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예술가는 뉴욕에서 영감을 얻는다

New York, USA, 2014

by 자민

백화점에서 신발에 정신을 팔렸던 그날 이후, 나는 이상봉 쇼에서 만난 사진작가님께 연락을 했다. 뉴욕을 베이스로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작업하는 1세대 작가님이었다. 뉴욕에 오래 계셨으니 어디를 가야 할지 여쭤보고 싶었다.


- 뉴욕 백화점에서 정신 팔린 이야기

https://brunch.co.kr/@jameenee/83







작가님은 구겐하임 미술관을 가자고 하셨다. 다음 날 우리는 10시 반, 구겐하임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눈이 많이 온 뉴욕의 공기는 차가웠다. 도로와 보도의 눈은 거의 녹았지만 사람의 손발이 닿지 않는 곳에는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 풍경이 유난히 예뻤다.

구겐하임으로 걸어가는 동안 뉴욕의 풍경은 참 아름답게 보였다. 그래서 일정이 끝나면 오늘은 좀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구겐하임 앞에서 만난 선생님이 제일 먼저 하신 말은

“오늘은 안에 있기 너무 아까운 날씨인데? 갤러리는 언제든 갈 수 있으니 센트럴파크나 걸을까?”였다.

마침 눈 구경이 아쉽다고 생각했던 찰나에 너무 좋은 제안이었다.

바람보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더 빠른 뉴욕에서 겨울바람은 매섭다기보다 오히려 생동감 있게 느껴졌다.


센트럴파크 러닝 트랙에 올라섰을 때, 탁 트인 전경 속에는 내가 그동안 보아왔던 뉴욕과는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겨울이라 시야를 가리는 것도 없었고, 뉴욕의 스카이라인은 유난히 선명했다.

추운 날씨에도 러닝을 하는 사람들, 호숫가를 천천히 걸으며 사색하는 사람들, 벤치에 모여 담소를 나누는 동네 아저씨들.

그러다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매달린 나뭇잎 한 장이 선생님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선생님은 내게 그 잎을 보라며 가리키며 말했다.

“마지막 잎새네.”

마지막 잎새

어쩌다 저 나뭇잎은 마지막까지 매달려 있게 되었을까.

저 잎이 떨어지면 나무는 다시 새로운 계절을 준비하겠지.

2월의 끝자락에 우리가 본 마지막 잎새는 끝이 아니라, 봄을 맞이하기 위한 마지막 준비처럼 보였다.


작가님의 시선이 닿은 한 지점, 작가님이 툭 던진 한마디가 뉴욕의 추억을 새겼다. 여행지에서 느끼는 감정 그리고 오랫동안 가슴에 남을 기억이 이렇게 만들어지는 구나.

우리는 목적지 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노란색 호텔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 선생님이 다급하게 말했다.

“카메라 영상 녹화 켜봐.”

선생님은 노란 호텔 정문이 프레임 안에 삐뚤어지지 않게 들어오도록 각도를 잡아주시고, 자신의 휴대폰에서 음악 하나를 재생해 내 휴대폰 마이크 쪽에 갖다 대셨다.

잠시 후, 마치 마법처럼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영화에서 보던 검은 개를 데리고 화면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노란 건물 앞에 노란 택시도 2대가 지나가주고! 마지막에 검은 옷에 검은 바이크까지.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선생님의 다급함이 그제야 이해되었다.

프레임에서 여자와 개가 사라지고 선생님은 음악을 끄며 말했다.


아티스트는 늘 준비되어 있다고. 영감은 따로 받는 게 아니라 일상이 영감이라고.


2014년 겨울, 내가 구하는 삶이 어떤 건지 발견한 날이었다.


이 장면에 어울리는 음악을 바로 꺼낼 수 있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 그리고 그 순간을 알아보는 직관.

아티스트는 삶의 매 순간을 영감이구나. 부러운 삶 같았다. 나는 여행을 가서 시간을 내야 가능한 삶이 일상이라니.


걸어 다니는 데이터 창고 같았다.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되고, 내가 된다는 것.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날 나는 여행에서 무엇을 주워 담아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런 찰나의 감동이었다.


한참을 걷다가 선생님이 좋아한다는 카페에 들어갔다.

마지막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1등으로 세상에 나오려는지 모르겠어. 언제 나오든 1등이 될 수 있는 내공을 쌓아.”

그렇다. 15여 년 전만 해도 ‘최연소’라는 타이틀은 훈장처럼 여겨졌다.

아나운서 손석희의 ‘지각 인생’이라는 말이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달래주는 화제의 말이 될 정도였으니.


나는 늘 지각 인생이었다.

남들보다 늦게 깨우쳤다기보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싫어서 똥인지 된장인지 직접 찍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근성이라 항상 늦었다.

그런 내게 선생님의 조언은 지금까지도 시간을 붙잡는 힘이 되어 주는 문장이다.


그리고 선생님은 인생의 동반자를 강조하셨다.

“루이비통에게 마크 제이콥스가 있었고, 구찌에게 톰 포드가 있었듯이.

혼자 성공한 사람은 없어. 그게 반려자이든 동료이든 형태는 상관없어.”


내가 뉴욕에 온 이유, 이 날 하루만으로도 충분했다.

한국에 돌아가서 나는 다시 뜨거운 가슴으로 살 테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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