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석사? 전… 아무것도 몰라요

1월 (지원까지 D - 12개월)

by James

그 당시 나의 상황을 먼저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중위권 대학, 중위권 학점, 국내 증권사 경력 2년 반. 대외활동도 없었고, 논문도 없었다. 영미권에서 학부를 다녔기 때문에 영어 자체에 대한 부담은 크지 않았지만, 정작 쓸 수 있는 공인 어학 성적은 이미 만료된 상태였고, 몇 년간 사용한 영어는 엑셀의 수식이 전부였다. 무엇보다 나는 증권사에서 치열하게 풀타임으로 일하고 있었다. 한 달에 세 번 이상은 주말 출근을 했고, 평균 퇴근 시간은 밤 10시쯤이었다. 일이 몰리면 새벽까지 사무실에 남아 있는 날도 드물지 않았고, 야근을 하다 회사 휴게실이나 수면 카페에서 잠을 자고 다시 아침에 일을 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회사 책상 서랍 맨 아래 칸에는 새 셔츠와 속옷을 넣어 두기도 했다.


금융 업계라는 곳이 원래 그렇다. 이직은 잦고, 성과 시즌이 다가오면 공기부터 달라진다. 복도는 조용해지고, 회의실 문은 더 자주 닫힌다. 누가 어디로 옮긴다는 소문이 돌고, 어떤 팀은 통째로 사라진다. 숫자 하나로 지난 몇 년의 시간이 정리되는 세계다. 그런 환경에서 “석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고, 석사 준비를 위해 시간을 넉넉히 확보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앞에서 말했듯, 석사는 내게 꿈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 그래서 접근 방식도 단순했다. “딱 1년만 해보자.” 마침 그때가 1월이었고, 연말연초는 그나마 업무가 조금 느슨해지는 시기였다. “올해 1년만 투자해서, 안 되면 말자.” 그렇게 마음을 먹었던 순간이 아직도 또렷하다.


그날이 유독 추웠던 탓인지, 출근길 지하철에서 보았던 아침 헤드라인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취업문 더 좁아진 청년들, 역대급 스펙 쌓기 경쟁.’ 화면을 스쳐 지나가던 그 문장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않았고, 그저 마음만 먹었을 뿐이었지만, 시작이 반이라고들 하지 않나. 한 해를 시작하며 세우는 수많은 계획들 중 대부분은 하루하루에 풍화되어 흐려지지만, 그래도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는 것 자체는 묘하게 기분 좋은 일이었다. 적어도 그해 1월의 나는, 처음으로 ‘다른 방향’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의 내가 마주한 현실은 단순했다.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했고, 아는 정보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 대학교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들어봤을 법한 대학들의 리스트를 만드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이때 나는 아이비리그가 8개라는 사실조차 처음 알았다. 다만 내가 몸담고 있던 사모펀드 업계에서 배운 방식이 하나 있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받을 때, 우리는 늘 스크리닝부터 한다. 엑셀에 타깃 회사와 유사한 기업들, 혹은 특정 업계의 주요 플레이어들을 쭉 나열해 놓고 비교하는 방식이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나는 그 방식을 그대로 가져왔다.


여기서 말하는 ‘스크리닝’은,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검토할 가치가 있는 대상”을 먼저 걸러내는 작업을 뜻한다. 투자 업계에서는 제한된 시간과 리소스를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아무 기업이나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다. 후보들을 나열하고, 규모, 산업, 재무 상태, 성장성 같은 기본 조건으로 빠르게 비교한 뒤 “검토해 볼 만하다”, “우리와 맞지 않는다”를 1차로 가른다. 그 과정이 바로 스크리닝이다. 내가 대학 리스트를 만들 때도, 그와 똑같이 했다. 수백 개의 학교 중에서, 일단 “볼 만한 후보”를 먼저 골라내는 작업이었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쉽게 예상할 수 있겠지만, 스크리닝이라는 것은 결국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판단과 로직이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한다. 문제는, 당시의 나는 미국 석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어디 가서 질문을 할 수도 없었고, 이 리스트가 언젠가는 전부 뒤집힐 거라는 걸 어렴풋이 알면서도, 일단 만들어야 했다.


image_6268323311490680807404.jpg?type=w800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만 알고 있는 그냥 직장인, 이쯤 되면 ‘그냥 직장인’이라는 말이 오히려 과분하게 느껴진다. (사진: MBC)


아직 일이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전이던 1월 중순, 전날 야근을 하고 맞이한 토요일 아침에 “오늘 하루 안에 방향만이라도 잡자”는 생각으로 컴퓨터를 열었다. 챗지피티도 없던 시절이라, 정말 막연하게 내가 아는 대학 이름들과 미국 대학 순위를 펼쳐놓고,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학교들을 엑셀에 하나씩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때 많이 참고했던 웹사이트는 Financial Times MBA Rankings, Poets&Quants, QS Global MBA Rankings이다. 먼저 약 20개 학교의 이름을 적고, 각각의 웹사이트에 들어가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될 만한 과정, 혹은 흥미가 가는 코스를 찾아 적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새 50줄이 금세 채워졌다. 그다음에는 석사 지원 스케줄, 주요 요건들, 학점 기준, 공인시험 점수, 추천서 같은 항목들을 하나씩 채워 넣기 시작했다. 불과 하루 만에, 내가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해 본 학교들의 ‘1차 후보 리스트’가 만들어졌다.


여담이지만, 정작 내가 훗날 입학하게 된 브라운은 이 리스트에 없었다. 이름이 낯설어서였는지, 전통적인 MBA가 없어서였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처음부터 완벽할 필요는 없다는 것. 미국에는 4,000개가 넘는 대학이 있다. 브라운이라는 이름을 듣고 “이름이 좀 이상한데?”라고 생각하거나, 컬럼비아라는 말을 듣고 커피가 유명한 남미 국가를 먼저 떠올리는 과거의 나 같은 수준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학교는 많아야 수십 개다. 일단 시작하면 더 많이 보인다. 막연히 바라보고 있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일단 한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세계는 갑자기 구체적인 얼굴을 드러낸다.


나중에 바뀔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현실적인 진학 가능성, 물론 이 ‘현실적’이라는 기준은 불과 며칠 뒤부터 흔들리기 시작했으니, 그냥 희망 학교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위치, 학비, 그리고 졸업 이후의 아웃풋을 기준으로 5개 정도의 파이널 리스트를 만들었다. 가능하면 비슷한 조건을 요구하고, 동부에 있는 대학들이었다. 컬럼비아, 코넬, 유펜, NYU, 보스턴대학교. 이 과정을 거치며 새삼 깨달은 건, 대학교에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전공과 트랙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MBA와 비-MBA

학계를 전혀 모르던 나는, 말 그대로 MBA 하나만 떠올린 채 리서치를 시작했다. 그런데 경영대학원 안을 조금 더 들여다보니, 커리큘럼은 비슷하지만 방향이 전혀 다른 석사 과정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떤 프로그램은 증권과 금융에 특화되어 있었고, 어떤 곳은 통계나 기술, 리스크, 부동산을 중심에 두고 있었다. 심지어 1년 만에 끝나는 과정도 있었다. 기간이 짧은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메리트였다.


다른 사람이나 다른 회사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휴직이라는 옵션이 없던 내 상황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해외로 나간다는 건 꽤 큰 결단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내 주변에는 참고할 만한 비교군도 없었다. 그래서 정말 많이 찾아보고, 비교하고, 따져봤다. 단순히 ‘유학’이 아니라, 지금의 삶을 어떻게 끊지 않고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굳이 그 당시 내가 만든 표를 첨부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고민했던 가장 큰 요소들은 이랬다. 인턴십이나 인지도 면에서는 MBA가, 기간이 짧다는 점뿐 아니라 학비와 생활비 등 전반적인 비용, 그리고 내가 관심 있는 영역에 집중할 수 있다는 면에서는 비-MBA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신경 쓴 것은 서머 인턴십에서의 차이였다. 미국에서 IB, 컨설팅, 테크 회사들은 MBA 대상 서머 인턴십을 운영한다. 기왕 미국에 간 김에 직무 경험도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MBA는 각 학교에 인원이 많고 채용도 활성화되어 있어 학교 측의 지원도 많고, 회사 측에서도 비교적 표준화된 채용을 한다. 미국에서의 직무 경험이 없는 외국인의 경우, 서머 인턴십에 공격적으로 지원해 인턴을 한 회사에서 오퍼를 받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미국에서의 직무 경험을 어필해 졸업 후 다른 회사에 지원하는 코스가 일반적이고, 실현 가능한 베스트 옵션처럼 보였다. 반면 1년 코스라면 9월에 시작해, 남들이 서머 인턴십을 할 즈음 곧바로 취업 시장에 나가야 하는 구조였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 리스트를 만들 때는 섞어서 넣었다.

처음부터 완벽할 필요는 없다. 뭐, 되고 나서 고민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나는 아직 1년의 시간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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