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언어로 표현되는 것의 의미
우리의 감정은 색과 같다.
빨강과 주황 사이에 무수한 색조가 존재하듯,
슬픔과 분노 사이에도 이름 없는 감정들이 연속 스펙트럼처럼 흐른다.
20대, 사랑을 배울 무렵이었다.
내가 처음 사랑을 경험하고 나서 깨달은 것은 내 안에 일어나는 복잡한 감정들을 표현할 단어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스무 살, 나는 롱디를 선택했다.
서울과 상해였다. 사랑도 배우기 전이었고, 거리도 감당할 줄 몰랐다. 그 둘이 만나자 내 안에서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감정들이 끓어올랐다. 그리움일까, 외로움일까, 불안일까.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아는 단어로는 내 감정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물리적 방법이 없었기에 나의 감정은 빠르게 극값에 도달했던 것 같다. ‘좋다’, ‘서운하다’, ‘짜증 난다’ 등 이 몇 개의 단어로는 내 마음의 미묘한 업앤다운과 텐션을 담아낼 수 없었다. 내 감정의 해상도를 높여줄 단어들이 필요했고, 그때부터 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내 감정이 슬픔과 우울 사이 어디쯤에 있을 때, '나는 슬퍼'라고 말하면 두 단어 사이를 진동하고 있던 감정은 슬픔 쪽으로 수렴한다.
언어는 진동하는 감정을 하나의 지점으로 고정시킨다.
'슬프다'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쓰는 사람은 우울함도, 허전함도, 아쉬움도, 쓸쓸함도 모두 '슬픔'이라는 하나의 말상자에 담아버린다. 마치 빨강, 주황, 분홍을 모두 '빨간색'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그러면 세상은 정말로 온통 슬픔으로 가득 차 보인다. 열 가지 감정을 한 단어로만 인식하니, 인생이 그 한 가지 감정으로 가득 찬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감정의 어휘가 가난하면, 감정의 경험도 가난해진다.
감정은 연속적으로 존재하기에 그 경계를 포착하기 어렵다. 우울함일까, 외로움일까, 아니면 그 사이 어디쯤일까. 이름 붙여지지 않은 감정들은 처리되지 않은 정보로 우리 안에 쌓인다. 뇌는 이 정의되지 않은 데이터들에 과부하를 느낀다. 마치 정리되지 않은 서랍처럼, 우리는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느낌이 언어를 만나 생각이 되는 순간, 변화가 일어난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한때 자주 외로움을 느꼈다. 친구들은 소개팅을 시켜줬지만 그것으로 해소되지 않았다. 내가 정말 외로웠던 걸까? 나는 내 감정을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나는 전공이 맞지 않아 방황을 하고 있었다.
어른들은 내게 조언을 해준답시고 “네 꿈이 뭐야?”라고 물었다.
“제 꿈은 가슴 뛰는 일을 찾는 거예요.”
“누구나 가슴 뛰는 일을 찾고 싶어 해. 하지만 쉽지 않아. 그런 꿈 말고 장래희망 말이야.”
꿈이 뭐냐고 물어놓고, 그런 꿈은 꾸면 안 된다는 대답이 내가 외롭다는 감정을 느끼게 했다.
"나는 지금 외롭다기보다는,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에 가깝다." 내 감정이 이 문장에 도달했을 때, 나는 비로소 내 감정의 뿌리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외로움이라면 누군가의 존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받지 못함이라면, 필요한 것은 존재가 아니라 공감이다. 감정이 정의되자, 내가 나아갈 방향도 선명해졌다.
이 깨달음은 내 인생을 조금 편하게 만들었다. 감정을 언어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휘를 늘리는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주체자에서 벗어나 관찰자가 되어 내 감정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일이다. "외롭다"는 하나의 평면이 "이해받지 못한 외로움"이라는 입체로 변하는 순간, 나는 비로소 그 감정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감정이 풍부해지던 그 시절, 나는 자연스럽게 여러 예술을 접하고 즐기게 되었다.
책, 영화, 연극, 음악, 그림 등 단어 하나로 설명되긴 어렵지만, 맥락 안에서 전달되는 감정의 에너지는 언어보다 나의 감정을 알아차리는데 더 효과적이었다.
그중에서도 음악이 내게 가장 큰 위로가 되었는데, 그 이유를 생각하다가 언어와 음악이 가진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음악과 언어의 공통점은 분절성이다.
분절성: 연속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를 불연속적으로 끊어서 표현하는 특성.
음계 역시 도와 레 사이에는 물리적으로 무한한 주파수가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 연속적인 소리의 스펙트럼을 12개의 반음으로만 나눈다. 언어가 감정의 연속 스펙트럼을 ‘기쁨’, ‘슬픔’, ‘그리움’ 같은 단어들로 분절하는 것처럼. 피아노 건반에서는 이 분절성이 시각적으로도 드러난다. 흰건반과 검은건반으로 명확히 구분된 88개의 음들. 그 사이의 미세한 주파수 차이는 존재하지만 우리가 인지하고 사용하는 것은 이 분절된 음들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분절된 음들이 조합될 때 오히려 연속적인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분절적인 언어 또는 음악이 연속 스펙트럼인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분절된 단어나 음들이 조합될 때, 우리의 감정에 맞는 파동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어떤 화음은 안정감을, 어떤 화음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시인이 여러 단어를 엮어 미묘한 감정의 결을 만들어내듯, 작곡가는 여러 음을 배열하고 리듬과 다이내믹을 더해 언어로는 포착되지 않는 감정의 뉘앙스를 표현한다. 이 점에서 나는 언어와 음악은 결이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가끔 음악은 언어와 감정의 다리가 된다.
쇼팽의 녹턴을 들을 때, 나는 ‘외롭다’와 ‘그립다’ 사이 어디쯤의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슬픔도, 단순한 그리움도 아니었다. ‘슬픈데 슬프지 않았다.’, 거나 ‘누군가가 곁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면서 동시에 이 고요를 혼자 간직하고 싶었다.’였다. 이 복잡한 감정을 언어로 풀어쓰려면 모순된 문장 안에 숨겨진 호흡을 읽어내야 하지만, 쇼팽의 멜로디는 3분 안에 그 모든 것을 전달했다.
그렇다면 음악이 언어보다 우월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음악도 언어처럼 분절된 도구다. 음악은 개별 음들의 조합이고, 화음이라는 단위들의 배열이다. 다만 음악은 언어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내 감정에 먼저 형태를 부여할 수 있었다. 내 머릿속에서 문장이 만들어지기 전에, 쇼팽이 이미 그 감정에 선율이라는 형태를 준 것이다.
음악이 위로가 되었던 이유는 음악은 분절된 음계라는 도구를 사용하면서도 다양한 기법으로 감정의 연속 스펙트럼을 재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템포의 미묘한 변화, 음량의 점진적 증가, 화음의 미세한 불협화음 등 하나의 음계로 여러 레이어를 표현할 수 있다.
언어 또한 그렇다. 침묵을 표현하는 글자간격, 무성의 언어인 기호, 기본 정서를 나타내는 글씨체 등 다양한 요소로 감정의 입체적인 묘사가 가능하다.
즉, 감정을 분절적 도구로 쪼개고 이를 다시 재조립하는 것은 2D의 감정을 3D로 만드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감정을 느끼는 이유고, 감정을 다뤄야하는 이유다.
분절되지 않은 감정은 혼돈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형체 없이 떠돌며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하지만 시인이 적절한 단어를 찾아내고, 작곡가가 적절한 음의 배열을 찾아내듯, 우리가 우리 감정에 어떤 형태(언어든 멜로디든)를 부여하는 순간, 그 감정은 비로소 인지 가능한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언어든 음악이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연속적인 감정을 분절할 수 있는 도구였다.
음악이 나를 위로했던 것은 내가 아직 언어로 만들지 못한 감정들에 형태를 부여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형태를 따라 나는 천천히 내 감정을 탐색할 수 있었고, 결국 나만의 언어를 찾아갈 수 있었다. 음악은 감정과 언어 사이의 다리였다.
언어는 단순히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다.
언어는 감정을 인지하게 하고, 인지된 감정은 우리가 스스로를 이해하고 돌보는 출발점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인생에서 언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이유가 된다.
더 정확한 언어를 찾는다는 것은, 더 정확하게 나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정확히 이해할 때, 비로소 나는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향해 걸어갈 수 있다. 음악이 그랬듯, 언어는 우리에게 감정의 지도를 건넨다. 그 지도를 들고 우리는 우리 내면의 광활한 풍경 앞에 설 수 있게 된다.
>> 다음은 감정이 언어로 인지되어야 하는 이유를 뇌과학적인 관점으로 설명해 볼 예정이다.
https://youtu.be/-mUWjHAjMGk?si=jKGqts43olAQ5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