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세의 뉴욕은 잔인했다

New York, USA, 2014

by 자민

카드 명세서는 숫자로 쓰인 일기다. 어디에서 시간을 보냈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요즘 주된 감정이 무엇인지 등 그 사람의 취향, 생활 반경이 보인다. 마치 그 사람과 긴 대화를 나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카드 명세서처럼 핸드폰의 사진첩 또한 한 사람의 내면이 남긴 지문이다. 특히 여행을 다녀온 뒤 사진첩을 열어보면 내가 무엇에 시선을 빼앗겼는지, 무엇에서 영감을 받았는지가 드러난다. 사진첩 안에 남겨진 사진들은 그 여행지에서의 나 자신이다. 그래서 과거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요즘은 조금은 다른 나를 만나곤 한다.



당시 내 핸드폰에 남겨진 나의 관심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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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문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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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도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마트 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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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관심없는 뷰티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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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옷 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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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폴 고티에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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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에 관심이 없어도 구매욕 생기는 윌리암 소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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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헌책방은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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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인테리어 요소, 조명 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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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 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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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피티 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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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샵 쇼핑






2014년 2월.

패션 관련 일을 정리한 뒤 처음 맞는 겨울이었다. 끝과 시작 사이, 어디에도 아직 속하지 않은 시간이 내게 주어졌다. 목적 없이 자유롭게, 끝과 시작 사이에 멈춘 일시적인 자유를 누릴 권리를 스스로에게 부여한 이상적인 시간이었다.


그 무렵 뉴욕은 내게는 환상의 도시였다. 시대의 성공, 부, 세련됨을 가진 도시.

초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가 JP모건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 친구 덕분에 2주 정도 친구 집에 머물며 뉴욕에 있을 수 있었다. 4학년 때 미국으로 떠난 친구였지만, 그 뒤로도 연락이 끊기지 않은, 내가 오래도록 아끼는 친구다.


친구가 퇴근하기 전까지는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었다. 벌써 12년 전이라 그때의 동선과 일정이 선명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당시 이상봉 디자이너의 첫 뉴욕 쇼도 있어서 잠깐 들렀던 기억이 난다. 워낙 옷과 꾸미는 일에 관심이 많던 시기라 뉴욕에서의 하루하루는 유난히 빠르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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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봉 디자이너 첫 뉴욕 쇼, 링컨센터, 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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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진디자이너 브랜드 프레젠테이션, PIER59, NY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뉴욕에서 나는 내 삶의 방향을 보게 되었다.

그 계기가 된 사건이 있다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자연스럽게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블루밍데일즈였던 거 같다. 여느 백화점처럼 분주한 점원들과 손님들, 시즌오프 행사들로 가득 차 있었고, 특별할 것은 없어 보였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과 신발을 둘러보며 천천히 매장을 걸었다. 그러다 한 층의 절반 이상을 신발로 채워 놓은 행사장을 발견했다.

종류가 정말 많았다. 아마 소량씩 남은 디자인들을 모아 시즌오프 가격으로 내놓은 행사였던 것 같다. 튀는 컬러, 특이한 소재, 과감한 디테일 등 당시 내 눈에는 예쁜 신발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유난히 특이한 신발을 좋아하던 나는 직구로 종종 신발을 샀었기에 직접 신어보고 살 수 있는 그곳은 내게 천국이었다. 한국에서 보기 어려운 디자인도 많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한국의 신발 디자인이 훨씬 더 제한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걷는 문화 때문인지, 전반적으로 편안함을 추구하는 듯하다.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디자인과 가격의 신발 행사장은 나의 늪이었다.

백화점 오픈 시간에 잠깐 들른다는 마음으로 들어갔는데, 친구를 만나기로 한 저녁 6시가 될 때까지 밥도 먹지 않고 신발만 보고 있었다. 아무리 시즌 오프 가격이라 하더라도 5-6켤레를 고르니 400불이 훌쩍 넘었다. 결국 신발을 모두 내려놓고, 다음 날 다시 오기로 했다.

다음 날 나는 정말 그 백화점에 갔다. 하루 사이에 물건이 더 채워진 것 같았다. 전날 골랐던 5-6켤레 중에서 정말 마음에 드는 2-3켤레만 추리자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사고 싶은 신발이 10켤레가 넘어버렸다. 더 이상 새로운 신발은 보지 말고 고른 것 중에서 추려보자고 마음먹고 시간을 보는데 오후 4시가 넘었다. 또 하루 종일 백화점에 있던 것이다. 뉴욕에 와서 이틀을 신발 고르는데 썼다고?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골라놨던 10켤레 이상의 신발을 그 자리에 내려놓고 백화점을 나왔다. 그리고 그날이 내가 백화점 쇼핑을 좋아했던 마지막 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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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행사장에서는 사진을 찍을 시간도 없었고, 위 사진은 뉴욕에 있는 동안 마음에 드는 신발 코너가 나오면 일단 찍어두었던 것들.




뉴욕이 무섭게 느껴졌다.

그리고 왜 이 도시가 부의 상징이 되었는지도 알 것 같았다. 도시 전체가 욕망을 자극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 같았다. 우리에게 부족함을 느끼게 하고 그걸 채우기 위해 갈망하게 만든다.

아무도 소비를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소비를 하지 않는 너는 센스가 없다는 걸 느끼게 할 뿐이다. 큰 유리문을 드나드는 늘씬한 금발 여성이 아이콘이 되기도 한다. 맥락이 부여하는 의미들을 개인이 해석하게 하면서 스스로 망각의 유리병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 깨닫고 백화점 문을 나서는 순간조차 내 시선은 자유롭지 못했다. 내 눈은 여전히 소유욕을 자극하는 화려한 디스플레이와 마케팅 문구들에 붙들려 있었다. 눈을 감고 싶었다.


친구를 만나러 가기 위해 나는 5번가를 따라 30블록쯤 걸어 내려갔다. 걸음이 빨라서 한 블록에 딱 5분이 걸렸다. 2시간 넘게 걸어가는 동안 지루한 틈이 없었다. 이틀을 백화점에서 보낸 사실을 반성할 틈도 없이 또 새롭고 예쁜 것에 마음을 뺏기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걸어갔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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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이 나쁜 도시였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곳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선명하게 비추어 준 도시였다. 내가 좋아한다고 믿었던 것들, 중요하다고 여겼던 가치들조차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처음 배웠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정말 나의 취향일까, 아니면 누군가 만들어 놓은 욕망의 이미지에 내가 반응하고 있는 것일까.

당신의 뉴욕은 내게 욕망의 도시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면, 그 화려함 아래에서 오히려 자기만의 질서를 지키고 있던 단단한 도시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뉴욕을 어떻게 보게 될까. 예전과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또 다른 뉴욕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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