 싸우자.
2018년 6월 11일
이젠 잘 모르겠다. 미궁에 빠져버렸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지도, 어떤 걸 잘하는 지도 모르겠다. 밤이라서 그런가. 침몰하고 있다. 그저 좋아하는 걸 향유하며 사는 것이 나에게 잘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공무원 시험을 고민했다가 그런 생각을 했다. 공시 준비 1년 할 시간에 글 쓰고 작업하면 그게 더 남는 장사지.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 같다. 이 일은 정말 좋아서 해야 한다. 재미있는지, 없는지, 계속 생각이 나는지, 안 나는지 올해 내내 차분히 생각해 보자. 그리고 아이템.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한번 해보자. 내가 재미있는 걸로. 내가 가슴 뛰는 걸로. 아무것도 안 나오더라도 작업일지는 계속 쓰자.
2018년 6월 11일 작업일지
<우애로운 개와 고양이>
- 내가 나쁜 애라는 걸 너만이 알고 있다. 그래서 난 널 죽이려고 결심했다.
[이건 아무리 나라도 참기 힘들다. 단서는 항상 내 눈앞에 있었다. 아빠의 물건이 나도 모르게 하나 둘 바뀌어 갈 때. 늘 함께 보냈던 주말에 수술이 있다고 나갈 때. 내 공연에 와서 휴대폰만 보고 있을 때. 그리고 마지막 한방. 더듬거리며 조심스럽게 꺼낸 말과 상반된 잔뜩 상기된 얼굴로 레스토랑을 예약해 뒀다고 했을 때. 지금 이 자리. 한 달간의 식단 관리 중에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는 단 하루, 부쩍 바빠진 아빠와 데이트에 눈이 멀었던 거지. 사람은 역시 굶어선 안돼. 전투적으로 스테이크에 나이프를 갖다 대자 한참 바보 같은 얼굴로 서로가 처음 만났던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 헬렐레 바보 같은 아저씨. 그리고 내가 존경해마지 않았던 멋진 여자, 진경이모. 두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2018년 6월 12일 작업일지
완벽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저 계속 같은 작업을 되풀이해 나갈 뿐이다. 정해진 시간까지. 킬러 이야기는 하고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존 영화 이상의 것이 생각이 안 난다. 오히려 감정에 집중하는 영화들이 내 손에 착착 붙는다. 피디가 아닌 작가로서는 하이컨셉 영화를 쓰는 것을 어려워함을 깨달았다.
2018년 6월 12일
과거의 작업일지를 보다가 지금 이 시기가 매우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을 지나서, 업계에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면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두 가지. 내가 가진 장점과 배우고 습득한 것을 합해 나만의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시기인 것이다. 이제 겨우 첫 단추를 꿰었다. 이제 겨우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니 먼 미래가 아닌 당장의, 그리고 내 인생 전반을 위해서라도 그 두 가지를 합친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한다. 시간이 있을 때, 한 살이라도, 하루라도 젊을 때. 절대 이 시기가 하찮은 것도 아니고 소득이 없거나 비생산적인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하고 소중한 시기라는 것을 항상 염두하고, 용기를 내고 떳떳하게 앞으로 나아가자. 집중하자.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이지만, 목숨만큼 중요한 것은 자아성취이다. 살아있기만 해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2018년 6월 19일
남들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나만은 스스로를 믿고 잘 해낼 거라고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확실히 내가 기똥찬 아이디어는 내지 못하긴 하지. 그냥 올해까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슬슬 평범해져 가기로 해. 받아들이기로 해. 꾸준히 글을 쓰면서, 그걸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일 거야. 계속 글을 쓰자. 손에 잡힌 이 아이템을 잘 풀어내보자.
2018년 6월 19일 작업일지
이제는 냉정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죄책감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아직까지도 안갯속을 헤매고 있는 느낌이다. 구체적인 사건이 없기도 없거니와, 내가 아직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두고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선택을 못하고 늘어놓기만 하는 그런 느낌이다.
아이템마다 동일한 작업 방식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우선은 부모님 재혼 막는 이야기를 대본화 하고, 이 이야기는 꾸준히 일지를 쓰던지, 서간문 형태로 쓰던지, 계속 산문 형식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다.
공모전에 되지 않더라도 일단은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 글을 쓰고 싶다.
2018년 6월 20일 작업일지
간단한 시놉시스. 대략의 기획의도 완료. 등장인물을 그냥 백지에서 시작하는 건 좀 어렵기 때문에, 시퀀스 리스트와 병행해서 인물표를 채워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니까 이제 내일부터는 시퀀스 리스트 시작. 전반적인 구조에 따른 들어가야 할 내용들 정리해서 넣고, 그다음에는 씬리스트 작업할 것. 사실 시퀀스 리스트에서 중요한 건 예상을 벗어나는 구조인데, 예상을 좀 벗어나는 방향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구성해 보자.
우선은 이미 머릿속에 있는 예상 가능한 시퀀스를 짜고, 그다음에는 그 의식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가는 구조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방향에 대해서 검토하면 좋을 것 같다.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은 머릿속에 있는 흐름을 정리하고 채워 넣는 것. 그다음에는 그걸 벗어나는 방향 검토하기. 이번주 주말까지 한번 해봅시다.
인물소개를 빨리 채워야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시퀀스 리스트나 씬리스트에 있는 사건을 가지고 인물소개를 묘사할 수도 있기 때문에 스토리라인부터 먼저 구상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2018년 6월 22일
다음 날. 내일이 기다려지는 느낌을 참 오랜만에 경험했다. 어서 일어나서 이야기를 써야지. 하고 눈을 뜨면 설레고 두근거렸다. 이 기분이 너무 소중해서 계속, 계속 느끼고 싶고, 간직하고 싶다.
2018년 6월 25일
혼자 있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잊고 있었던 중요한 생각이나 계획들이 다시금 떠오른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바로 하게 된 계기에는 학자금 대출 상환의 문제도 컸다. 그래서 2017년까지 회사를 다니면서 경력을 채우는 동시에 학자금 대출을 해결하고, 적금을 모아 여행경비를 마련하는 한편, 목돈을 갚으려고 했었다. 그러고 나면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하자고 생각했다. 계획보다 1년이 빨라지긴 했지만, 결국 이 길은 내가 원래 가려고 했었던 길이 맞았던 거다. 월급과 회사 타이틀에 발목을 잡혔다면 여전히 안이하게 살고 있었을 거란 상상을 하니 아찔했다.
종종 내가 아찔한 낭떠러지에 서 있는 혹은, 깜깜한 암흑 속에 던져져 있는 아득하고 암담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기억해 둘 것. 나는 패배자가 아니라, 개척가이며, 두려움은 곧 자유라는 것. 내 힘으로 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당분간, 외부와의 연락을 단절하고 작품에만 집중해 매듭을 짓자. 집중하자.
2018년 6월 26일 작업일지
레퍼런스를 신경 쓰다 보니, 나레이션이 흘러나오는 장면이 자꾸 그려져 힘들다. 일단 레퍼런스를 다 지우고 생각해야지.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 나왔으니까, A 하고 B부분은 좀 장면 화해서 구체적으로 구상을 해야 할 것 같다. 구상이 필요하다. 내일은 알바 한 군데 더 지원하고, A부분 구상 구체적으로 할 것. B는 다음날. 사실 지금 호태는 대충 생각이 나는데 재인이가 너무 어렵다.
2018년 6월 28일 작업일지
재인이는 빛으로, 높은 곳으로 나아가고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무대 위)
호태는 어둠으로, 지하로 내려간다. (지하 공연장)
재인이를 너무 나쁘게 그리지 말자. 간밤에 주인공이 나쁜 애라서 혼자 고통받았다.
시작은 현재에서 시작해서 회상이 들어가야 할 듯. 과거 돌이켜 보듯이.
난 내 핏 속에 무능력한 집안이 인자가 숨어 있어 내 할머니가 그렇듯, 아버지가 그랬듯, 내 작은 아버지가 그랬듯 나를 무기력과 무능력으로 좀먹어 들어갈 거라고, 유전병처럼 나를 그렇게 무너뜨리고 말 거라는 불안에 떨며 잠들곤 했다.
2018년 6월 29일 작업일지
일단 전날에 구상한 첫 시퀀스가 너무 후지다. 갈아엎어야 할 것 같다. 오늘은 일단 장면 생각하면서 시퀀스리스트부터 완료하자.
2018년 7월 3일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저녁에> - 김광섭
1967년 10월 13일
봄내 신문지에 그리던 일 중에서 나는 나를 발견하다.
내 재산은 오직 '자신'뿐이었으니 갈수록 막막한 고생이었다.
이제 이 자신이 똑바로 섰다.
한눈팔지 말고 나는 내일을 밀고 나가자.
그 길 밖에 없다.
이 순간부터 막막한 생각이 무너지고 진실로 희망이 가득 차다.
- 김환기 일기
2018년 7월 4일 작업일지
생각하다 보니 내가 생각한 아이템이 썩 튀지는 않지만 내용은 정말 좋은 거 같다. 기획적인 측면은 부족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이템이랑 잘 만난 거 같다. 트릭이 필요한 것 같다. 두 사람이 과거에 단순히 어떤 일이 있었다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보다, 과거에 뭐 때문에 사이가 안 좋았구나 정도로보여주다가 과거의 진실이 드러나는 방향으로.
두 사람 라이벌 같은 거였는데 서로 공부 잘해서 그냥 앙숙이었다 정도 보여주다가 결국에 재인이 호태한테 잘못을 했고, 그걸로 서로 고통스러워했다는 거 보여주고 같은 슬픔을 겪으며 그걸 극복해 내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이야기. 그러니까 초반 트릭은 서로 그냥 경쟁자라서 사이가 나빴다, 둘 중에 누가 좋아한 거 아니냐. 뭐 이런 식으로 보여준 다음에 후에 그게 아니었다, 사실 이런 일이 있었다 이렇게 보여줘야 할 것 같다.
가해자는 피해자 보기가 껄끄럽고 싫다. 자신의 최악의 모습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니까. 피해자는 당연히 가해자 죽이고 싶고, 복수하고 싶고, 얼굴도 보기 싫고. 근데 비극은 둘이 서로 호감이 있었다는 거. 어쩌면 서로 좋아했을 수도 있었다는 거. 그게 비극. 근데 일이 잘못돼서 다 어그러졌고, 이젠 부모들의 재혼까지. 그리고 부모의 사망까지. 재인은 상황이 좋다가 최악으로 떨어져야 하고. 호태는 상황이 안 좋아야.
2018년 7월 8일 작업일지
무섭다.
내일부터 진검승부다.
2018년 7월 9일
중요한 작업을 앞두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작품을 발표하는데 준비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아 괴로운 꿈까지 꾸었다. 돌아서면 고민이다. 과연 이 이야기가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재미가 있을지. 어쩌면 답은 나와있는지도 모른다. 내 취향과, 내 눈을 믿고,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밀어붙이는 것. 그것이 현시점에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친구들과 상의를 하고 싶은데 그것도 쉽지 않고, 인물 하나하나를 직접 빚어야 하는데 그것 역시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이야기는 틀대로 떠오른다. 하지만 인물을 빚는 일은 왠지 모르게 생각이 많아지고 조심스러워진다.
제일 중요한 것은 즐겁게 하는 것이다. 2018년 이 여름. 오직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이 나이에 쉽지 않고 흔치 않은 축복이다. 이 기간의 의미와 무게를 항상 생각하며 누리자.
2018년 7월 9일 작업일지
지금부터 캐릭터를 빚어나가는 것이지, 등장인물 소개를 정리하는 것이 아니다. 작업의 성격을 항상 잘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이미 나온 시나리오의 캐릭터 정리가 아니라, 지금부터 빚고, 세밀하게 깎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디 사람다운 캐릭터를 만들어서 그 아이가 이야기 속에서 살아 움직일 수 있게끔 해야 하고, 그 아이를 통해 이 이야기가 매력적으로 보여야 할 것이다. 이참에 캐릭터 빚는 나만의 노하우를 만들어가도 좋을 것 같다. 정리는 모든 것이 끝난 후 해도 늦지 않다. 일단 자유롭게 러프하게 줄글로 쭉 써보자.
2018년 7월 15일
아무것도 하지 않을수록 무기력해지고, 점점 자신 없어지고, 그럼 다시 무기력해진다. 악순환이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앉으면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겠다. 내일부터 당장 시작한다. 아르바이트도, 글도, 시나리오도, 용기를 내자. 결코 죽으란 법은 없을 것이다. 완연한 여름으로 접어들었다. 이 더위가 우울함을 심화시키기도 하지만, 내적으로 더 뜨겁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여름의 끝에 괜찮은 열매 하나를 성장시키는 것을 목표로 앞으로 나아가자.
2018년 7월 18일
왜 이렇게 두려운지 모르겠다. 첫물은 버리듯 처음 스케치하듯 쓰는 건데도 잘 써지지 않으니 고역이 따로 없다. 그리고 설정 구멍이 너무 많은 것 같고, 결국 그것이 발목을 잡을까 봐 걱정도 된다. 재미도 없는 것 같다. 처음 생각했던 것만큼의 장점이 잘 살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장점으로 보이게끔 잘 쓰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번민 끝에 글 쓰는 마음이 진정이 안되고, 산만해지고, 불안하고.. 죽을 맛이다. 목표는 8월 2일까지. 그 기한은 트리먼트 쓰는 기간에 설정을 다지는 기간이라고 생각하고 어깨의 짐을 좀 내려놓자. 목표와 데드라인이 분명하니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때 내가 만족할만한 수준이 되지 못하더라도 그때까지 '최선을 다하고 지원을 끝냈다, 이제 시나리오만 쓰면 된다.' 이런 마음으로 차분하게, 성실하게.
2018년 7월 19일
정말 하기 싫은데 해야 해서 눈물이 찔끔 날 것 같다. 그냥 아무 생각 안 하고 자고 싶고, 뒹굴고 싶다.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데 필요한 장면을 써야 할 때, 정말 너무 괴롭다. 구상이 안된 것도 사실. 트리트먼트이다 보니 줄글을 쓰면서 장면구상을 같이하니까 배로 힘들어지는 것 같다. 그 장면이 최선인 것인지 제대로 판단도 안된 상황이니, 쓰는 재미도 없는 것 같고, 뭔가 빠트린 것 같다. 일단 어제 쓴 걸 당장 고칠 수는 없고, 지금부터 좀 더 신경 써서 쓰면서 수정할 때 봐야겠다. 시간이 부족하지 않다. 막힌 이유는 내용의 문제라기보단 장면이 아직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나리오 쓸 때 유의해야지. 이럴 거면 진작부터 쓰기 시작할걸. 뭐든 빨리 시작하는 것이 답이다.
2018년 7월 23일
시간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글이 만족할 만큼 써지지도 않고 분량 채우기에 급급하다. 정말 작업하는 것이 고역이다. 안 될 걸 알면서도 해야만 하는가. 시간 낭비 아닌가. 다시 그런 생각이 고개를 든다. 도무지 집중이 안된다. 시간이 일주일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할 수 있을까. 어차피 당선도 안될 텐데, 이렇게 억지로 쓰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정을 대략 짜봤는데 정말 미친 스케줄이다. 그런데 해내야 한다. 당선이 되고 안되고는 상관없다. 시간 내에 결과물이 일단락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간이 더 있다고 해서 드라마틱하게 잘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자명하다. 일단 유형의 무언가를 완성해야 다음이 있을 수 있다. 단지 그 과정의 괴로움과 촉박한 시간으로 인한 육체적 고됨이 자꾸 나를 가로막을 뿐. 스티븐킹이 말한 대로, 단락이 모여 하나의 소설이 완성되듯, 벽돌을 쌓아 올리듯 하면 되는 거니까. 너무 괴로워하지 말고 우선은 눈앞에 주어진 백지에 집중하자. 그래도 벌써 8장이나 썼잖아? 거의 1/5를 완성한 거다. 제로는 아니다. 6월 막바지에 아이템을 잡아서 여기까지 온 거면 지금까지도 유의미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보여준 것이다. 자부심을 느끼고 칭찬을 해줘도 된다고 생각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시작하자.
2018년 7월 24일
할 수 있을 거야. 할 수 있어. 암시를 걸고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할 수 없어'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다. 약해지면 안 되는데.
2018년 7월 25일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면접을 보고 온 아르바이트는 결국 채용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세상에 나랑 맞는 일이 있긴 한 걸까 목이 졸려오는 기분이다. 어찌 됐든, 되든 안되든 해방감을 느끼고 싶다. 그러니 집중해야겠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 시간을 견디면 날씨는 다시 선선해질 것이고, 이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은 오게 되리라. 이럴 때일수록 등장인물에게 밀착해야 한다. 이렇게 외롭고 거지 같고 힘든 상황이야말로 최적의 시기. 아무도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줄 수 없다. 오로지 내 두 다리로 걸어가야만 한다. 그래야만 만족할 수 있다.
이렇게 좌식 테이블을 펴놓고 앉아서 시원한 바람을 쐬고 있으니, 어린 시절의 여름방학이 떠오른다. 가능성이 무한했던 시절. 방학숙제인 탐구생활을 앞에 놓고 있던 나. 무엇을 하든 재미있었던, 나 스스로 해낸 일에 시간 가는 줄 물랐던. 노는 것에 시간을 모두 빼앗긴 시절. 골든 에이지. 내게 여름은 그런 계절이었다.
마음의 정리를 하고, 집중해서 8월 2일까지 잘 마친 후에 새로운 곳에 도전해 보자. 한 달 생활비는 어떻게든 융통해 볼 수 있을 거다. 그 이상은 무리겠지만.
계획은 계획일 뿐. 모든 것은 하나의 단어에서 시작한다. 단어가 문장을 문장이 모여 문단을, 그 문단을 쌓아가다 보면 완성되어 있지 않을까 한다. 집중력이 한 시간 단위로 끊어진다. 대체 뭘 그렇게 힘들어하고 두려워하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2018년 7월 26일 작업일지
그동안 틈틈이 다이어리에 작업일지 아닌 하소연들을 늘어놓다가 이제야 에버노트를 킨다. 어제 새벽 두 시 기준으로 20페이지 돌파했다. 앞으로 25~30페이지 남았다. 약 절반 가량 온 것이다. 그동안의 진도와 어제 하루 만에 나간 진도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아마도 초반 부분이 내게 힘에 부치긴 했던 것 같다.
분량에 짓눌리니까 시나리오는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힘이 빠진다. 내가 너무 무모하게 힘을 뺀 걸까. 가능성도 없는 일에. 그래도 이 과정이 있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진짜 처음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스케치해 놓은 거니까, 씬리스트와 시나리오 구성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자료조사가 덜 돼서 대충 쓴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은 시나리오화 할 때 메꿔야 한다. 2일까지 대략의 트릿 끝내고, 머리 식히면서 작업에 따른 스케쥴링을 다시 해야 할 것 같다.
알바는.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8월만 어떻게 잘 넘겨보자. 또 다른 기회가 올 거다. 죽으란 법은 없다.
정 안되면 재취업해야 한다. 그 정도의 각오를 가지고 해야 한다.
지금 작업에 집중하자. 아무것도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나에게 남는다. 이 과정은. 다음으로 가기 위한 사다리라고 생각해야 한다. 나는 아직도 여전히. 스무 페이지까지 왔는데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재미있다. 내가 잘 살렸든 못 살렸든 상관없이 재미있다. 인물들이 안타까워서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거기서 그친다. 어쩌겠는가, 내가 만들어낸 세계에서 그 아이들이 운명은 그렇게 정해져 있는데.
어쩌면 신도 나를 그렇게 생각할까. 불쌍하고 안타깝지만 본인의 계획에서는 어쩔 수 없는. 항거할 생각은 없다. 마음껏 가지고 노세요. 난 당신의 계획에 따라 춤추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뭐 그렇게 대단한 목숨, 대단한 인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저 널리고 널린 목숨 중에 하나 아니겠습니까.
2018년 7월 28일 작업일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리고 더위로 너무 지친다. 스토리 전개 시킨 것들이 너무 유치한 것 같다. 캐릭터들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재인은 아예 그냥 포기하고 싶어 보인다. 부모님 이야기가 이제 지겹다. 빨리 죽여버려야겠다.
아무리 고생스럽다 해도 고작 1주일. 아니 1주일도 남지 않았다. 다음 주 목요일 오후면 다 끝나있을 테니까. 스스로도 참 믿기지가 않는 것이 있다. 아이템이 기획적으로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기대도 안 하고 쓰는 것에 의의를 두려고 했을 뿐인데, 마감 기한에 이렇게 매달릴 줄이야. 스스로 어떤 기대를 품거나 자신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이렇게 되기 쉽지 않을 텐데. 의외로 나는 나를 믿고, 나를 사랑하는 것 같다. 이 결과물 하나 가지고 모든 상황이 역전되어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성장하는 발판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런 일은 로또 당첨이나 다름없지 싶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일을 끝내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졸업영화 시나리오도 수업 과제로 제출해야 해서 후다닥 써서 냈었지. 그때 그 강사였던 감독님이 해볼 만하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늘 과제를 해오지 않는 나를 보며 걱정 어린 한숨을 쉬셨는데 처음 그런 이야기를 하셨다. 이후 그 시나리오로 스탭을 데리고 올 촬영감독을 캐스팅했다. 배우를 캐스팅했다. 그 과정 중에 뭔가..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미 내가 하나 둘 쌓아 올리기 시작한 것이 생명을 가지기 시작했다.
2018년 8월 3일
또 한 번. 여행첫날 힘든 기분을 맛본다. 우울감. 모든 것이 의미 없음.
비행기를 타고 낯선 땅에 도착하면 내 존재가 어딘가 먼 곳으로 사라져 버린 거 같다
그간 내가 땀 흘려 쓴 것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였나 하는 허무한 기분이 밀려온다.
내가 시간을 들여 무언가를 만든다면, 그 만든 것이 팔려야 가치가 있는 것 아닐까?
2018년 9월 19일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아직 산산조각 나지는 않았지만 내 마음이 아래로 끊임없이 미끄러지려 할 때가 몇 번이나 있었다. 그때마다 스스로를 끌어안고 몇 번이고 기어올라갔다. 어두운 우물 같은 곳,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박차고 나온 세상은 여전히 나를 흥미롭게 하는 요소가 없었다. 그 안에서 내가 무언가를 해보기엔 한계가 많았다. 딱 그거였다. 지난 17년 그리고 지나온 18년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얻었을까? 얻은 것과 잃은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물론 떼려야 뗄 수 없는 것들이지만 적어도 나는 행복했다. 돈은 없었지만 자유로웠고, 세상이 알아주지는 않았지만 내 작품을 쓰며 심장이 뛰었고, 세 개의 나라에 여행을 다녀왔으며, 내 이름을 건 방송 작품을 두 개 했다. 말 그대로 내 손으로 무언가를 이룩해 내는 나날들이었다. 비록 남루하지만, 추상적이지 않고 직관적인, 실질적인 일은 내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2018년 9월 22일
울적함도 일종의 감기 같다. 외부의 자극. 내부의 불안이 바이러스처럼 마음에 침투해 병을 일으키는 것 같달까. 며칠 지나면 차츰 나아진다. 대부분 스스로 현실 파악을 하면서 제자리로 돌아오곤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외부에서 어김없이 나를 건져 올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선택은 물론 내게 달려있지만 말이다.
내가 가장 솔직하고, 가장 순수하고, 꾸밈없이 있을 때가 작품을 만들 때, 글을 쓸 때이고 그때 나는 내가 만든 세상과 내 마음을 가장 잘 아는 분신 같은 인물들과 대화하며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다.
2018년 9월 24일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소통. 각자가 가진 능력을 최대로 끌어내, 주어진 제약 안에서 최선의 최대의 결과물을 도출하는 것. 혼자 만의 고집도 중요하지만,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소통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 무엇이 중요한 지 우선순위를 두고 파악할 줄 아는 능력도 필요.
[적은 나이가 아닌 데다 아직 세상에 본인의 이름을 걸고 결과물을 보여준 적이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믿으며 삶을 이어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굳은 의지를 필요로 하는지요. 하지만 절박한 발버둥으로 세상이 그 마음을 알아주고 불러준다면 저는 또다시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는 알아봐 주지 않을까. 매번 선물처럼 날아 들어오는 기회들처럼 어쩌면 내 이름 석 자를 원하는 자리가 세상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마치 이곳에 오기 위해 그동안의 시간을 보낸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 속 대단원의 결말이 있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2018년 10월 1일
도서관에서 지원 서류를 인쇄하고 오면서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의미 없지 않아! 의미가 있었어!' 트리트먼트를 완성한 후, 홍콩 여행지에서 느꼈던 그 낭패감은 당연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인 동시에 소진되었다는 신호였다. 난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어. 내가 하는 일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내 안의 모든 것을 탈탈 쏟아낸 후라는 것을 알아두자.
2018년 10월 8일
나의 세계는 점점 넓어져간다. 충청, 전라, 경상, 강원 그리고 제주까지.
의식과 무의식
표현주의
탐정이 추적하는 형식
필름 누아르
누아르는 세상 물정의 장르
2018년 10월 21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봄밤>, - 김수영
2018년 10월 26일
교육은 앞으로 총 3일 남았다. 지난번과 다르게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대본을 쓰고, 다음엔 취직을 하고, 소설을 시작하자. 봐주는 사람과 마주하고 싶다. 그래야 고독하지 않고, 세상이 날 몰라준다 생각하지 않을 것 같다. 취직은 좀 더 넓은 차원에서 생각하자. 업계가 아니더라도 관련 쪽으로.
확신이 든다. 다시 취직하든 뭘 하든 이건 꼭 대본으로 마무리한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런데 분명한 것 하나는 있다. 올해가 가기 전에 꼭 드라마 대본을 완성할 것이다. 마무리는 꼭 하고 싶다. 대본의 형태로. 세상이 알아주든 말든. 그리고 생계 문제를 해결한 다음 소설을 준비를 하려고 한다. 작업에 내 모든 삶을 걸 수는 없다. 그렇게 현실을 잊고 집중할 수 있을 만큼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놓고 싶지 않다. 절망과 남루함 뿐인 삶이더라도, 반대로 안락하고 아름다운 삶이라도 그 끝은 항상 똑같은 법. 죽음 앞에서 우리는 모두 공평하다. 그러니까 용기를 내자. 다 잘 되리라. 잘 안되면 어떠랴. 그것도 삶이다.
트리트먼트를 썼음에도 안갯속을 헤매고 있다면 그 시간들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항상 나는 이처럼 마음이 급하다. 수정이 원래 그런 거니까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고 다음으로 찬찬히 넘어가자. 마음 잡는데 한 달이 걸렸다. 오늘부터 조금씩이라도 해나가자.
2018년 10월 29일 memo
리뷰페이퍼
어떤 목적으로 이 씬을 썼는가를 중심으로 '대화'를 해야 함
리뷰는 감상문이 아니다.
지금보다 나은 형태로 나아갈 수 있게 방법을 제시하는 것.
이야기는 목적이 있다. 그런데 다대수의 시나리오가 목적이 드러나지 않는다.
목적은 가치관, 자기 해석이 필요하다. 소재는 뻔하다.
시간적 시점: 그 시간, 사회를 장악하는 가치관/트렌드를 보여줌.
공간적 시점: 사건이 일어나는 개연성 확보
>> 시간+공간: 세계관을 짜는 것.
>> 목적 세팅, 주인공 결정
2018년 11월 9일
누군가가, 무언가가, 그 무엇이 되었든 나를 좌우하게 둬서는 안 된다. 나의 인생은 나의 것. 그 무엇도 나를 쥐고 흔들 수 없다. 나만이 나를 해할 수 있다. 그저 지친 것이다. 달력을 보면 고삐를 늦춘 적이 없다. 올해는 그렇게 달려왔다.
2018년 11월 18일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하기 싫은데 아무리 봐도 하기 싫은 것 같은데, 왜 하고 싶은 마음이 들까? 해야만 하기 때문일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 긴 시간들이지 않고, 큰 노력 없이 가진 능력을 이용해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어쨌든 일은 일이므로 머리를 써야 하기 때문에 하기가 싫은 거다. 그리고 아직 면접 결과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2018년 11월 24일 작업일지
한꺼번에 다 써내고 다 잘하려고 하지 말고 한 줄 한 줄 차분히 써나가자. 오늘 안 쓰면 시간이 부족하지만 오늘 차분하게 쓰다 보면 시간은 충분하고, 분명 오늘 조금이라도 쓰게 되면 내일은 풀리는 지점이 있고 내일 쓸 때 더 도움이 되리라.
2018년 12월 3일
중요한 생계 문제는 아직 해결이 되지 않았으나 일단 움직이긴 해야 한다. 또다시 바빠지기 전에 대본을 마무리하고 있자. 어떻게든 되겠지. 중요한 건 대본을 쓰는 것.
2018년 12월 5일
친구들 앞에서는 호기롭게 말했지만 사실 나도 어찌해야 할지 막막하다. 머리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화요일부터 공모전용 단막 대본을 준비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아이템의 한계가 보였기 때문이다. 어제 내가 낭패했던 것은 답이 나올 수 없는 이야기를 붙들고 답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고, 그렇다면 새로운 아이템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이 너무 괴롭게 느껴진 탓이다.
어쩌면 난 지난여름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고 믿고 싶었던 것 같다. 스스로 나는 '실패'했다고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두려움도 한몫했다. 제대로 공모전을 노렸다가 안되면 어떻게 하지? 자명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고, 쓰리지만 이제는 인정해야겠지. 두려운 시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모든 삶이, 도전이, 살아있음이 지겹게 느껴지는 절망의 시기. 이번 달도 잘 버텨내려면 각오가 필요하다. 얼마나 걸릴지, 성공할지, 또 다른 실패일지는 모르나 다시 한번 각오를 다져본다.
지금 쓰는 아이템을 포기해야 한다. 단막극을 준비하려면 새로운 아이템이 필요하다. 그 아이템을 발굴해 내는 시간이 얼마나 불안하고, 진척이 안돼서 답답할지 잘 안다. 하지만 한번 그 조급함을 벗어나고자 바로 끌리는 대로 글을 써보는 경험을 해서 알게 되었다. 결국 기획과 아이템이 이야기의 모든 생명, 생사여부를 좌우한다는 것을. 내겐 결과물 자체보다, 세상에 인정받는 결과물을 내는 것이 더 중요한지도 모른다. 아직 시간은 넉넉하진 않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채용 결과 대기 중인 회사는 고려 대상에 넣지 말자. 단, 알바는 연락이 오고 나서 구하자. 12월은 한량 같아도 어쩔 수 없다. 1월에 새해를 맞이하여 어딘가에서 또 일이라도 하며 버티면 된다. 용기를 내자. 그래도 이번주까지는 이 아이템을 안고 갈지 말지 고민을 좀 더 해보고 싶다.
2018년 12월 14일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른다 하더라도 규칙적으로 일상을 보내야 할 것 같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12월도 후반으로 흐르고 있다. 시간이 얼마남아 있지 않다. 가족에게 느끼는 부채감은 1월부터 다시 금전적으로 보태면서 해결하자.
돈을 벌지 않을 때 무언가를 준비하기 위한 기간의 시간들, 그 시간에 뭔가 해내지 못하면 결국 의미가 사라져 버린다. 그렇지 않은 것은 유일하게 글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앞으로는 확실한 것에 도전을 해야 하고, 준비하는 시간이 아깝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할 것도 많고 주변도 너무 복잡하다. 다시 정리를 좀 하고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겠다. 어렵더라도 조급하게 생각해서 돈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막자. 효율적인 방식을 생각해야 한다.
여전히 이 아이템을 지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으나 6-7월의 시간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대본을 어떻게든 마무리짓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책임감을 가지고 하자.
2018년 12월 14일 작업일지
작업을 오랜만에 다시 시작할 때 해야 할 루틴이 방금 생각났다. 그 일은 바로 작업일지를 쓰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허심탄회한 일지를 작성하면서 새로운 작업을 앞에 두고 마음을 다지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눈으로 아이템 자체를 봤을 때의 시점이 나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또? 란 생각이 들지만 후킹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피드백받기 전에는 내가 봐도 기획이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누군가는 그 이야기가 재밌었다니. 그런 의미에서 세팅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어떤 세계관 속에서, 어떤 인물들이 만나, 어떤 사건을 벌이는가. 이야기마다 갈래와 줄기는 비슷할 수는 있어도, 사실 재미있고 없고를 나누는 것은 세부적인 설정인 것 같다.
포스터가 떠올랐다. 세상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얼굴로 각자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꽃을 들고 서 있다. 하지만 여자애는 다리에 깁스를 했고, 남자애는 옷이 엉망진창이다. 어딘가 불에 그슬린 것 같기도 하고. 폭탄 맞은 머리로.
우당쿵탕하는 젊은 애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두 사람은 정반대의 인물이고, 마찬가지로 두 사람의 가족들도 정반대의 분위기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가족들의 설정과 대비가 어쩌면 시대상도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타인의 슬픔에 대한 공감. 서로의 처지가 되었을 때 아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가해자 옹호도 아닌 남녀의 융합도 아니다. 남자애는 여자애를 이해하게 되고, 서로의 아픔을 공유한다. 여자애는 남자애를 이해하게 되고, 남자애에게 미안해지고, 자신이 최고가 되기 위해 버려 왔던 사소한 것들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2018년 12월 20일
계속 해내가는 수밖에 없다. 여러 친구,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서 캐릭터 성별을 바꾸는 것에 대한 확신이 생기기 시작한다.
2018년 12월 21일
이 스피드로 과연 1월까지 괜찮은 대본을 뽑아낼 수 있을까. 걱정이지만 해보는 데까지 해봐야겠지. 더 이상 놓치지 않고, 굳게 마음먹고, 이제 더 이상 기회가 쉽게 오지 않을 거란 생각을 가지고. 항상 마지막인 것처럼 매 작업에 임하도록 하자.
2018년 12월 22일
머리가 아닌, 직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들이 통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얼마나 짜릿한 쾌감을 느끼는지. 직감이 녹슬지 않도록, 꾸준히 글을 써야 한다.
2018년 12월 24일
다른 어떤 즐거움보다 가장 내게 큰 즐거움, 극상의 즐거움은 글을 쓸 때라는 것. 이윽고 완성해 냈을 때때다. 설정에 대해 생각할 시간은 이제 약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다. 무엇이 목표이든 자신에게 선언한 데드라인은 절대적이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서 프로의 일 따위 무리다. 일은 결국 들어온다. 그럼 그때까지 내 도전을 위해 한 눈을 팔 시간이 없다. 가족의 일도 마찬가지다.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다. 그 시간에 다음으로 나아가 차라리 더 빨리 수확을 얻는 것이 더 생산적이다.
인간에게 '희망'은 언제나 중요하고, 그 희망을 위해 달려가다 보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 실패보다 기회를 잡지 못했다는 것이 더 쓰고 고통스럽고 후회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집중하자. 제일 중요한 것은 완성이고, 두 번째는 즐거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즐겁게 해서 완성하자.
내겐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것이 별로 없다.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그렇게 풍족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작은 온기라도 나누는 것이다. 자신의 목표에 집중하는 한편, 주변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내 마음을 전달하자.
커버 사진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레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