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ifornia-Utah, USA, 2018
카라반에서 느린 1년의 시간을 보내며, 나는 내가 내 의지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어쩌면 진짜 내 의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 의심은 내가 얼마나 많은 기준을 내 선택인 것처럼 받아들여왔는지 돌아보게 했다.
사회적 억압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을 깨달았지만, 동시에 그게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는 것도 배웠다. 진정한 자유는 단지 외부의 억압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내 안에 깊이 들어와 있는 기준들까지 스스로 의심하고 다시 선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자유를 얻었지만, 동시에 자유를 잃은 것이다.”
현대인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Modern man lives under the illusion that
he knows what he wants.)
-에리히 프롬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그는 근대인이 자유와 자의식을 얻었지만, 그 불안을 견디지 못해 다시 순응과 의존으로 도피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우리가 실제로는 ‘원하도록 요구받은 것’을 욕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 역시 처음에는 자발적인 선택 속에서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자발적인 선택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습관처럼 하고 있는 일상마저 누군가 짜놓은 구조 안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는 단지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아닌 것이 명백해졌다.
카라반에서 1년을 지내며 자유를 찾은 나는 행복했을까.
행복하지 않았다. 자유를 알게 되고 내가 처음 경험한 감정은 불안이었다.
자유는 그리 가볍고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자유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명료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간판을 보며 생각했다. 이 간판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예를 들어, Noah’s Bagels을 보고 국수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까. Hat makers Goorin Bros를 보고 모자 만드는 형제를 떠올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간판은 친절하지만 동시에 해석의 방향을 미리 정해놓는다.
미국 여행을 하면서 ‘어쩌면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모습도 이와 같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간판이 이미 무엇을 파는 곳인지 명확히 규정하듯, 우리가 자유라고 믿는 많은 선택 역시 이미 이름 붙여지고 분류된 것들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표준화된 행복의 목록 중 하나를 선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Rattlesnake & Rabbit hotdog다.
방울뱀과 토끼 핫도그라니!! 친구가 생각보다 맛있다고 해서 사긴 했지만, 그 이름이 주는 그 공포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런데 막상 한입 먹어보니 생각보다 훨씬 맛있어서 무척이나 놀랐다.
내 인생에도 이미 붙여진 이름 때문에, 아직 만나보지도 않은 채 두려워하고 지나쳐버린 것들이 있지 않을까. 단지 우리 문화권의 익숙한 경험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겁을 내듯, 그렇게 이름만 보고 내 삶의 가능성을 놓치지 않길 바랬다.
하지만 언어가 사라진 자연은 모두에게 다른 영감을 준다. 누군가는 위로를 받고, 누군가는 감사를 느끼고, 누군가는 잊고 있던 질문과 마주한다.
그곳에는 간판처럼 우리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끄는 이름도,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미리 정해주는 문장도 없다.
그래서 자연 앞에서의 자유는 주어진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일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스스로 발견하는 일이다. 아직 언어가 닿지 않은 감각 앞에서 자기만의 의미를 발견하는 여정이 시작된다.
내 안에서 어떤 울림으로 자라나는 감각을 붙잡고 천천히 지켜보는 일. 자유란 그렇게, 이름 붙이기 이전의 나를 만나는 순간에서 시작되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에게 자유는 단지 억압이 없는 상태도 아니고, 고립된 개인주의도 아니다.
자유는 자기 생각으로 판단하고, 타인과 진실하게 관계 맺고, 사랑하며,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다. 다시 말해, 자유란 혼자 남겨지는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면서도 세상과 생명력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중세에는
태어날 때부터 신분과 역할이 정해지기에 신분과 역할이 비교적 분명했고, 개인의 선택 폭도 넓지 않았다. 그래서 그 당시 자유는 질서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와 권리가 법과 관습 안에서 보호받는 상태에 가까웠다. 즉, 중세인들에게 자유는 선택의 무한함보다 소속과 안정의 의미가 더 강했던 것이다.
반면 근대 사회는
인간을 전통적 권위로부터 해방시켰다.
기존 질서는 점차 약해졌고, 인간은 더 많은 자유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자유는 단지 해방만을 뜻하지 않았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해방이었지만, 동시에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누구도 대신 말해주지 않는 상태이기도 했다. 삶의 방향을 미리 정해주던 틀이 사라지자 인간은 해방과 동시에 고립과 불안을 경험하게 되었다. 즉, 근대 사회에서 자유란 단순히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고독과 불안, 그리고 선택의 책임까지 스스로 감당하는 일이 된 것이다.
하지만 프롬은
인간이 고독과 불안, 선택의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그 부담 앞에서 자유를 온전히 누리기보다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 한다고 보았다.
사회는 그런 사람들에게 마치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도피처를 제공하고, 사람들은 자신이 도피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 안으로 들어간다.
민주사회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고 믿는 가운데, 사회가 바라는 취향과 감정, 성공의 형식에 조금씩 자신을 맞춰간다. 무엇을 좋아해야 하는지, 어떤 삶을 성공이라 부르는지, 어떤 감정을 건강하다고 여기는지까지 이미 정리된 기준 속에서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선택이라 믿는다. 민주사회는 자유를 허락하는 동시에, 그 자유를 안전하게 소비하는 방식까지 함께 제공하는 것이다.
그 결과 모두가 자유로운 개인처럼 보이지만, 실은 비슷한 욕망과 비슷한 언어, 비슷한 삶의 방식을 반복하게 된다. 자유의 불안을 견디지 못한 개인은 결국 표준화된 삶 속으로 들어가 안정을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표준화는 강제가 아니라 자유의 얼굴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이처럼 자유는 결코 가볍고 쉬운 것이 아니다. 자유는 단지 억압과 권위, 전통과 강제로부터 벗어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진짜 자유란 구속이 없는 상태를 넘어, 자신의 이성과 사랑, 자발성에 따라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상태다.
내가 알고 있던 자유가
진짜 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건,
단지 자리를 비우는 것이다.
비워진 자리에서 내 목소리를 다시 듣고,
내가 감당할 삶을 스스로 골라내는 데서
진짜 자유가 다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