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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May 26. 2024

이카루스의 저공비행

prologue

0.

그간 브런치 기록이 뜸했던 이유를 이제야 브런치에 기록한다. 지난가을부터 유튜브를 시작하게 되었다. 대단한 야심과 기획으로 시작된 것보다는 '덕질 기록'에 가까웠다. 시작은 갑작스럽게 빠져들게 된 분야에 대해서 사진과 동영상들이 무수히 쌓이자 이를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리하고 분류되지 않은 기록은 아무런 의미가 없이 잊힐 뿐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리하여 내가 겪은 플랫폼 '유튜브'는 그간 접했던 그 어떤 플랫폼보다 강렬했다. 동영상은 사진이나 글보다 파급력과 영향력이 상상 초월이었다. 특히 영상의 소재가 분명하니 타게팅이 잘 되었다. 엄청난 양과 속도의 피드백이 나를 짜릿하게 만들었다. 공들여 편집한 영상보다 몇 초의 짧은 숏츠가 순식간에 만 단위의 조회수가 찍히는 것을 보았을 때도 색다른 기분을 느꼈다. 글도 좋지만 영상 전공자이다 보니, 역시 영상으로 스토리텔링을 하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도 새삼 깨닫고 말이다.


이 취미 유튜브 채널은 곧 3천 명의 구독자를 바라본다. 이 채널을 지속하는 한편 또 다른 주제로 채널을 만들어보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에 할 이야기는 이 황금 시절의 끝을 마주했을 때 시작된다. 


1.

지난 2월,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준비했던 프로젝트가 세상에 나서는 순간을 맞이했다. 시청자에게 닿기 전의 세상, 즉 플랫폼이자 투자자와 프로젝트의 공식적인 논의를 하는 자리였다. 결과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캐스팅이 되어야만 구체적인 논의가 가능하므로, 캐스팅이 안된 상태의 프로젝트를 통해 논의할 수 있는 것은 이 작품의 기획, 소재, 대본에 대한 선호도와 피드백이었다. 그때 나누었던 의견들 중에 직접적으로 와닿은 의견은 없었다. 크게 와닿았던 것은 오히려 그 후의 일이었다. 


프로젝트는 계속 다음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멈추기로 결정하는 것마저도 진행의 과정이었다. 지난해 가을부터 진행 중이던 캐스팅은 소식이 없었고, 캐스팅에 도움을 받기 위해 진행했던 플랫폼과의 논의는 큰 소득이 없었다. 그렇다면 다음은 이 프로젝트를 함께하는 동시에 캐스팅에 영향을 주는 감독을 찾는 일이었다. 이후로 감독 리스트업을 하고, 연락처를 수소문하고, 미팅을 진행하고, 프로젝트 제안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었다. 지금의 우리의 기획과 대본은 수많은 작품 속에서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수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혹은 좋은 캐릭터를 만난 기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심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정말 괴로운 것은 모든 일이 한꺼번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는 한 치의 빗나감도 없는 인생의 클리셰였다. 3월에 대표님이 갑작스럽게 사임하시게 되었다. 대표님은 내가 전 회사를 그만두고 이직할 때부터 시작해서 이 회사를 다니는 내내 끊임없이 성장하게 하는 발판을 마련해 주시고, 지켜봐 주신 분이었다. 내게는 그저 '대표'라는 이름보다 더 크고 넓은 의미였다. 팀장이었고 동료였다. 회사 안에 나라는 또 다른 작은 회사의 투자자이기도 했으며, 고문이기도 했다. 당연히 내가 진행하고 있는 모든 프로젝트는 대표님과 싱크를 맞춰둔 것들이었다. 그런 존재가 갑작스럽게 빠져나가자, 모든 희망적인 가능성들이 삽시간에 불투명해졌다. 나는 손 놓고 그것을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기획은 망했고 함께 달리던 파트너도 잃었다. 마치 날개 하나가 뜯겨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만하면 다행일 텐데 그 상태로 거대한 벽에 패대기 쳐진 것만 같았다. 뇌진탕을 겪으면서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벽에 압도되었다. 막막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는 연차가 아니었다. 나를 가로막고 있는 벽은 회사를 옮긴다고 해서, 심지어 업종을 바꾼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그냥 마주할 수밖에 없는 벽이었다. 그래서 의외로 혼란은 오래가지 않았고,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이대로 어디까지나 날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래, 그간 아주 재미났지.

근데 사실 언젠가는 벽에 가로막혀 추락할 예정이었던 거, 알고 있었잖아?

오히려 잘 됐어. 이건.. 어쩌면 기회야. 


아직 떨어져 죽을 만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비실비실 일어났다. 한쪽 날개 만으로도 간신히 비행은 유지할 수 있었다. 지금은 신나서 높이 나를 때가 아니다. 최대한 낮게 날아야 한다. 낮게 날아서 그간 보지 못했던 풍경을 보자. 내가 내린 결론은 다시 공부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작년 가을부터 계속 눈에 들어오던 스터디에 지원했다. 사람이 삶을 살면서 내일에 대한 기대와 설렘 같은 것이 없다면, 그건 살아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스터디는 그로기 상태의 나를 다시 설레게 했다. 정말 기적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이 스터디가 흥미를 자극했던 요소는 '공부' 자체가 아니라 '함께 공부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분기마다 주어진 주제를 가지고 각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매일 밤 두 시간씩 대화하면서 공부한다. 이번 분기의 주제는 '기획'이다. 그렇다. 기획. 바로 나의 직업 '기획 프로듀서'에 떡하니 들어가 있는 단어를 다시 정의하는 것에서부터 공부는 시작되었다.


+

왜 이카루스인가? 괴로워하고 있을 무렵 코로나 이후로 처음 해외 여행을 다녀왔다. 도쿄 여행에서 마티스의 전시회를 보았는데 마티스의 말년 작업  jazz 시리즈가 유독 인상적이었다. 후에 자료를 찾아보니, 암수술 후 병상에 있어야만 했던 마티스가 '컷아웃' 방식으로 작업한 시리즈라고 했다. 붓 대신 가위를 들고 색종이를 잘라서 작업한 것이다. 거장의 꺼지지 않는 열정에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다. 또한 그가 작업한 '이카루스'는 추락의 상징인 다른 작품과는 다르게 비상하는 이카루스의 환희 그 자체를 표현했다고 한다. 곧 추락하여 죽을 운명이라는 것은 잊고 기쁨 만을 표현한 것도 내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2024년 나의 테마는 이카루스다. 마티스의 '이카루스'가 나의 테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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