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Talk To Her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혜 Dec 16. 2023

​찬란했던 곤궁과 고독

To 2018 From 2023

2023년 12월에서 너에게 쓴다.


일하고, 글을 쓰고. 돈이 떨어지면 다시 일하고, 상황이 나아지면 다시 글을 쓰고. 18년의 너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지. 미래는 깜깜한 가운데 끊임없이 힘을 내야 하고, 끊임없이 마음을 다 잡아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삶이었어. 많은 일을 하고 힘들었지만 동시에 가장 많이 여행을 다닌 해이기도 했지. 지금에서 생각해 보니 맨땅에 맨몸을 내던진 강렬한 시기였던 것 같아. 그렇게 스스로를 내던져서 깨지고, 닳으면서 얻은 것이 정말 소중한 것들이었다는 걸 그때 너도 조금은 예감했지?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야.  2018년의 네가 겪은 일들은 아마 내 전체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기억될 거야.  


먼저 그 시기에 했던 일들은 모두 긴박한 업무 현장에서 진행되는 일이었지. 위기 상황이 처했을 때, 문제 해결에 집중하고, 일을 진행시키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된 거야.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이 불거질 때도 너는 항상 중재하거나 가교 역할을 하곤 했어. 기획 피디로 일하다가, 다시 한번 감독 혹은 작가의 길로 가보겠다고 피디 일을 그만두었잖아. 그런데 오히려 '피디'가 가져야 할 덕목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던 거야.


잘하는 것을 알게 됨과 동시에 무엇을 가장 못 견디는 지도 알게 되었어. 문제 해결에 집중을 잘한다는 것은 효율성과 득실을 잘 견주고, 어떻게 되든 질서를 찾는 사람이라는 반증이기도 했어. 불투명한 앞날을 그저 하고 싶은 일 하나만 보고 우직하게 견딜 수가 없었어. 어떻게 해도 현실을 잊을 수 없었고, 현실을 무시하지도 못했지. 앞일을 예상하지 못하는 삶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


작품 단위로 모이는 계약직으로 이런 일, 저런 일을 해보니 사람에 대해서도 많이 배우게 되었지. 리더의 자질이 이 어떤 것인지, 무능한 리더가 일을 어디까지 망칠 수 있는지를 비롯해 이런 특수 집단에서는 목표가 뚜렷하고 시간이 곧 돈이기 때문에 파워 게임을 통해 질서와 서열을 세워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어. 


보조작가 일이 끝나고, 만기 된 적금으로 오랫동안 염원하던 파리 여행을 다녀온 후에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에겐 모두 연락했지. 다시 직장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더 이상 명분도, 돈도 없었어. 여름부터 소식이 날아들어왔어. 그간 현장 일을 하고 글을 쓰면서, 겨울의 초입까지 면접을 보러 다녔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면접을 보러 간 너 역시, 회사가 자신과 맞는지 평가했던 일이었던 것 같아. 형편이 어려워서 가릴 처지가 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너는 너와 맞지 않는 조직에 몸 담고 싶지 않았어. 너의 그런 용기가 네가 있을 곳과, 너의 길을 만들어 간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내 이름 석자가 들어간 두 개의 방송 작품에 참여했고, 꽤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파리 여행을 다녀왔고, 끊임없이 글을 썼어. 결국 2018년에 재취업을 하지 못했지만, 숙원 중에 하나였던 장편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지. 그 작업으로 상황이 드라마틱하게 반전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정말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작업의 매듭을 짓고 싶었던 거지. 


너는 그때 그런 결론을 내렸어.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자, 경력이 있는 피디 일을 하면, 적은 시간에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기획 피디 일을 하면서, 생활은 안정시키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하자. 

그때서야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을 구분할 수 있었고, 가능성이란 절망에서 헤어 나와 현실을 직시했으며, 네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거야. 물론 이것 하나 만은 몰랐을 거야. 잘하는 일이 결국 네가 좋아하는 일이 된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 일을 통해 나 자신의 역사와, 사람들과, 세상과 연결되어 생각지도 못한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는 정말 몰랐을 거야. 결국 그 모든 길이 단 하나의 길로 이어지는 것을 결코 알지 못했을 거야. 


가장 남루하고, 가장 변변찮고, 가장 외로웠던 18년의 너는, 23년의 내가 보기에는 정말 위대하고, 용감한 모험가야. 네가 남긴 유산으로 인해 23년의 나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딛고 본 적 없거나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풍경을 보고 있단다. 그렇기에 나는 그 시간을 가장 찬란했다고 말해주고 싶어. 




커버 사진

토드 헤인즈 <캐롤>

매거진의 이전글 32세의 여름은 다시 오지 않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