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지원까지 D - 11개월)
어쨌든 어설프지만 제법 정돈된 리스트를 얼기설기 만들어 놓고 나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고, 무엇부터 해야 할지도 명확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시작했다’는 감각만으로도 충분히 뿌듯했다.
다이어리 한쪽 구석에는 아이비리그 대학 몇 곳,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나와는 세상에 아무런 접점이 없던 학교 몇 곳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작년 말 회사에서 한두 개씩 나눠준, 혹시 어디엔가 흘려도 눈에 띄지 않을 법한 다이어리였다. 누가 볼 리도 없는데도 괜히 마음이 쓰여, 가장 뒤에서 한 장 앞 페이지에, 흐린 필기체로 조심스럽게 끄적여 두었다. 생각만 하는 것보다 글로 적는 편이 이루어질 확률이 높다고 해서였는지, 아니면 메모가 일상인 내가 이런 중요한 마음을 앞쪽에 적어 두면 수많은 하루의 기록 속에 묻혀 버릴 것 같아서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남이 볼까 흐리고 조그맣게 그러나 가지런히 적힌 학교 이름들은 그해 내내 나와 함께했다.
그 학교들이 미국의 어느 주에 있는지, 캠퍼스가 어떤 모습인지, 입학처에 이메일 한 통조차 보내본 적이 없으면서도, 나는 이미 그곳을 다니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강의실에 앉아 노트를 펴는 장면, 도서관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모습, 눈 덮인 캠퍼스를 걷는 나, 그리고 그 학교를 졸업한 뒤 다시 시작하는 월스트리트나 실리콘밸리에서의 회사 생활까지.
물론 이런 공상은,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현실의 나에게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내일 아침에도 출근해야 하고, 보고서를 써야 하며, 주말에는 또 사무실로 나가야 했다. 삶은 여전히 이전과 똑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 리스트를 다시 펼쳐 들고, 아주 현실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MBA와 비 MBA를 나누고, 각 프로그램에 필요한 기본 요건을 하나씩 적어 내려갔다.
학점, 시험, 경력, 추천서, 에세이.
이제 이 행복한 공상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구체화시켜야 했다.
“추천서.”
지금은 이직한 선배 중에 누구에게 부탁할 수 있을까. 학부 시절 논문을 지도해 주셨던 교수님께도 오랜만에 연락을 드리면 좋을 것 같다. 아무 연락도 없다가 연말에 갑자기 “추천서를 써 주세요”라고 하면 너무 염치없을 테니, 미리 안부를 묻고 가끔이라도 연락을 이어 가야겠다. 추석 즈음에는 작은 선물도 챙기면 좋겠다. 다만 이건 마지막 단계이기도 하니, 그때 가서 다시 고민하기로 한다.
“공인 영어.”
토익은 취업할 때 봤지만 이미 만료됐다. 그럼 토플을 보면 되겠지.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가장 빠른 날짜인 2월 중순 시험을 예약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적힌 단어.
“학점.”
어? 나, 학점이 뭐였지?
영국에는 Degree Classification이라는 제도가 있다. First, Upper Second, Lower Second 같은 방식으로 학업 성취를 분류한다. 나는 그 체계에 익숙한 채로 살아왔고, 미국식 4.0 만점의 GPA라는 개념은 그때 처음 제대로 마주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환산표를 열어 숫자를 대입해 보았다. 화면에 뜬 내 점수는, 내가 막연히 상상해 오던 리스트 속 학교들의 이른바 안정적인 커트라인보다 한참 아래였다. 환산표가 공인된 기관의 것도 아니어서, 혹시 다른 웹사이트에서는 결과가 달라질까 싶어 키워드를 바꿔 가며 검색을 반복했다. 예상대로 4.0 만점으로 계산할 때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세를 바꿀 만큼의 차이는 아니었다. 환산 방식을 어떻게 바꾸느냐는 선택의 문제일 수 있어도, 과거의 선택과 하루하루가 쌓여 숫자로 남은 대학 시절의 성적표 자체는, 말할 것도 없이,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학교 시절의 나는 학교보다 여행이 훨씬 좋았다. 도서관 대신 미술관에 있었고, 강의실보다 낯선 도시의 거리 위에 있는 시간이 더 편했다. 휴대폰에는 늘 저가 항공권 비교 사이트가 열려 있었는데, 목적지를 정해두기보다는 ‘지금 떠날 수 있는 곳’을 기준으로 화면을 내려보곤 했다. 당일 출발 최저가 항공권이 하나 걸리면, 그게 스페인의 그라나다(Granada)이든 프랑스의 그르노블(Grenoble)이든 상관없이 예약 버튼을 눌렀다. 계획은 늘 비행기나 기차 안에서 세웠다. 아니, 세우지 않아도 괜찮았다.
벨기에의 브뤼허(Brugge)에서는 지도도 없이 골목을 헤맸다. 돌바닥 위를 걷다 보면 작은 광장이 나오고, 또 그 끝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카페나 몇백 년은 되었을 법한 레이스 가게 따위가 하나씩 숨어 있었다. 모로코 마라케시의 구시가지(Medina)에서는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카페에 앉아 도톰한 유리잔에 담긴 달콤한 민트티를 마시며 사람들을 바라봤다. 흥정하는 소리,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사이에 앉아 있으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장 조용해졌다. 그 시절 나는 어딘가에 ‘도착’하는 것보다, 계속 이동 중인 상태를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친구들과는 스타트업 이야기를 했고, 전공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미래를 그렸다. 우리는 늘 “나중에”를 이야기했다. 그 나중이라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지금보다 조금 더 자유롭고, 조금 덜 불안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졸업이 가까워질 즈음, 나는 전공을 살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성적이 떨어지는 건 감수하되, 자격증과 취업 준비에 시간을 쓰기로 했다. 그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적어도 그때의 나는, 내가 싫어하는 방식으로 살지 않겠다는 선택만큼은 분명하게 하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그 모든 선택들이 숫자로 환산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경력이나 GRE, GMAT 같은 시험으로 어느 정도는 보완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화면에 뜬 숫자를 마주한 순간, 머릿속은 금세 냉정해졌다. 이 학점으로 내가 그려 온 석사 과정에 합격하는 장면은, 아무리 좋게 상상해 보아도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평균적으로 미국에는 약 50만 명에 이르는 석·박사 유학생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매년 신규로 석사에 지원하는 사람만 해도 대충 짐작해 수십만 명에 달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수백 명, 많게는 천여 명이 “흔히 들어본 그 학교, 그 전공”에 동시에 지원한다고 가정했을 때, 커트라인 아래에 있는 성적을 가진 나를 굳이 뽑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커리어, 비슷한 배경이라면, 학교라는 공간의 특성상 결국 이전 학교에서의 성취도를 먼저 보게 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 순간, ‘도전해 볼 수는 있다’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 사이에는 생각보다 훨씬 큰 간극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또렷해졌다.
그러던 중, 가벼운 마음으로 예약해 두었던 토플 시험 날짜가 다가왔다. 영국에 있었던 터라 IELTS는 익숙했지만, 토플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영어 시험인데 뭐”라는 마음으로 넘겼지만, 막상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야 할 것 같아 기출문제집을 한 권 샀다. 몇 장을 넘기다 말고, 다시 바빠진 업무에 밀려 그 책은 거의 새 책처럼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좋았다. 주말 출근 때문에 시험을 취소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히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시험장으로 향했다. 시험이 끝나면 모처럼 한가한 주말 오후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시험을 봤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겠지만,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커피를 마실 수도 있겠다. 그날은 차를 두고 나섰다. 그렇게, 별것 아닌 일처럼 일상의 일부로 시험장을 향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시험을 본 지 몇 년이나 지났던 터라, 혹시 나 혼자만 유독 나이 들어 보이는 건 아닐까 괜히 거울을 한 번 더 보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 보니,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연령대가 섞여 있었다. 아직 교복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한 얼굴부터,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들까지. 예전에 대학 입학을 위해 보았던 IELTS 시험장보다 센터는 훨씬 컸고, 사람도 훨씬 많았다. 영국에서 공부하던 시골쥐가 도시에 온 기분이랄까. 안내에 따라 자리를 찾아가며, 묘하게 부담보다는 설렘이 앞섰다. 이미 바꿀 수 없는 학부 성적을 붙들고 머릿속에서만 수백 번 같은 생각을 반복하느니,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라도 해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날의 나는, 아주 작은 승리라도 간절히 필요했다.
하지만 토플은, 분명 IELTS와 같은 ‘영어 시험’이면서도,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모든 과정을 컴퓨터로 치른다는 것부터 낯설었다. 지문은 펜이 아니라 마우스로 훑어야 했고, 답은 키보드로 입력했다. 시험의 리듬과 호흡 자체가 달랐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건 시험실의 풍경이었다. 같은 공간 안에 수십 명이 나란히 앉아, 각자 헤드폰을 낀 채, 거의 동시에 말을 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마주 앉아 대화하듯 치르는 시험이 아니라, 모두가 허공을 향해 혼잣말을 쏟아내는 어떤 소설 속 장면 같았다.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그 안에 직접 앉아 보니 감각은 전혀 달랐다. 내가 내는 목소리, 옆 사람의 말소리,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답변이 한꺼번에 겹쳐졌다. 같은 질문을 받고 있는지, 전혀 다른 문제를 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내가 지문을 듣는 순간에도 누군가의 목소리는 기어이 귓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집중하려 할수록 주변의 소음은 더 또렷해졌다. 마치 동시에 수십 개의 라디오가 켜진 방 한가운데 홀로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시험이 끝난 뒤, 모처럼의 주말이었지만, 나들이는커녕 곧장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하루가 끝났다. 괜히 바람을 쐬고 싶지도 않았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오니 책상 위에 토플 교재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몇 번 펼쳐보지도 못한 책이었다. 아니, ‘못 펼쳐봤다’기보다, 산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책이었다. 방치했다고 말하기도 민망할 만큼, 먼지조차 앉을 시간이 없었을 정도였다. 표지는 여전히 새것처럼 빳빳했고, 책등에는 사람 손이 닿은 흔적조차 없었다. 시험은 이미 끝났는데, 그 책만은 아직도 출발선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며칠 뒤, 결과를 확인했다.
참담했다.
석사를 결심한 지 몇 주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 숫자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스쳤다.
“못 갈지도 모르겠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벌써 끝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의 나는, 내가 정말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이제부터 뭘 해야 하는지 조차 가늠하지 못한 채, 숫자 하나 앞에서 멈춰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