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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Jul 11. 2024

일하는 관계에 필요한 경계선

3. 사람을 공부함에 앞서

1. 낯선 서로의 경계를 허무는 것은 히스토리

이번 달에는 매니지먼트 미팅이 몇 건 있었다. 진행 중인 작품이 곧 촬영이 들어간다는 소식이 알음알음 퍼졌는지 먼저 미팅을 요청해 왔다. 직전에 물망에 있던 주연 배우가 직전에 최종 고사를 한 터라 아직 논의할 것이 없을 거라고 설명했지만 인사라도 나누자며 날짜를 잡았다. 


아직 아무것도 나눠가질 것 없는 단계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까? 나는 미팅에 나오는 사람 자체를 기대하기로 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소속 배우분들의 소개를 차근차근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내시는 분이었다. 단순한 프로필의 나열이 아닌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니 호기심이 생기고, 조금 더 듣고 싶었다. 


그래서 언제부터, 어떻게 일을 시작하게 되셨는지 히스토리를 여쭤보았다. 그는 방어적인 태도보다는 소탈하게 웃으며 자신의 과거에 대해 거리낌 없이 또 포장 없이 에피소드 형식으로 재미있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나는 나의 히스토리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나누게 되었으며 우리는 꽤 유쾌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일하면서 겪는 무수한 만남에서 낯선 서로의 경계를 허물었던 것은 이렇듯 진솔한 스토리와 히스토리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일하는 관계'는 내게 특별하다.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지금 함께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2. 일하는 관계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

단기간 일을 하다 일이 끝나면 단기간 가장 가까운 사람인 것이고, 장기간 일을 하게 되면 장기간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될 것이다. 그랬는데 어쩌면 그 이상을 가는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엿보게 되었다. 


일정 확인 차 공동제작사 H대표님과 통화 중이었다. 

'피디님 요즘 어때요? 힘들지는 않으세요?' 

H대표님은 그저 별생각 없이 물어본 안부 인사였는지도 모르겠다.

'아... 사실은 대표님. 저 힘든 것 같아요.' 


툭하고 솔직하게 던지면서 웃었다. 내 상황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하자 H대표님은 오랜만에 작가님과 함께 술 한 잔 하자고 하셨다. 그렇게 '힘들어하는 이 피디를 위한 모임'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그간 회의를 마치고 숱하게 술잔을 나눠왔지만, 그 무수한 술자리는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작가님들의 이야기를 듣고, 작품에 한해서는 공동운명체인 서로를 응원하는 자리에 가까웠다. 이 모임이 그전과 달랐던 것은 내가 회사의 이름과 피디라는 직책을 내려놓고, 오롯이 H대표님과 작가님의 업계 후배이자 동료의 모습으로 있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답답함과 불만을 토로하고, 사람들을 욕하다가, 작품 이야기로 실없이 낄낄거리다 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후진 모습을 보여서 부끄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들어주던 두 분의 얼굴을 보며 깨달았다. 멋진 모습,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어 했던 나를 내려놓고 못난 모습도 기꺼이 드러낸 나와 이를 지켜봐 주었던 사람들 사이에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자리였다는 것을. 


일하는 관계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가 되는 믿음은 어디에서 싹트는 것일까? 몇 가지 조건들이 떠올랐다. 먼저 명확한 역할과 그에 따른 관계가 있었다. 즉 이 작품을 진두지휘 하는 사람은 기획자인 공동제작사 H대표님이다. 나는 이 작품을 함께 제작하는 공동제작사의 기획 피디로 H대표님의 기획을 서포트한다. 다만 나는 H대표님의 부하 직원이 아니고 기획비를 지급한 회사의 담당자이므로 발언권이 있으며, 최소한의 선을 유지한다. 작가님들은 본인의 크리에이티브를 내세우기보단  H대표님의 기획에 따라 집필하고자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의 구심점이 H대표님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고, 존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다음 조건은 이러한 역학 관계 속에서, 작품의 성공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바라보는 것이다. 누군가 다른 마음을 품기 시작할 때, 상황에 따라 태도가 변할 때 믿음은 깨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긴 시간을 쌓아가야 한다는 것이 또 하나의 조건이 아닐까 한다. 긴 시간을 함께 하다 보면, 이 사람의 총체적인 합을 보기 시작한다. 즉 긴 시간 동안 이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 데이터를 쌓는 것이다. 


동반자로 나아가는 관계를 쌓아가는 또 다른 멤버들과의 관계도 이러한 조건을 충족한다. 일하는 관계에서 시작해 각자의 역할이 분명히 있었고, 구심점이 되는 사람이 있으며,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시간을 쌓아가는 중에 있다. 



3. 경계선을 잃어버릴 때 믿음은 무너진다

이렇게 정리하다 보면 '친구끼리 일 같이 하는 거 아니야'와 같은 말이 일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미 실패한 경험이 있었지만 당시 그 관계가 왜 망가졌는지에 대해서 최근까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제대로 파악했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을 테니까. 


고백하자면 나는 '동료'에 대해서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 일하는 관계가 믿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역할과 그에 따른 관계 즉 역학관계가 분명해야 한다. 그런데 정작 내가 만드는 일하는 관계에서는 이를 놓치고 말았다. 우리는 모두 함께하는 '동등한 동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의 배려는 자꾸만 오해를 불러왔고 나의 배려는 쉽게 잊혔다. 나는 내 안 마당을 내어주며 환대했는데 사람들은 그 환대는 잊고 안마당을 마음껏 짓밟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제 좀 정신을 차리라는 어떤 신호라도 되는 듯 6월에 사건이 연달아 터졌다. 어릴 때 놀이터에서 배우지 못한 것이 또 문제를 일으켰다.


모든 것은 내가 경계선을 세우지 못했던 탓이 아닐까? 나는 우리의 일이 갑을 관계로 정의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이런 선한 목표와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이러할 것이라고 착각했다.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고, 이기적이며, 대체로 타인에게 무신경하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에 반하지 않을 때만 협동하며, 자신의 위치를 깨닫게 하고, 잃을 것이 생길 때에야 굽힌다. 



4. 외로운 자만이 멀고 험한 여정 끝에 목적을 달성하리라

관계는 주고받음과 이해관계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일하는 관계는 더더욱. 우리가 여기 모여 있는 이유는 각기 다르지만 목적은 성과다. 작품의 기획자는 나이므로 내가 성과를 내야만 하는 주체였다. 그런데 나는 성과라는 험난하고 긴 여정의 외로움을 감당하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탓할 것이 아니라 그저 그게 두려워서 경계선을 세우지 못했던 것이었다. 내가 하는 모든 선택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만 하는 용기, 내 한 마디 한 마디의 무거움을 느낄 각오, 누군가에게 불편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단단함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지난 3월에 사임(실상은 해임)되신 대표님의 안전한 울타리 속에서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런 부분들은 나와 믿음을 만들어 동료로 나아가고 있는 대표님들이 이미 감당하고 계신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대표였다. 


<반지의 제왕>에서 사우론의 절대 반지를 파괴하러 떠나는 호빗 종족, 프로도를 떠올려본다. 왕의 자질을 가진 인간도 아니고, 종족적인 자질이 뛰어난 엘프나 드워프도 아니다. 연약하고 작지만 유일하게 절대 반지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선한 호빗, 프로도만이 반지를 운반할 수 있다. 처음에는 반지원정대를 결성하여 다 함께 여행을 떠나지만, 안타고니스트 세력의 방해로 위기를 겪으며 결국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도는 홀로 자신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물론 충직한 하인인 샘이 함께하지만, 프로도는 이제 절대 반지 파괴의 여정에 더해 절대 반지의 유혹에서 홀로 싸우는 또 다른 차원의 고통과 외로움을 감당해야 한다. 


절대 반지를 프로도만이 운반할 수 있듯, 기획자만이 기획을 마지막까지 끌고 가는 사람이다. 오로지 내가 가야만 하는 여정이기에 외로운 길이며, 길고 험난하기 때문에 더더욱 짐을 단출하게 싸야 한다. 기획의 핵심과 일의 성과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6월의 마지막 날. 누군가는 내게 조언했다. 지금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 공부라 했다. 살던 대로 살지 마라, 세상을 넓히고, 그릇을 키우는 것이 내가 지금 당장 해야 할 공부라 했다. 이미 기획에 대해서, 좋은 팀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 공부한 지 달. 그간의 공부도 다 소화하지 못한 상태지만 톱니바퀴가 탁 맞춰 돌아가듯 마침 7-8월의 공부 주제는 '사람'이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깨우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6월을 회고하는 지금 시점에서는 나의 생각은 이렇게 맺고자 한다.


내가 평생을 긴밀하게 가져갈 '일하는 관계'를 잘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부터 정교한 경계선을 만들고 집중할 줄 알아야 한다. 물론 결심한다고 해서 바로 바뀌진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누군가의 안마당을 짓밟고 나오게 될 거고, 또 누군가가 내 안마당을 망쳐놓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수와 부족함은 역시도 필연이다. 우리는 그렇게 부둥켜안고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커버 사진

루시 맥레이 <고독한 생존보트> - 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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