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읽는 밤
권력의 중심지에는 언제나 그림이 있었다.
조선시대 어좌 뒤 일월오봉도가 왕의 위엄을 상징했듯,
현대의 청와대에도 600여 점의 미술품이 권력과 미학의 조우를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단순한 장식 이상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청와대 컬렉션은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다.
1970년대까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던 이 컬렉션이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민주화와 궤를 같이한다.
군사정권 시절 장우성의 작품들이 권위를 장식했다면,
노태우 시대에는 대규모 건축과 함께 본격적인 수집이 시작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동양화 중심의 전통적 취향을,
김대중 정부는 추상화와 청자를 통한 다양성을,
노무현 정부는 민중미술까지 아우르는 포용성을 보여주었다.
흥미로운 것은 각 정부의 성향이 그림 선택에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점이다.
개신교 신자였던 김영삼 대통령 시절 불교 관련 작품들이
창고로 들어간 일화는 권력자의 개인적 신념이
국가 컬렉션에 미치는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대중 대통령의 추상화 선호,
이희호 여사의 꽃그림 취향,
노무현 대통령의 민중미술에 대한 관심은 각각 그들의 정치철학과 무관하지 않다.
전혁림의 ‘통영항’은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주문해 1억5000만원에 구입한 것이다.
2005년 우연히 TV를 통해 이 그림을 본 노 전 대통령이 작가의 전시가 열리던
경기도 용인 이영미술관으로 찾아가 “힘들 때마다 다도해를 내려다보며 위안을 받았다”고
고백한 뒤 화가에게 청와대에 걸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구순이었던 전혁림은 4개월간 작업해 한산섬과 미륵섬을 품고 있는 ‘통영항’을 완성했다.
청와대 인왕실에 걸려 있던 그림은 이후 이명박 대통령 때 교체됐다가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뒤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권력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작품의 운명도 달라진다는 걸 보여준 대표 사례다.
이상범의 '산수' 역시 수억원대 가치.
숫자로만 보면 막대한 국가 예산이지만,
이 작품들이 지닌 문화적 가치는 돈으로 환산하기 어렵다.
국무회의장을 배경으로 하는 박영율의 '일자곡선'은
매일 중요한 국정 결정의 증인이 되고 있고,
김기창의 '농악'은 신명나는 농민의 장구소리로 권력의 무게를 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청와대 컬렉션의 진짜 문제는 투명성 부족이다.
미국 백악관이 홈페이지를 통해 소장품을 공개하는 것과 달리,
청와대의 그림들은 방송 화면 뒤편에 어렴풋이 비칠 뿐이다.
조달청 장부와 실제 소장품 수의 불일치,
구입 시기와 가격의 불투명성은 불필요한 의혹을 낳는다.
2018년 청와대 사랑채에서 ‘함께, 보다’라는 제목의 전시를 열고
소장품 중 한국화·서양화·조각·벽화 등 31점을 공개한 게 전부다.
청와대는 더 이상 '일월오봉도'가 걸린 제왕의 깊은 궁궐이어서는 안 된다.
국민의 세금으로 구입한 문화재산인 만큼,
그 전모를 공개하고 국민과 공유해야 한다.
권력의 상징이었던 그림들이 국민 모두의 문화유산으로 거듭날 때,
비로소 진정한 민주주의의 미학이 완성될 것이다.
청와대의 그림들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 현대사의 흔적이자,
권력의 변화를 기록하는 무언의 증인들이다.
이제 그 증언을 국민 앞에 당당히 펼쳐 보일 때가 되었다.