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느낀 학연과 갑자기 인턴십
미국에 가기 전부터 “미국에서는 네트워킹과 커피챗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하지만 솔직히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한두 번 만난 사람이 왜 나를 소개해 주겠는가 하는 생각도 있었고, 그게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이 될까 싶기도 했다. 내가 익숙한 영국에서도 네트워킹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긴 하지만, 그게 안 될 사람이 되게 만들 정도의 임팩트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때까지 나는 그런 것 없이도 인터뷰를 꽤 잘 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누군가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는 분명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주, 매우 중요하다.”
그 무렵 나는 계속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있었다. 리젝션 이메일 하나하나는 큰 타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수천 개가 되고, 몇 달 동안 시도 때도 없이 쌓이기 시작하자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그래도 생각했다.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이렇게 미국에서 지원해 보겠어.”
그래서 소처럼 묵묵하게 지원했다. 짬이 나는 모든 시간에 지원했다. 학교에 있을 때도, 조교 일을 하면서도, 운동하는 한두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계속 지원서를 넣었다. 사람도 거의 만나지 않았다. 덕분에 지금도 브라운 근처에 뭐가 있는지 잘 모른다. 입학 전에는 국제기구에서 다른 일을 하느라 동네를 둘러볼 시간이 없었고,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손바닥만 한 방에서 이력서만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우리 학과 대시보드에 채용 공고 하나가 올라왔다. 뉴욕에 있는 자산운용사였다.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했지만, 어차피 지원한다고 해서 내가 잃을 건 없다는 생각에 지원서를 넣었다. 며칠 뒤 조교 일을 하러 강의실에 들어갔는데 교수가 그 채용 공고를 봤냐고 물었다. 봤다고 대답하자, 혹시 지원하지 않았으면 한번 지원해 보라고 권했다. 내가 인터뷰 일정 때문에 다른 조교와 스케줄을 바꾸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 교수의 강의를 좋아해서 실제로 수업도 듣고 두 과목의 조교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학생을 잘 챙겨주는 건가 보다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뒤 인터뷰 일정이 잡혔다. 이미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인터뷰를 보고 있던 상황이라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스케줄을 조율하고 비교적 가벼운 분위기의 전화 인터뷰를 봤다. 짧은 기간 동안 인터뷰를 꽤 많이 봤다고 생각했고, 미국 투자회사 특유의 말하는 방식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회사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며칠 뒤 또 다른 사람과 2차 인터뷰를 봤다. 그리고 합격.
다른 회사였다면 인턴십 하나에도 한 달 넘게 인터뷰를 보고, 여러 사람과 연달아 미팅을 하고, 그 사이사이에 시간도 꽤 길게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여기는 너무 빨랐다. 말 그대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진행됐다. 내가 외국인이라는 걸 모르나, 회사가 급한 건가, 아니면 내가 뭔가 놓치고 있는 건가.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인터뷰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유독 브라운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내가 어떤 과목을 듣고 있는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친근하게 물어봤다. 그리고 내가 어떤 교수의 조교를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자 분위기가 갑자기 밝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교수는 잘 지내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 회사의 대표와 주요 임원들 중 브라운 출신이 유독 많았고, 10년도 넘게 학교에서 꾸준히 채용을 해오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지원했던 그 인턴십 프로그램 자체도 내가 조교를 하던 바로 그 교수의 제안으로 처음 만들어진 프로그램이었다.
아니, 한국에서도 덕을 보지 못했던 학연이라니. 순간 웃음이 나왔다. 한국에서 학연, 지연, 혈연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나와는 크게 관련이 없는 이야기였다. 추천채용 같은 단어들도 들어는 봤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나 어딘가 찜찜하고 씁쓸한 뒷맛이 남았다. 추천채용이나 혈연 뒤에는 늘 “낙하산”이라는 말이 따라붙었고, 학연이나 지연이라는 말 뒤에는 비즈니스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카르텔”이나 “진골, 성골” 같은 표현이 붙곤 했다. 그래서 그런 연결이 실력과는 별개의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누리지 못했던 학연을 미국에 와서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게 묘하게 낯설면서도 조금은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상태에서 풀타임 포지션 지원은 계속 이어갔다. 그 이후에도 수십 번의 인터뷰가 있었고, 몇 번의 합격, 몇 번의 오퍼 철회, 그리고 내가 거절한 제안들도 있었다. 불확실하고 힘든 시간들이 이어졌지만, 어쨌든 미국의 투자업계에서 일을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목표 하나는 달성한 셈이었다. 미국 석사를 하면서 꼭 이루고 싶었던 소기 목적은 이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한 챕터의 마무리가 아니었다. 일을 구하긴 했지만 내가 생각하는 소위 말하는 풀타임 포지션이 아니라 인턴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더 열심히 지원을 이어갔다. 이제 남은 건 인턴으로 살아남는 것이 1순위였고, 미국에서 풀타임 포지션을 찾는 것이 2순위였다. 솔직히 그때 누군가 나에게 “졸업 후 여기서 계속 인턴을 할래,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갈래?”라고 물었다면 아마 한국을 선택했을 것이다.
이 시기에는 언제나 마음속에 하나의 저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저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계속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협상학에는 BATNA라는 개념이 있다. 협상이 결렬되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차선책을 의미한다. 이게 실제로 실행될 필요는 없다.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협상력은 올라간다.
예를 들어 내 상황에서
“이게 안 되면 한국에 가지 뭐. 막연하긴 하지만 불과 1~2년 전보다 스펙도 좋아졌으니 좋은 데 갈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이거 아니면 안 돼.”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멘탈과 협상력은 완전히 다르다.
시간은 착실히 줄어들고있었고,
졸업식 날자는 점점 다가오고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하루하루는 점점 더 절박해지고 있었다.
이건 내가 미국, 한국, 영국에서 지원자로서 부딪히며 배운 것들, 그리고 지금 채용을 맡으며 더 분명해진 생각들이다. 벤처 및 투자전략실을 이끌고, 싱크탱크 프로그램 면접과 취업 특강을 하며 느낀 점을 정리해 본다.
시작하기 전에 하나만 짚고 가자. 이 사람은 당신의 교수도, 선생님도, 가족도 아니다. 당신에게 잘해줘야 할 어떤 의무도 없다. 디폴트는 당신이 보낸 이메일을 그냥 무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을 내준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다. 그렇다고 무시당할까 봐 연락을 안 할 필요는 없다. 이메일 하나, 메시지 하나 무시당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1. 커피챗은 취업을 부탁하는 자리가 아니다
처음에는 커피챗이 굉장히 어색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왜 시간을 내달라고 해야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몇 번 해보니 이건 취업을 부탁하는 자리가 아니라, 업계를 밖에서 보는 시각과 안에서 보는 시각의 간극을 줄이는 자리였다.
예를 들어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지원 전략이 훨씬 명확해진다.
이 회사는 실제로 어떤 일을 하는지
채용 과정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새 누구를 뽑는지
어떤 배경의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는지
2. 커피챗은 생각보다 부담 없는 대화다
많은 사람들이 커피챗을 굉장히 공식적인 자리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15~20분 정도 가볍게 이야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대방도 본인 역시 예전에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시간을 내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너무 완벽한 질문을 준비하기보다는 몇 가지 질문만 준비하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는 편이 더 좋다. 내 경험상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한다. 특히 자신이 잘 아는 분야라면 더 그렇다.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지금 팀은 어떤 일을 하는지, 처음 들어올 때 도움이 됐던 경험은 무엇인지. 이 정도만 물어봐도 충분하다. 너무 부담가지지말자.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지금 팀은 어떤 일을 하는지
처음 들어올 때 도움이 됐던 경험은 무엇인지
3. 네트워킹의 효과는 ‘소개’보다 ‘정보’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네트워킹을 하면 누군가가 바로 소개를 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경우는 많지 않다. 대신 커피챗을 하다 보면 회사 내부의 분위기나 채용 타이밍 같은 정보를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정보 하나가 때로는 지원 전략을 완전히 바꾸기도 한다.
4. 리퍼럴 (referral)을 어려워하지말자
대부분의 회사에는 직원 추천 제도가 잘 마련되어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미국은 특히 더 활성화되어 있는 편이다. 누군가의 추천으로 입사하게 되면 회사에 따라 추천인에게 일정 수준의 인센티브가 지급되기도 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업계 소개나 소위 말하는 추천채용, 학연 등에 한국에서처럼 “낙하산”이라는 부정적인 꼬리표가 붙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다. 물론 명확히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들어온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대부분은 인터뷰 과정에서 걸러진다. 설령 통과하더라도 결국 회사에서 오래 살아남기 어렵다. 필요하다면 주저하지 말고 요청하는 것이 좋다.
5. 마지막, 결국 사람은 사람을 기억한다
채용은 결국 사람이 사람을 뽑는 일이다. 그래서 때로는 이력서보다 “아, 그때 이야기했던 그 사람”이라는 기억이 더 오래 남기도 한다. 리퍼럴도, 커피챗도 결국 같은 이야기다. 단순히 이름을 올리고 기회를 얻는 문제가 아니라, 완전히 낯선 사람에서 아는 사람으로 변하는 과정이다.
중요한 건 추천 그 자체보다도 어떤 접점이 있었고 어떤 인상을 남겼는지다. 짧은 대화 한 번, 메시지 하나로 나중에 다시 이어질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그리고 유학생으로서의 네트워킹은 당장의 결과를 기대하는 행동이라기보다, 나중에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하나씩 쌓아두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