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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uth Point Mar 04. 2016

과학소설의 교과서

코니 윌리스 걸작선 <여왕마저도>는 서문만으로도 책의 가치를 보여준다




코니 윌리스가 엮인 어느 사건

'그녀 덕분에 휴고상과 네뷸러상이 과학소설을 쓰기만 하면 주는 그런 상인 줄 알았다.'라는 농담을 던져보았다. 눈앞의 그녀는 한참 동안을 머뭇거리며 흔들리는 눈빛을 여과 없이 쏟아냈다. 나 역시 그녀의 초점 없는 눈동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는 순서가 있기 마련. 내가 말을 했으니 이번에는 저쪽에서 대답할 차례이기 때문이다. 청초한 외모, 호감 가는 인상이었기에 성급히 '취향'을 확인해 보려 던진 한 문장이었다. 어색한 침묵은 오히려 포근함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5분이 흐른 후 자신은 넬레 노이하우스나 더글라스 케네디를 좋아한다고 응수했다. 나도 좋아하는 작가다라며 <빅픽쳐>부터 <템테이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언급하며 각각에 대해 주절거렸다. 의미 없는 주절거림.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머릿속에선 '거기서 코니 윌리스가 떠올게 머라니..' 라는 이미 깨져버린 물잔에 대한 아쉬움이 흘러 넘쳤다.


코니 윌리스가 돌아왔다

그녀가 돌아왔다. 2000년대 후반 그녀의 책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국내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과학소설 작가이면서 3대 과학소설 작가인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클라서, 로버트 하인라인에 밀려 조명받지 못한 그래서 번역본이 제대로 출간되지 않는 작가였다. 그런 그녀가 돌아왔다. 사실 그녀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꽤 기대했다. 그녀는 맛깔난 문체를 가지고 있기에 더더욱 기다려졌다. 같은 동네에 사는 좀 지적인 할머니면서 한 번 입을 열면 끊임없이 소소한 일상을 나열하는 그런 이미지인 그녀. 이번에 출간된 <화재 감시원>과 <여왕마저도>에서 국내 독자들에게 유감없이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줄 것이다. 그녀를 알기 위해선 우선 그녀가 적은 서문을 읽어보라. 책이 어떠한 책인가를 판가름하는 가장 첫 번째 포인트는 저자의 서문이다. 서문에서 독자가 맛깔남을 느끼지 못하면 그 책은 읽을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번의 서문, 역시 뛰어났다. 서문의 도입부를 조금 소개해본다.

작가로서 '최고'의 작품들을 모은 모음집에 서문을 쓰는 건 약간 골치 아픈 일이다. 작품에 대해 너무 많이 이야기하면 줄거리를 미리 흘리게 되고, '최고'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허세 가득한 자랑 같아서 언짢게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각 작품의 발상을 어디에서 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대개 끔찍하게 재미없을 뿐 아니라 실제로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중략)
무슨 말이냐면, 셰익스피어도 희극과 비극을 썼지만 아무도 그의 작품을 두고 두 명이 썼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 더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프랜시스 베이컨을 포함해서 에드워드 드 베르와 엘리자베스 여왕까지 셰익스피어로 의심했던 적이 있긴 했다.
(중략)




<여왕마저도>에 나오는 5개의 단편 중 가장 끌리는 작품, <모두가 땅에 앉아 있었는데>

밤하늘을 올려다보자. 작은 곰자리가 보이는가? 지금의 북극성이 존재하는 바로 그 별자리 말이다. 그 옆으로 살펴보면 작은 곰을 포근하게 감싸 앉으며 용자리가 위치한다. 용자리의 알파별 투반 역시 기원전 2700년경 즉 지금으로부터 5천 년 전에는 북극성이었다. 북극성이라는 것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구의 북극에 위치한 별을 부르는 말이다. 지구의 세차운동으로 인해 북쪽 부근에 있는 별들이 돌아가며 북극성이라는 명성을 가져가고 있는 것이다. 5천 년 전의 북극성이 있었던 용자리에 지구에서 18.8광년 떨어진 알사피라는 별이 있다. 코니 윌리스의 이야기는 이 알사피라는 별에 속한 행성에서 온 외계인 이야기다.(참고로 이 단편에는 외계인이 용자리 알사피에서 왔다는 단 한 문장만 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용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알사피가 어떤 곳인지 설명한 것이다. 알사피 별의 중력권에 속한 행성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지만 확인되지 않았다고 하여 행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녀 또한 이러한 부분을 다 조사해서 알사피 별을 활용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알사피에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알타이르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코니 윌리스는 소설 속의 주인공을 통해 외계인에 대한 본인만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그녀는 외계인이 지구인을 죽이려거나 행성을 차지하여 노예로 삼으려 오지 않을 거라고 한다. 또한, 지구인을 구하기 위해서나 지구 여성과 섹스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라는 입장을 슬며시 드러낸다. 이 소설은 UFO가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대학교에 착륙하면서 전개되는데 이 외계인들은 실제로 지구에 9개월 머물면서 그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다만, 멍한 표정으로 째려보기만 했을 뿐이다.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정부와 정치인들, 소통가, 천문학자, 과학자, 우주 생물학자 등이 파견되지만 쉽사리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9개월간 그들은 묵묵히 째려보기만 했을 뿐이다. 9개월 만에 이 외계인들이 반응한 것은 다름 아닌 '합창'이었다. 그러한 외계인들의 반응을 더 이끌어내기 위해 아주 다양한 합창을 들려주는 주인공, 하지만 쉽사리 그들과 소통하지는 못한다. 이 과학소설의 즐거운 점은 우리가 흔히 아는 캐럴 등이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는 외계인에게 들려주기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부 캐럴은 폭력적이다. 캐럴의 새로운 면을 보고 싶은가? 외계인이 인류를 바라볼 때 문명을 계속 이어갈만한 종족인가에 대해 어떻게 판단할까? 그런 상상력이 궁금해진다면 이 단편을 읽어보라.


<여왕마저도> 단편은 생리에서 시작해서 생리로 끝난다

'생리'를 피하기 위해 여성의 몸에 '회피 장치'를 장착하는 시대. 주인공인 퍼디터는 이러한 인위적인 것을 피하기 위해 사이클리스트라는 단체에 가입한다. 사이클 동호회처럼 보이지만 이 단체는 실상 '생리'를 존중하는 그러한 단체다. 이 단편에서는 '생리'가 자연스러운 시대를 어두운 압제의 시절이라고 묘사된다. '생리'가 사라진 시대가 얼마나 편해졌는지를 지금 태어난 이들은 잘 모른다고 항변하고 있다. 코니 윌리스식 '여성 바라보기'의 단편으로 여성의 억압을 소재로 삼은 거의 유일한 글이다.


<마블 아치에 부는 바람>은 영국 '튜브'를 타지 않고도 느끼게 한다

'나는 과연 서울의 지하철을 그녀가 런던의 지하철을 아는 만큼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 단편이다. 작가는 드러내 놓고 영국 런던의 '튜브(TUBU)'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의 글 곳곳에 애정이 풀풀 흘러넘친다. 런던이라는 도시를 표현하기 위해 꺼내 든 회심의 카드 그건 바로 튜브였던 것이다. 이 단편은 과학소설이라 부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어쩌면 코니 윌리스가 적어 내린 수필에 가깝다. 런던 튜브에 대한 단상 정도랄까?



<영혼은 자신의 사회를 선택한다>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 관한 이야기다

코니 윌리스는 '뉴잉글랜드의 수녀'였던 에밀리 디킨슨을 다시 데려왔다. 흰 옷만 입고 집에서 잘 나오지 않았던 그녀, 에밀리 디킨슨은 살아생전에 인정받지 못했다. 문법과 운율의 파괴로 인정받지 못했던 그녀를 코니 윌리스가 다시 재해석한 작품이다. 코니 윌리스는 그녀에 대해 기존의 사람들이 이해했던 방식과 다르게 접근한다. 그런 접근 방식으로 이 단편을 완성한 것이다. 이 단편에 대해 직접 쓴 후기 마지막 줄이 다음과 같다. "내가 에밀리 디킨스이었다 하더라도 방 안에서만 지냈을 것이다." 코니 윌리스가 단편만큼 심혈을 기울인 후기를 한번 살펴보자. 아 그리고 에밀리 디킨슨의 묘비명은 'called back'이다.

사람들은 에밀리 디킨슨의 '은둔자적인' 삶의 방식에 항상 놀라고 혼란스러워하며, 그녀가 방 안에만 머물고 한밤중에 정원을 가꾸고 방문객들이 부르러 올 때마다 위층으로 사라졌던 것에 대해 온갖 이론을 제시해왔다. 우울증, 햇볕을 쬐면 안 되는 피부 상태, 결핵성 피부병...(중략)
하지만 난 그녀의 행동을 전적으로 이해한다. 그녀가 살았던 곳은 다름 아닌 매사추세츠 주의 앰허스트 시였다! 그녀는 마차 타기를 죽음과, 책을 범선과, 겨울의 불빛을 '성당의 선율이 지닌 무게'와 연결 지을 수 있는 정신세계를 가졌던 사람이었다. (중략)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운율이 맞는 시들을 좋아했고, 온갖 일과 사람에 대해 평가하기를 좋아했다. "디킨슨네 여자애가 뭐라고 했는지 들으셨어요?"


<마지막 위네바고>는 일상의 멸종을 보여준다

마지막 남은 캠핑카, 그것을 촬영하러 가던 길에 보게 된 자칼의 로드 킬 사고. 처음에는 어리둥절 하다. 작가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안개가 자욱하다. 미궁 속을 헤매다가 결론에 이르면 멸종이란 어떠면 커다란 것이 아니라 매 순간순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좀 더 자극적으로 적어도 될듯한 글을 소소하게 써 내려갔기에 말이다.


그녀에 대한 평가

코린 윌리스의 글들은 시작 부분에서부터 한참을 헤맨다. 중반 이후에서야 작가가 이야기하려는 것을 깨닫는 그러한 구조의 반복이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나 역시 그녀의 문체를 좋아라하지만 썩 달갑지만은 않다. 그녀가 서문을 써 내려가는 것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녀는 과학소설인 SF를 더욱 맛깔나고 흥미진진하게 쓸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담담히 써 내려가는 그녀의 문체는 그래서 좀 더 자극적인 과학소설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맞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나 또한 포함된다. 하지만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최고' 작품들이 반갑기만 하다. 한글로 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자극되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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