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의 시작은 자유에 대해 바로 아는 것
뉴욕에서 돌아온 뒤, 나는 더 과감하게 내 삶을 찾아 나서고 싶었다. 우연이었을까. 카라반에서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전의 나는 약속이 없는 날이 거의 없었고, 매일 자정을 넘어 집에 들어가는 게 일상이었다. 패션위크 시즌인 기간에는 애프터파티까지 야무지게 챙기느라 새벽 3-4시를 넘기기도 했다. 20대의 마지막 젊음이었다고 해두자.
그런 내가 어느 날, 사람들에게 연락이 와도 저녁 자리에 쉽게 나갈 수 없는, 서울에서 80km 이상 떨어진 카라반에서 살게 되었다.
거절을 잘 못했던 나는, 모든 변화는 평균 세 번의 거절이면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도 생긴 게 아닐까. 실제로 세 번쯤 저녁 약속을 거절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술자리가 정리되기 시작했다.
시골에서의 카라반 생활은 다른 차원 같았다. 순간의 시간은 느리게 흐르는데, 하루는 또 금세 지나갔다.
도시에서 내가 누리던 시각적 즐거움은 대체로 옷과 사람이 칠한 공간에서 왔다. 하지만 자연 속에서는 꽃이 곧 시각적 기쁨이 되었다.
내가 꽃을 좋아하게 된 것도 아마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꽃은 하나만으로도 아름답지만, 서로 다른 꽃들이 함께 있을 때 더 아름답다. 우열없이 조화로운 풍경을 보며, 아름다움이 꼭 통제된 형태 안에서만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다.
그리고 비 오는 날이 이렇게 좋은 줄도 그전에는 몰랐다. 땅이 축축해지면 자연의 냄새는 더 짙어진다. 그때 문득 알게 되었다. 내가 흘리는 눈물도 내 감정을 더 진하게 만든다는 것을. 부정적인 감정은 흘려 보내야 할 것이 아니라, 때로는 충분히 젖어야만 눈물 뒤에 감춰진 자기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해가 지면 하루를 마무리할 준비가 시작되었다. 카라반 생활에서 내가 가장 사랑했던 것도 바로 그 감각이었다. 자연의 시계에 맞춰 내 몸이 반응한다는 것. 어두워지면 쉬고, 밝아지면 깨어나는 아주 단순한 리듬이 삶을 생기 있게 만들어주었다.
물리적인 관계가 끊기는 일은 내게 마치 지구를 벗어나 우주 공간에 홀로 놓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게 자유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나를 붙잡는 사람도 없고, 설명해야 할 역할도 없고, 맞춰야 할 기대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내 의지대로 움직이며,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상태가 자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되었다. 의지대로 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주 공간에 떠 있는 존재는 통제권을 벗어나는 건 맞지만 마음대로 날아갈 수 있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중심을 잃고, 방향을 잃은 채, 스스로를 붙잡기 어려운 상태에 가까웠다. 그 이미지는 내가 오래 믿어온 자유의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진짜 자유는 내 뜻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내 안의 과한 집착,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마음, 내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데 있었다.
늘 내가 옳아야 하고, 내가 선택해야 하고, 내가 주도해야 한다고 믿는 마음은 강해 보이지만 사실은 나를 더 쉽게 흔들리게 만들었다. 반대로 자유는 내 욕망을 무조건 실현하는 능력이 아니라, 욕망에 끌려가지 않는 힘에 가까웠다. 그래서 관계가 끊어지고 익숙한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은 단지 상실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붙들고 있던 자아의 틀이 깨지기 시작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성장의 시작은
내 의지가 강해지는 순간이 아니라,
내 에고가 조금씩 가벼워지는 순간에 찾아온다.
서른 살이 되어 다시 쓴 자유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지 않고, 무엇에도 쉽게 끌려가지 않을 수 있는 내면의 힘에 있다는 것이었다.
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타인의 기대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내 안의 과한 욕망과 통제의 습관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질 수 있을 때 삶은 비로소 가벼워졌다. 그렇게 자유의 의미를 새로 정의한 뒤에야 나는 조금씩 진정 자유로운 삶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변할 때마다 내 안의 사전도 함께 업데이트되었다.
돌아보면 이런 감각은 아주 새로운 것이면서도 동시에 오래된 질문이었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자신의 행위는 의식하지만, 그것을 결정하는 원인은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자유롭다고 여기는 이유를, 자신이 하는 행동은 의식하면서도 그것을 낳는 원인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그 문장을 읽고 나니 내가 한때 자유라고 믿었던 많은 순간들이 사실은 내 의지의 산물이라기보다, 설명되지 않은 욕망과 불안, 오래된 습관의 결과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유는 단순히 바깥의 간섭이 사라지는 상태가 아니었다. 내 안을 움직이는 힘을 이해하고, 내 감정과 충동의 원인을 조금씩 알아차릴 때 비로소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말이 내게는 뒤늦게 실감이 되었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자유는 충동의 즉각적 표출보다,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는 쪽에 가까웠다.
결국 카라반 삶이 보여준 자유는 자연을 닮는 것이었다.
자연은 애쓰지 않으면서도 제자리를 지키고,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제때를 안다. 바람은 불어야 할 때 불고, 나무는 말없이 계절을 통과하며, 해는 누구의 인정도 바라지 않고 제 빛을 다한다. 그때 자연과 대화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내 안의 소음을 줄이고 사물의 리듬을 느끼는 삶, 억지로 앞서가려 하기보다 자연과 호흡을 맞추는 삶.
예전엔 ‘자연을 벗 삼아’라는 말이 그저 시적인 표현처럼 생각했는데, 이제는 왜 그렇게 많은 문장과 시 속에 그 구절이 반복되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자연은 인간보다 느리지만 더 정확하고, 조용하지만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그래서 나이 드는 일이 조금씩 좋아진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단지 시간이 흐르는 일이 아니라, 오래전 사람들의 지혜를 문장으로만 이해하던 자리에서 이제는 몸으로 체험하는 자리로 옮겨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삶은 점점 해석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 된다. 더 많이 소유해서가 아니라, 더 깊이 느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성장이라는 것은
대단한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라,
삶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믿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