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버스에 걸린 기도의 흔적
7080년대 한국의 버스,
택시 기사 옆에는 흰 잠옷을 입은
어린아이가 두 손을 모으고 있는
그림이 당연하게 걸렸다.
"오늘도 무사히"라는 글귀와 함께.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녀의 기도"라는
제목을 알고 있고,
소년이 아닌 소녀로 알고 있다.
그 그림은 운전석에 매달려 아버지의 안전을
빌던 가족의 마음을 담았고,
길 위의 위험을 상시로 마주하던
시대의 집단적 염원이었다.
1969년 서울의 한 경찰서는 이 그림을 2,000장 인쇄해 택시 운전사들에게
나눠 주며 차 안에 붙여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대중교통의 난폭 운전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의 원작이 바로
조슈아 레이놀즈의 <어린 사무엘>(1776)
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영국 왕립미술학교 초대 원장이자
귀족 취향의 안정된 초상화로 명성을 얻은 화가가,
어떻게 한국의 일상 속에 스며들게 되었을까?
그 답은 그림 속에 숨은 보편적 정서에 있다.
무릎 꿇은 소년의 고사리손이 만들어내는 형상은
종교적 경건함을 넘어,
모든 이의 마음속에 자리한 '오늘을 견뎌내고픈' 간절함을 응축한다.
레이놀즈는 성경 속 사무엘의 이야기
- 기도로 얻은 아들이 신에게 바쳐진 서사-를
단순한 종교화가 아닌 인간 본연의 순수함으로 재해석했다.
어두운 배경에 홀로 빛나는 소년의 얼굴은
렘브란트의 카라바조적 명암법을 연상시키며,
신과 인간의 관계를 빛과 그림자의 대비로 은유한다.
화폭 속 시간의 층위
이 작품은 레이놀즈의 실험적 기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현장이기도 하다.
그는 당시 영국 초상화의
전통적 붉은색 피부톤을 거부하고,
빛의 투과성을 강조하기 위해
붉은 레이크 안료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 안료는 시간이 흐르며
퇴색하는 치명적 결함을 지녔고,
결과적으로 그림 속 소년의 얼굴은
원작의 따뜻함 대신
창백한 유령 같은 분위기를 띠게 되었다.
이는 마치 인간의 기도가 세월에 닳아가는
과정을 연상시킨다.
원래의 색채를 상상하며 바라보면,
화가는 의도치 않게 시간의 무게까지 화폭에 담아낸 셈이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은 두 번의 버전으로 존재한다.
프랑스 몽펠리에 파브르 미술관에 소장된 원작과,
영화 <올드보이>(2003)에 등장한 복제본.
박찬욱 감독은 주인공 오대수의 감금 방
벽에 이 그림을 걸어,
신에게 구원을 청하는 소년과 복수에 사로잡힌 남자의 대비를 극적으로 강조했다.
종교적 순수성과 폭력적 절망이 한 화면에서 충돌하는 아이러니-
레이놀즈의 그림은 시대와 공간을 넘어
새로운 맥락에서 재탄생하는 유연성을 보여준다.
1970년대 산업화의 거친 파도 속에서 사람들은
교회나 사찰이 아닌 버스 창가에 걸린
이 그림 앞에서 일상의 안전을 빌었다.
신앙의 경계를 넘어 생존 그 자체에 대한 염원이,
화폭 속 소년의 손끝에서 현대인들의 마음속으로 스며든 것이다.
레이놀즈가 의도한 종교적 서사는 사라졌지만,
그림이 지닌 보편적 정서는 새로운 문화적 층위를 구축했다.
빛으로 새긴 인간의 초상
오늘날 이 작품을 바라보는 이는 두 가지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하나는 "기도란 무엇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이 시대를 초월하는 힘을 갖는가"이다.
레이놀즈는 기술적 결함으로
퇴색한 그림을 남겼지만,
그 결함이 오히려 인간의 유한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시간에 닳아가는 물감 층위 사이로 비치는
소년의 모습은,
완벽함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욕망과 인간 존재의 덧없음이 공존하는 역설적 풍경이다.
미술관 벽에 걸린 작품 앞에서,
문득 1970년대 버스에 매달렸던
복제판을 떠올린다.
당신의 기도는 어디에 머물렀나?
신을 향한 경건함인가,
일상을 견뎌내기 위한 투정인가.
레이놀즈의 화폭은 그 모든 질문을
허공에 붙잡은 채,
관람객에게 고요히 미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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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CHhEPnrjaRE?si=jyXZGTy-ep5jhwQ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